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저녁쯔음 50대 아주머니와 20대 남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밝게 웃는 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비쳐보였다. 내가 그분들과 스쳐지나갈때쯔음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지나가고 있었고, 20대 남자는 정신지체장애인인듯이 보였다.
아마 장애인으로 살아 가려면, 웃으면서 살아가야 사람들이 덜 싫어할것 같다는 생각에 자신으로부터 이던 가족으로 부터이든 웃음이 얼굴에 새겨진 듯한 모습이었다.
어미니에게 있어서 자식은 운명이다. 자식을 사랑할수 밖에 없다.
외면할수 없으므로, 그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렸을지 모르겠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돌보아야 한다.
마누라를 사랑한다. 마누라는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힘들어한다.
그것 때문에 간혹 싸우기도 한다.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살고, 지금까지 조금 무관심하게 살아 왔다면, 어머니에 간병에 대한 조금의 불성실은 그렇게 가슴아프지 않을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와 가까이 살고, 항상 돌봄을 받았고, 너무 사랑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어머니의 아픔에 무관심 하다는 것이 더욱 심적으로 힘들어 질수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또 사랑하는 마누라가 어머니를 간호하는데 힘들어 한다면, 그것 또한 심적으로 힘든 일이 될것이라 여겨진다.
가장 편한 것은 내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도 부족하고 마누라에 대한 사랑도 부족하다면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이상황에서는 마음이 가장 편안하게 될수도 있을것 같다.
마음이 편안하다는게 항상 좋은 것인가. 이런 의문이 든다.
삶이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죽을때까지 살아가는 것이 최고로 잘 살아 가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랑이란 시련과 불편함과 힘듬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느껴간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갈수록, 내가 짊어지고 가야만하는 시련의 무게가 늘어감이 느껴진다.
장애인 아들하고 지나가면서 눈물흘리던 아주머니의 사랑은 그아들을 외면할수 없게 만드는 무거운 짐으로 보여졌다.
얼마전 암으로 돌아가신 한분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이 살아가면서 하지 못해 안타가웠던 것을 들었다. 해보고 싶었지만 못해본것들이 아니었다.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이었다.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할때, 자신의 짐이 너무 무거워 잠시 무관심 해서 그 고통을 나누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까운 것이라고 한것 같다.
내 짐이 무거워 힘들어서, 내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함에 무관심 해지고 있는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짐이 무겁고 더욱더 많이 지면, 지금은 힘들어도, 기다림속에서 내 짐을 나눌사람들이 늘어가고, 한줄기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은총의 삶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믿음을 머리로 하고 있는 내자신을 바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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