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2일 수요일

잠에 관해 공부해 보고 싶다.

국민학교때 였던것 같다.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혼자 갔었다. 몇일을 자고 와야만 했다.
그날 저녁 나는 잠이 안와서 울면서 집에 가야한다고 소란을 피웠고, 그이후로 다른 집에 가기만 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다른 친척집에 가야 한다면 가장 큰 걱정은 잠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였다.
다른 집에 갔을때 잠을 자기 위한 방법중에 하나가 눈을 뜨고 밤을 지세기로 노력하는 것이었다. 무조건눈을 뜬채로 있는거다. 그러나 시골을 경우 너무 어둡기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알수 없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눈을 뜨고 있으려고 노력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에 빠지게 되었다.
한번은 가족과 함께 다른 친척집에 자고 올 경우가 있었는데, 너무 잠이 안와서 엄마한테 가서 울면서 잠이안오다고 말하면서 그옆에 누웠었는데, 엄마옆이 포근해서 인지 바로 잠이 들었었다.
요즈음 심리학에 관심이 있어서 그쪽에 관한 책을 보면서, 잠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고, 아마추어로서 잠에 관해서 내 나름의 관점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2010년 12월 20일 월요일

톨스토이의 마지막인생 - 사랑하라

교회를 갔다 오면서 오랜만에 마누라와 영화를 보러 갔다.
나는 늦게 교회를 가서 예배만 보고 오고, 마누라는 새교부 반주 때문에 나보다 일찍 가서 늦게 돌아 온다.
오랜만에 시간이 맞아 영화를 봤다.

톨스토이의 마지막인생...
한때 톨스토이 작품을 거의 다 읽었었는데 내용의 기억은 거의 없고, 카츄샤 밖에는 생각이 안난다. 아마 내 기억의 어느 모퉁이에 저장되어 있을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 되었고, 영화가 끝날때 눈물이 났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였고, 그 서로 다른 방식이 갈등을 낳지만, 사랑이라는 본질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 느껴 졌다. 그리고 사랑이 인간 존재의 이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와 나아닌 사람과의 사랑이 기쁨을 주기도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한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 기쁨도, 고통도 슬픔도 피할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린다.
사랑하는 자식이 아프고,사랑하는 마누라가 힘들어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이 고통스러워 하고 있으면, 나도 그 고통을 피할수는 없다. 그게 사랑의 운명인것 같다.

예전엔 연애가 사랑의 모든 것인줄 알때가 있었던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씩 늘때마다, 하나씩의 짐을 더 짊어 지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짐과 다른 점은 사랑의 짐은 하나씩 늘더라도, 가끔씩은 그 짐이 가벼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때문에 나도 고통을 받을수 있지만, 사랑이 나의 존재 이유이고, 목적인것 같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 형제 부모 그들이 있기에, 가금씩은 두려움, 고통, 분노, 슬픔, 절망이 다가 오더라도 내가 살아 가는 힘을 근간이 되는것 같다.

영화가 끝날때 왜 눈물이 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많은 기억들 중에 사랑에관한 기억들이, 나의 기억들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찾이 하고 있다면, 행복도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 하고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나는 행복한가? 그답은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2010년 12월 18일 토요일

잠에 대한 생각 / 다마지오의 책을 읽으면서...

요몇일 안토니오 다마지오 의 "스피노자의 뇌" 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책을 읽으면서 불면과 관련해서 생각이 떠올라 내 멋대로 적어 본다. (분명 내가 이책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수도 있을것 같다. )

불안이 밀려온다.
처음에는 조금씩 천천히 시간이 갈수로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무엇이 불안의 원인일까.
의식 할수 있는것이던 무의식 적인 것이든, 나는 알고 있고, 마주치고 싶지 않는 것일수 있다.
내가 바라보는 것들, 내가 생각 하고있는 것들 , 내가 느끼고 있는것들, 이것들이 불안의 정서를 만들고, 정서는 뭐엇인가 안좋은 느낌을 만들고, 내 몸을 반응시킨다.

행복한것들은 몸을 행복하게 반응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몸을 힘들게 만들어 간다.
내가 바라 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될지 불편하게 될지가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잠에 대한 달콤한 기억이 중심이 되어 있으면, 잠을 잘 잘수 있게 된다.
잠에 대한 불편한 기억이 있으면, 불편한 정서를 만들어 내고, 잠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불편한 정서가 되어서, 불편한 느낌이 들어 간다. 그 느낌은 잠을 자기 위해 누워있으면, 손가락 마디마디의 근육의 움직임, 발가락의 미세한 움직임, 청각은 미세한 시계의 바늘움직임까지 들리게 만든다. 그러한 근육에 움직임과 청각의 예민해짐은 다시 정서를 자극하게 만들고, 정서는 느낌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그 느낌은 나의 감각들을 더욱 예민해 지게 만든다.

잠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때, 순간적인 반응이 나의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서 긍정적인 것을 끌어 내느냐가 불면에서 탈출하느냐가 달려 있을것 같다.
수많은 내속의 기억들속에서 강렬한 부정적인 기억들보다, 강렬한 긍정적인 기억을 활성화 시키느냐가 관건일수 있을것 같다.
하나의 의식이 강렬하면, 그 의식을 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것 같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면 검게 보이고, 붉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면 붉게 보인다.
긍정적이 의식이 긍정적인 정서를 만들면, 그 틀로서 바라 보는 세상은 밝게 보여진다.
부정적인 의식은 분노, 좌절, 등을 만들고, 그 틀로서 바라 보는 세상의 일들은, 나의 분노의 원인으로, 좌절의 원인들로 보여 진다.

'잠이 오지 않을 수 있다'라는 강렬한 의식에 둘러 쌓이게 되면, 그날 하루 내가 바라 보는 세상은 그 틀속에서 보여 진다. 불안 초조를 만들고, 근육들은 미세하게 떨리게 된다. 모든 감각들은 경계반응으로 들어 가고, 소화기능도 경계을 위해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잠이 오지 않은 나날 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될것같다. 내가 바라보는 부정적 정서의 안경을 벋고, 긍정적인 정서의 안경을 쓸때 까지의 시간...

그 시작을 나를 분노케 만들고, 불안하게 만든 것에 대한 용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여겨 진다. -약물(수면제등)은 임시방편이지 않을까- 용서외에는 그 감정의 불타오름을 잡을 다른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를 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의 말은 쉽지만, 그 말이 무의식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어 몸의 미세한 근육, 감각세포속 까지 들어 가야만, 말이 말로서 머물지 않고, 마음까지 다가 가게 되는것 같다.

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바둑 1단과 10급이 대국을 할때, 1단이 왼손으로 둔다고 10급과의 결과는 달라 지지 않는다.
바둑이 뇌를 사용하는 경기이기 때문에,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사용한다고 하여도 큰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9단과 9단이 경기를 할때,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사용하게 된면 질 가능성이 높아 진다.
익숙하지 않는 손놀림에 뇌는 일정영역을 할당하게 된고, 완전히 수를 생각하는 부분에 집중도가 낮아 질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12월 1일 수요일

점심때 돼지국밥을 먹으러 갔다.
요즈음 국밥에 푹 빠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