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존재하고 있을까.
돈이 부족해서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 잠이 오지 않아서 밤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 몸이 아파서 죽음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 등에 둘러 쌓여 그 안에 존재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존재가 이러한 불안 속에 쌓여 있다라고 강하게 느껴질때, 우리는 불행한 삶속에 놓여져 있다라고 볼수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가격은 싸지만 자장면이 맛있다는 느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라는 사실, 오늘은 춥지만 봄이 온다는 사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라는 것등등... 이러한 행복한 느낌들도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느끼고 바라보는 삶이 불안한 쪽을 향해 있다면, 우리는 불행속에 살고 있다고 여겨지고, 내가 바라 보는 삶이 행복한 실존쪽으로 향해 있다면, 우리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 가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사실 불안에 대한 강렬한 경험들 ( 불면, 질병, 상실 등등...)은 행복에 대한 경험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분명 그러한 불안 근심 분노라는 실존들에 둘려쌓여 존재 하고 있다 하더라도, 봄의 따스함, 부모님의 사랑, 내가 사랑하는 것들, 하나님의 사랑등 또한 실존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하겠다.
내가 불행에 둘러 쌓여 있어 괴로움에 빠져 있지만, 내의 의식이 그쪽으로 향할뿐, 고개를 돌리면 다른 것들도 나를 둘러싸고 있다고 할수 있을것 같다.
행복의 시작은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는 것에서 시작되어 질수 있을것 같다.
그리고 내가 할수 있는 것과 내가 할수 없다고 여기는 것도 한방향으로만 보기 때문인것 같기도 하다.
장자의 소요유 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
해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 위왕은 나에게 큰 박씨를 주었내. 내 이것을 심어 잘 길렀더니 다섯섬들이의 열매가 맺혔네. 이것에 물을 담았더니 그 무겁기란 혼자 들 수가 없을 정도였지. 이를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자니 평평하고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네. 확실히 크기는 크지만 쓸모가 없기 때문에 나는 이를 부숴버렸네."
장자는 대꾸했다.
" 선생은 본디부터 큰 것을 쓰는 데 서투르군요. 송나라 사람으로 손이 트지 않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대로 솜을 빨아 바래는 것으로 업을 삼았소. 나그네가 이 소문을 듣고 백금을 주고 그 방법을 사기를 청하였소. 그 장석이 일족을 모아 의논하기를 < 우리가 대대로 솜을 빨아 바래는 일을 해왔지만 수입은 몇 푼 안되었다. 지금 하루아침에 비방을 백금에 팔라 하니 이 기회에 팔아버리자> 하였소.
나그네는 이 비방을 사가지고 이걸로써 오왕을 설득했소. 오왕은 그 사람으로 장군을 삼았소. 겨울 월나라 사람과 수전을 벌여 월인을 크게 무찔렀소. 오왕은 그 전공을 치하하여 땅을 갈라주어 그를 후로 봉했소. 손트는 것을 낫게 함은 마찬가지요. 그런데 혹은 봉작을 받고 혹은 솜빠는 일을 면치못하오. 즉 모든것은 쓰기에 달린것 이오.
지금 그대에게 다섯섬들이 박이 있소. 어찌 이로써 큰 통을 만들어 강호에 띄우는 걸 생각지 않고 너무 커서 들어갈 곳이 없음을 걱정하는가. 이는 곧 선생에게 손된 마음이 있기 때문이오"
----
내가 불행한것 같아도 방향을 돌려 자세히 들여다 보면 행복한 것들도 같이 존재 하고 있다.
내가 가진 것들도 별로 없는것 같지만, 큰일을 할수 있는 씨앗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다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가진 행복들은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면서 나를 바라 보고 있어야지만, 이 경쟁사회에서 뒤쳐지면 죽는다라는 개념으로 부터 빠져 나올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큰일이란 사람들의 관점에서 큰일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서 죽는데 그러나 "나의 삶은 존재의 이유가 있다" 라는 관점에서 존재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