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0일 목요일

트레비소 씨앗 /붉은색 치커리 치콘/ 흙과씨앗

<트레비소씨앗>

트레비소, 치커리의 한종류이다.
씨앗의 생김은 쑥갓하고 비슷하다. 크기는 조금 작은 느낌이 든다.

키우기 쉽고, 수확량이 많다고 한다.
샐러드, 쌈, 녹즙용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먹어 보지는 못했는데, 맛있을 것 같다.  (상상하는 맛과 실제는 틀리지만...)

저런 씨앗 모양에서 어떻게 싹이 날까 싶어도.. 싹이 난다.
'세상은 이래야 한다'라는 고정된 생각을 가끔 가진다.
그런데.. 내가 이래야 한다는 방향으로 세상은 가지 않느다. 그뿐만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자주 틀리기도 하다.
씨앗을 파종해서 키우면 배우는 것이 있다.
몸으로 배운다. 지식이 몸으로 드러나서... 배운다.
싹은 일정한 온도가 되어야지 올라오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한다.
자꾸 인위적으로 조정하고 싶어진다.
인위적인 것은 일정한 한도 내에서 가능하다.
자연 전체로 보면 아주 미미하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몸으로 체화된 기다림...

치커리를 키워서 먹는 것은...경제적으로 보면 비효율적이다.
그 비효율은 돈이라는 단 하나의 관점이다.
치커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긴다.
tv보기, 컴퓨터 오락, 낮잠자기 등등...
불편을 요한다.

지적 관점으로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하나 손해본다.
그런데 경험상 하나를 포기 하면 하나가 생긴다.
건강한 관심이 늘어가고, 나와 식물이 교류한다.
나와 너의 관계, 나의 관심의 안테나 속에 tv, 컴퓨터등의 간접 경험이 직접 경험으로 바뀐다.
건전한 관계는 치유의 힘을 가진다.
그래서 힘들 때, 무의식적으로 친구나 대화상대를 찾는다.
나와 식물과의 관계가... 좋은 사람과의 관계보다.. 못할수 있다.
그런데... 벽을 쌓아서... 닫혀있는 경우... 그래도 치유의 힘을 가진다.
치유는 벽을 허무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 마지막 남은 잎사귀는 생명을 살린다.
그 잎이 실제이든, 그림이던, 한사람이 부여하는 의미는 생명까지 살린다.

우리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작은 치커리, 경제적으로 아무소용없다. 그러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를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내삶은 세상의 것이다.
내 삶이 나의 것이기 위해서는 하나의 치거리라도 나의 의미가 부여 되어야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작은 의미도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부인을 이해하고.. 내가 부모님을 이해하고, 내가 친구를 이해하고... 그 시작점에 선다.

결론이 치키리를 키우자로 간다.
치커리를 한번 키워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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