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9일 월요일

목적에 충실하지 못한건 장식품이다.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게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인것 같다.

다리는 다리를 만드는 원리에 맞게 만들어 져야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다리더라도 원리에서 벋어나게 되면 다리는 무너진다.
에초 다리가 없은것 만 못한게 된다.

행복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것도 세상을 살아 가는 원리에 맞아야 하는것 같다.
다리가 무너지면 그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상하듯,
세상의 원리에 맞지 않는 행복의 추구는 내 주위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를일이다.

다리는 목적을 가지고 목적에 충실해야 다리이다. 목적에 충실하지 못한건 장식품이다.

2011년 12월 13일 화요일

소통이란 전달이 아니다.

' 컬럼비아 대학의 한 교수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컬럼비아 대학은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거의 매일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니까요." 그는 1850년대의 남부 노예주인같이 말했습니다. '
사람중심 상담-칼 로저스-

소통이 무엇일까.
한사람은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야기 하고, 상대는 권위에 눌려 듣고 있다면, 이야기 하는 사람이 하고자하는 의도를 상대에 전달하는 것이다. 소통이 전달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이 살고 있다.

전달 받은 사람은 전달 하려 하고, 그 전달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결국 해야만 하는 것만 남게 된다. 해야만 하는 것이 쌓여서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면, 분노가 생기게 된다.
최초 전달하고자 하는 자는 전달 받는 자가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소통이 잘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서 전달이 되지 않으면 놀라게 된다.
더욱 강한 힘으로 전달을 한다. 전달 받는 자는 다시 참는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 참을 없는 자가 된다. 결국 상대는 전달받을수 없는 사람이 된다.

전달 받을수 없는 자로 만드는 것이 소통은 아닐것 같다.

종교다원주의 / 종교다원주의자가 될 가능성

나는 누구인가.
나를 찾아 마음속 깊이 들어 가보면
그 궁극에는 무엇에 다다르게 될까.

무의미를 만나면, 무신론자가 되고,
나의 존재 이유를 만나게 되면,
창조주의 뜻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생각 할경우 종교다원주의자가 될가능성이 높아진다.

2011년 12월 4일 일요일

세상이 많은 일들이 벌어 진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많아 진다.


마음이 혼란해 질때, 많은 사람들은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떨올리며 마음이 혼란해진 이유를 알기위해서 자신을 분석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건강에 좋지 않기때문에 스트레스를 피하거나,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한다.




자신을 분석하거나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역으로 자신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는것 같다.




마음의 혼란의 원인이나 스트레스의 원인을 찾아 가다 보면, 대상이 나온다.


어떤 대상 때문에 마음이 혼란해지는것(스트레스와 같은 의미인것 같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대상은 대부분 사람이다. 그 순간 대상은 증오나 분노의 대상이 된다.


불안 일경우 그 대상과 마주 할수 없다. 그래서 불안의 대상으로 분석해들어 갈수 없다.


불안을 걷어 내면 공포와 마주 해야 하므로 불안의 대상을 피하게 된다. 분석하다고 해서 자신의 불안의 대상과 마주 할수는 없다.




분노나 증오의 대상을 찾느다고 해도, 그 대상은 마음속에서 살아 있는 대상이므로


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반전

갖고 싶을 것을 갖기 위해서 갖고 싶은 것을 참고,
먹고 싶은 것을 먹기 위해서 먹고 싶은 것을 참고,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을 참고,

그러나
살아 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 가지만
결국 죽어야 한다.

사람이 생물학적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죽음이 모든것의 끝이라면,
인생은 아니러니이다.

그러나
삶이 죽음을 초월해서 무엇인가를 향할때,
삶은 의미와 역사가 된다.

2011년 11월 22일 화요일

스트레스가 기억력에 영향을 준다 / 몸의 기억 - 요하임 바우어

요하임 바우어의 몸의 기억이라는 책을 읽고있다.
이름이 생소한 뇌의 각부분 명칭들과 유전자, 단백질등의 이름들이 나온다. 그러나 큰줄기는 삶이란 환경에 영향을 받고 그 환경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 스트레스가 어떻게 몸에 영향을 미치냐 하는 것인것 같다. 그중에서도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큰 스트레스를 준다고 하는것 같다.

다음은 책중에 스트레스가 기억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한 부분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유전자가 할성화 되고 뇌도 영향을 받는다. 그 원인은 여러가지를 들수 있다. 첫째는 이미 언급한 코르티졸이다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의 코르티졸 수치는 급격히 상승한다. 이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뇌의 중요한 신경세포가 큰 손상을 입는다. 특히 코르티졸 농도가 증가하여 신경전달물질인 글로타마트와 함께 작용하면 신경세포는 '사망'할수도 있다.
스탠포드 대학의 스트레스 연구가 로버트 사폴스키는 아프리카에서 수년 동안 유인원을 관찰하고 사회적 관계에 의한 스트레스의 영향을 연구했다. 사포스키가 내린 중요한 결론 가운데 하나는 유인원 무리에서 관계 갈등으로 가장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짐승은 얼마뒤 뇌에 뚜렷한 손상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기억력에 특히 중요한 기능을 하는 해마의 손상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사폴스키가 내린 이 결론은 유인원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할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캐나다 학자 마이클 미니의 연구팀은 인간의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졸의 농도가 증가하면 나중에 기억 장애에 직접적 영향으 끼침 뿐만아니라 인간의 기역력과 관계하는 해마를 축소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힘든 경험과 스트레스로 인한 뇌조직의 손상을 CRH유전자의 활성화와 그 활성화로 증가한 코르티졸에만 원인을 둘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중략>

그런데 스트레스는 매우 중요한 신경 성장인자 가운데 하나인 BDNF를 억제한다. 스트레스로 인해 BDNF의 유전자가 억제되는 현상은 특히 해마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스트레스로 인한 BDNF의 유전자 억제가 가장 큰곳에서는 뇌 조직의 손상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스트레스는 신체 세포에 악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를 작동시키는 한편 좋은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를 억제시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뇌의 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스트레스가 타우라는 특정 단백질을 알츠하이머의 전형적 방식으로 바꾸수 있다는 현상을 보면 알수 있다. " 몸의 기억-요하임 바우어

2011년 11월 20일 일요일

빅터 프랭클의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

"이른바 자아실현이란 자아 초월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남아야 한다. 자아실현을 의도적 목표로 삼는 것은 자기 파괴적이고, 자멸적인 것이다. 자아실현도 실상은 정체성과 행복에 집착한다. 행복을 없애는 것은 바로 '행복에 대한 추구'이다. 우리가 행복에 집착할수록 더 많은 행복을 놓치게 된다. 성적 신경질환은 하나의 결과이다. 남성환자가 자신의 잠재성을 끌어내 보이려 하면 할수록 더욱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여성환자가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고 싶어하면 할수록, 불감증에 귀착할 가능성이 더 높다. "
빅터 프랭클의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 에 나오는 한 부분이다.

빅터 프랭클은 자신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미가 필요하다고 한다.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의미가 부여되진 대상을 향해 나아 갈때 행복은 부수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무의미와 마주친다.
무의미는 불안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 보면 의미들이 있다. 가족이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낄때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자신을 초월해서 살아 가는 삶 그것은 사랑을 추구 하는 삶이 아닐까. 내가 부모님을 사랑하면 그게 의미가 되는것이고, 내가 부인의 사랑하면 그게 의미가 되는 것이고, 자식을 사랑하면 그게 의미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살아 가면서 잊어 버린다. 의미는 가까운데 있는것을...

2011년 11월 15일 화요일

가을이 지나간다. 겨울이 온다.


날씨가 추워진다. 11월은 가을이어야 하는가.


추워도 가을이라고 해야 하는가.

2011년 10월 14일 금요일

옵티머스 큐 고장나다.

비가 왔다.


지금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


내일은 비가 올지 안올지 모른다.


현재와 과거는 안다.


미래는 모른다.


일기 예보는 내일 날씨를 예측한다.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내일을 예측한다.


완벽하지는 않다.






2011년 10월 8일 토요일

이러면 어쩌고 저러면 어쩌겠는가 싶다. 세상사 즐겁게 살면 되지...

이사한후 인터넷과 tv없이 2주 정도 지났다.
저녁을 먹고나면, 8시쯔음 부터 할일어 없어서.. 마누라와 이야기 하던가 운동을 하던가 책을 보았다.
평소 12시 경에 잠이 드는데.. 저녁 10시 부터는 할일이 없어서 마누라나 나나 빈두 빈둥 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한 일주일이 지나니까. 잠드는 시간이 1시간에서 2시간 빨라 지고.. 마누라와 이야기 하는 시간이 늘어가고, 책읽는 시간도 늘어 갔다.
tv를 보던 인터넷을 하던 그것은 쉰다기 보다는 내 감각들이 일을 하고 있었던것 같다.
내의식이 tv라는 단일 목적에 매여 있어도, 각각의 감각들은 tv의 나오는 화면의 색상 만큼이나 일을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습관이나 마누라의 습관이 tv나 인터넷에 수십년동안 적응되어 있어서 단2주일로는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cable tv와 인터넷을 설치하기로 했다.
아마 잠자는 시간은 뒤로 조금 밀릴것 같고, 책보는 시간과 대화시간도 조금씩 줄어 들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이러며 어쩌고 저러면 어쩌겠는가 싶다. 세상사 즐겁게 살면 되지...

2011년 9월 9일 금요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정치란 관심이다.

밤이 깊어 잠은 오고 정신은 멍하다.
무엇인가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손이 가는 데로 써보기로 하자.
옆으로 눈을 돌리니 미셀푸코의 " 앎의 의지" 라는 책이 보인다. 읽기는 했는것 같은데 책의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뉴스의 일면은 대부분 정치부분이다. 그리고 경제위기일때에는 정치보다 경제기사가 제일 먼저 나온다. 태풍이 왔을때에는 태풍이 일면이고, 올림픽 금매달을 땃을때는 올림픽이 일면이다.
일면의 경우 현재 우리생활에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치는 것이 나온다.
우리가 정치는 불신한다 하고 있더라도 실제 정치가 일반 국민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부분 정치기사가 일면을 장식한다.

과거에는 일반백성에게는 글을 안가르쳤다. 글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중요한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권력이라는 것은 앎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많은 사람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의 권력이 자신들의 권력의 유지를 여렵게 할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항상 정치란 더러운 것,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포장을 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줄어 들기 때문이다.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아 질수록 권력은 집중된다. 집중된 권력은 속성상 더 큰 권력을 만들려고 한다. 권력은 무한데로 커지지 않는다. 어느순간 썩게된다.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많아 지면, 세상이 혼란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 저기에서 권력들이 충돌하는것 처럼보인다. 곧 권력의 많은 치부들이 드러난다.
정치란 나쁜것, 가까이 가서는 안되는것 이런 논리가 나올때, 그 사회는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시련을 맞이한다.
이순간 정치란 나쁜것, 가까이 해서는 안된는것, 이런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 가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줄어 들고, 권력은 다시 집중이 된다. 그리고 썩는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드러난 치부를 바로 바라보게 되면 그 사회는 혼란스러워 보여도 발전의 동력을 얻게 된다. 바라 본다는것 자체가 치유의 힘을 가진다.
회피한다는 것은 곪는것을 의미한다.

보이는 상처는 치료가 가능하다. 보이지 않는 상처는 생명에 지장을 줄수 있다.

정치란 우리의 삶의 규칙을 만드는 과정이다. 어떤 규칙에서 경쟁을 하느냐에 따라서 어떤사람은 유리하고 어떤사람은 불리하다. 규칙을 만들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 혼란 스럽다. 혼란스럽더라도 참여해야 한다.
혼란 스러운 과정을 경험하다 보면, 질서가 생겨서 나중에는 혼란스럽지 않은 것이 된다.
규칙에서 소외되는 사람도 줄어 든다. 혼란스럽다라는 것은 질서를 만드는 자연적인 선행요건이다.
혼란스럽다고 그 과정을 없애려고 하면, 질서는 만들어 지지않는다.
혼란스러운 과정을 없애고 만들어진 질서는 강압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혼란을 경험해야 산이 산이 되고 물이 물이 된다.

2011년 9월 1일 목요일

대구세계육상선수권 대회 /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왼쪽에서 두번째 노랑색이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사진 기술이 없어 사진이 엉망이다. )

나는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항상 결과도 동시에 생각한다.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하면 어쩔까 하는 생각에 경제법칙을 적용시킨다.
최소투입에 최대효과... 그래서 항상 최선을 다해 살기보다는 요행을 바라면서 살아 가고 있는 지도 모를일이다.

몇일전 대구세계육상선수권 대회를 보러 갔다.
오스카 피스토리우스가 달리는장면을 보았다.
최선을 다했고, 결과가 나왔다(마지막으로 들어 왔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최선을 다해 살아 가는 그를 위한 격려의 박수 였던것 같다.

"당신이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달려 가는 것을 보니, 비록 끝으로 들어 왔더라도,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 결과에 대한 불안감을 무릅쓰고 그렇게 하는것이 참으로 용감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당신처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제가 하고 싶을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당신이 용기가 부럽고, 당신을 보면서 저도 용기를 내어야 할것 같습니다. 제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조건에 한탄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감탄의 박수를 보내고, 내 스스로에게도 오늘 이순간 부터 최선을 다하라는 격려의 박수를 스스로를 위해서도 칩니다. "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1년 8월 28일 일요일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까. 인화가 답인것 같다.

사람들은 왜 정치를 혐오하면서, 각자 지지하는 정치인이 있는 것일까.
'누구나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라는 어느 정도의 생각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타락한 곳이 정치라고 생각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정치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라고 정치를 정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사람이면 나를 잘살게 해줄수 있을 거야, 이런 사람이면 내가 직면한 고통을 이해해 줄수 있을거야..
어찌보면 사람을 살리는 의미를 정치인에게 기대 하고있는지 모를일이다.
자신을 살릴수 있는 사람이 현재는 정치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정치를 하면 좋을 거야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갈등은 왜생길까. A라는 사람이 나를 살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B라는 사람이 A를 공격하면, B는 A와 정치적 경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나를 살려줄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으로 느껴지고 그에게 혐오가 생기게 되는것 같다.

국민이 어느 정치인을 지지 하든, 아마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 하는 정치인을 자신들을 살리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 가능성이 큰것 같다.
자신을 살린다라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느낌이므로 동일한 행동을 보더라도 각자가 느끼는 상황은 달라지므로 각개인을 지지하는 정치인이 다를수 있다.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것은 자신을 살릴수 있는 사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공격하는 상대방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았을때 스스로 예측하는 미래의 불안정성의 심리적 표현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는 경쟁이고 경쟁에서 이기는 쪽이 대통령이 된다.
맹자에 '천시(天時)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 이런 말을 본것 같다.

현대 정치에서 천시는 무엇이고, 지리는 무엇일까.
천시란 정치적 선거가 있는 시점의 이슈의 선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많은 분들이 분배라는 이슈가 나(개인)을 살릴수가 있겠구나 했고, 그다음 경제의 성장 자체가 개인을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사람들은 '경제의 성장이 나를 살리는 일이 아닐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것 같다. 그래서 복지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나(개인)을 살리는 정치인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 나기 시작한것 같다.

다음 대통령 선거의 시점에서 천시는 '복지'라는 단어를 선점한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될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복지 라는 단어의 선점이 대통령으로 바로 가게 만들수 있을것 같지는 않고, 두개의 세력을 대표할 사람들이 될수 있는 것 같다. 천시를 얻어서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시를 얻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기위한 양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수 있게 하는 키워드가 될것 같다.

그리고 지리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인것 같다. 그 과거라는 것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 일수도 있고, 자신이 쌓아온 이미지 일수도 있지만 지역적 기반이 중요한것 같다. 두명의 후보가 나오게 되면 그사람들의 지역적 기반이 어디인가에서 지형의 불리함을 가지고 경쟁을 할수도 있고, 유리함을 기반으로 경쟁을 할수도 있게 될것 같다.

마지막이 인화인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인화인것 같다. 앞의 두개에서 앞어가도 인화가 깨어지면 경쟁에서 진다라는 것은 확실하다. 대부분의 승부에서 지리도 중요했지만, 대부분 인화에서 승부가 난것 같다.
두개의 세력이 있는데, 한세력 내부에서 갈등이 있으면, 대선의 승부는 불리하게 돌아간다.
좋은 사례가 아닐수도있지만, 결과적으로 3당 합당이 있었고, DJP 연합이 있었고, 경선에 불복한 경우가 생겨서 인화가 깨어진채 선거가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이제 대선을 준비하는 많은 분들이 천시를 얻기 위해 도전을 하게 된다.
천시를 얻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하는 도중에 서로 갈등을 하게 될수도 있다. 천시를 얻었지만 인화를 잃어 버려서 큰것을 놓지는 사람이 나올수도 있을 같다.

얻기 위해서 손에 있는것을 놓아야 한다. 인화란 내손에 있는것을 놓는것에서 시작하는 것같다.
아무리 유력하더라도 내손에 있은것을 놓지 못하면, 인화는 깨어진다.

2011년 8월 15일 월요일

요한일서 4장 믿음 사랑

저녁 집으로 오는길 작은 할머니가 자신 보다 등치가 큰 폐지들을 손수례에 싣고 가셨다.

그 손수례에 들려가는 폐지의 가격이 내가 들고가는 빵의 가격 보다 작게 나가 보였다.

그분이 오늘 하루 나보다 더 적게 일하신것은 아닐것 같은데, 나는 더 큰 걸 들고 집으로 향한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는 교회에 다닌다.



오늘 본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할머니의 어께에는 자신보다 더 무거운 짐이 놓여져 있다. 자신을 생존을 위해 하루 하루 살아 가실수도 있고, 몸져누워있는 자식을 위해 자신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 가실수도 있을것 같다.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이 그분을 외면하고 계셔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시는 것일까.

그분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살아가는데,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 가는데, 하나님이 사랑을 지키시는 분을 외면하고 계시는 것일까.



믿음이란 무엇일까. 교회에 나가는 것이 믿음일까.

내가 "믿는다"라는 말로 표현할때만이 믿는것일까.

믿는다고 말을 하는데, 사랑을 외면하면서 살아 가는것도 믿는것이 될수 있는것일까.



할머니는 자신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데, 나는 그저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빵을 들고 가면서 외면하면서 그냥 지나가고 있는데 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있는것일까.



나는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



사랑하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보다 무거움 짐을 지고 가고 있는 할머니가 오히려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것은 아닐까.



"요한일서 4장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일서 4장 8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그 사랑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를 아타까운 마음을 보라보고 계신것을 아닐까.

그 할머니는 믿음을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 어느 연설가가 목소리나 몸짓에도 진리를 넣어서 자기도 깊이 감격하고 또 사람을 깊이 감격시키면서 매우 감동적으로 진리를 설명하고, 태연한 태도와 대담한 눈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확고한 발굴림으로 모든 악과 모든 지옥의 힘을 딛고 일어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닥에 거의 끌릴 듯한 호사스러운 의복을 입은 채 아주 사소한 곤란에 대해서도 비겁하게 두려워하며 살며시 도망치는 일이 있다면, 그것도 또한 무한히 익살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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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이 뚫고 나간다. 누군가가 정당한 것을 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즉 그는 이해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해하고 있다는 그의 단언은 그릇된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中 -

2011년 8월 7일 일요일

단어의 의미 / 독도

무더위, 열대야, 여름, 찜질방, 용광로 이런 단어들을 본다음 팥빙수의 느낌과,
시베리아, 강추위, 배탈, 장염, 냉방병, 이런 단어들을 본다음 팥빙수에 대한 느낌은 조금 다르리라고 여겨진다.

어떤 하나의 이미지/느낌 이라는 것은 앞에서 일어난 것들과 연관을 가지면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카키고오리' 라는 단어를 들으면 이 단어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미지가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가 처한 어떠한 상황에서 하나의 말은 이미지로 만들어 지기도 하고 아무의미가 없는 것으로 지나가기도 한다. 카카고오리라는 일본어가 팥빙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팥빙수의 이미지를 가질것이다. 아마 각각의 개인은 각각의 다른경험과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팥빙수것에 대한 다른 이미지를 생각해 닐것이다. 팥빙수를 먹어보지도 들어 보지도 못했다면 그냥 아무 의미가 없는 것에겠고...

일반적으로 이런 단어의 이미지 효과를 잘아는 사람들이 정치인으로 성공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봤을때 아무런 의미라 없는 말 '우리가 남이가' 라고 했을때 이 문장이 가지는 의미에대해서 아무런 경험이나 정보가 약할때 그냥 아무 말도 아니게 된다.
그러나 어떤 지역적 상황에서 이말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의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긍정적일때 일정 지역에서는 "우리가 남이가" 라는 단어가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지역에대한 경험이 없거나 정보가 부족한 경우는 왜? 라는 의문부호를 단다.

재정적자, 초대형쓰나미, 원자력발전소, 가난한 국민, 내각에대한 지지율, 자민당, 일본, 이런 단어들을 들은 다음 독도라는 단어를 놓게 되면, 아마 현재 일본이 독도에 대해 도발을 하는 원인은 자국 국민의 불만을 대외로 돌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 이라고 이미지를 만들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일본내에서는 이러한 단어의 나열 다음에 독도를 넣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의 단어들 다음에 독도를 넣을것이라고 예측이 가능하다.

언론은 중요하다. 언론은 앞의 단어들을 만들어낸다. 일본국민들이 독도에 대한 이상한 망상을 가지는 것은 일본 언론이나 권력이 독도 앞에 우리가 생각하는 말과 다른 군국주의를 회상할수 있는 단어 다음에 독도를 넣기 때문에 일본 국민이 왜곡된 독도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언론이 갈수록 힘을 가지는 이유가 앞의 단어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기 때문에, 깨어 있지 못하는 개인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더라도 앞의 단어들에 여향을 받아서 언론이 만들어낸 이미지 속에 같히게 되는 사회로 갈수 있을것 같다.

그래서 서로 대립되는 언론이 필요한것 같다. 조선일보도 필요하고 한겨레신문도 필요하고...
그러나 힘의 균형이 필요한데... 지금 그 힘의 균형이 무너져서 한겨레신문을 좀 사봐야 할것 같다.

오늘도 헛소리를 적어 놓는다.

2011년 8월 2일 화요일

요한복음 15장 '사랑'

최근에 요한복음을 읽었다.
'15장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15장 12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5장 17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삶을 살아 가면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없으면 공허하다. 인생이 무의미하다 라고 할때, 내가 하고자 하는것, 그 하고자 하는 것이 없을때,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공허하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 사랑을 통해서 영원히 살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것 같다.

'15장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장 23절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누군가를 미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도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옆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징표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징표이다.

'15장 14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나는 교회에 다닌다. 원망도 생기고 미움도 생긴다. 믿음에 아직 의심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일까.
사랑을 통해서만 영원히 살아 갈수 있다라는 말을 하는것 같은데, 아직 나는 멀리있다.
아직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예수를 믿는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2011년 7월 14일 목요일

우리의 껍데기만 대우를 받는다

지긋 지긋한 장마로 인해 새상이 눅눅해 졋다.
마음도 점점 눅눅해져 간다.

하루에 몇번씩은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 이런 말들을 한다.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마음속 깊이 감사하는 것은 아닌데, 그냥 자연스럽게 나온다.
나에게는 어떤때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해야 한다고 내머리 속에 입력을 해놓고 있는듯 하다. 그렇게 하지 않은면 안되는 것 같아서 매너를 하고 있는 샘이다.

내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때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이런 경우 고맙다고 해야 한다고 정해 져있을때, 그 순간에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후자를 따르고 있다. 사회가 정해놓은 데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의 바른 사람이 아니라고 정해 놓고 있기 때문에 고맙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TV에서는 많은 정치인들이 연예인들이 '고맙다'거나 '감사하다'고 말을한다.
사회가 정해 놓은 데로 '이런 경우에 고맙다고 해야 한다' 라는 규칙을 잘지키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매너의 규칙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사람구실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안다'는 지식의 영역인데, 매너의 규칙을 잘아는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지식은 학력이 높은 사람이 아무래도 많을것 같다.
학력이 높고 사회의 규칙을 잘 아는 사람이 아무래도 좋은 사람으로 보일수 있는 개연성이 많을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생활에 시달리거나 하루 하루가 힘든 사람들은 매너의 규칙을 습득할 시간이 많지 않을수 있다.
그들의 말들이나 행동들은 매너를 하지 못할수 있다.
삶이 투박해서 감사하는 생각이 들때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사회가 어떤 경우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하는 때에 그가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그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닐것 같다.

세상은 자신의 본질을 숨기고, 매너를 해야 하는 구조로 변해 가고 있는것 같다.
이 구조 속에서는 우리의 본질과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사이이의 틈이 벌어 진다.
본질은 홀로 설수 없다. 본질과 매너의 틈이 벌어 진다. 우리의 본질이 소외된다.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잊어야지만 편하게살수 있다.
우리 자신이 드러나면 안되는 구조, 이구조에서는 우리의 껍데기만 대우를 받는다.
소외가 불안을 만들어 낸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로 또 헛소리를 하고 있다.

누가 이 글을 읽어 주실지 몰라도 '감사합니다'
이 '감사합니다'도 매너 인가?

2011년 7월 1일 금요일

마음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하나는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고, 하나는 안쪽세상에서 일어난다.
바깥세상이라는 것은 내가 바라보는 물질의 세상이고, 안쪽세상이라는 것은 내 마음 안의 세상이다.
어찌보면 바깥세상에서 일어 나는 일들은 내가 통제할수 없는 영역이지만 내 안에서 일어 나는 일들은 통제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바깥세상에서 일어난 일도 일정부분 나에의해 통제 되기도 하고, 내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통제되지 않기도한다.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객관적 일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깥쪽 일들이 나에게 다가올때 안쪽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바깥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나의 안쪽 세상의 영역이다.
동일한 뉴스를 보고도 각자 다르게 반응하는 것은 안쪽 세상에서는 다르게 받아 들여 지기 때문일것이다.

안쪽 세상/ 마음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꿈도 꾸고, 잡생각도 하고, 불안이 밀려 오기도 하고, 대부분 우리의 통제를 벋어나서 일어 난다.
우리가 통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뿐, 나머지는 통제되어 있지 못하다.
안쪽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중에서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들이 올라 오기도 한다.
그냥 올라와서 지나간다면 문제가 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그 올라오는 것이 사회적 금기일때 우리들의 죄책감을 유발하기도 해서 그 것을 숨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도 한다.
숨길 필요성, 들켜서는 안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함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안을 유발한다.
- 사람은 관계를 통해서 사회를 살아 간다. 홀로 된다는것 버림받는다는것 어찌보면 이것이 가장 인간에게 위기감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너무 순수해지려고 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우울증 강박증 대인기피증 이러한 것들도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에게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중에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 순수해야지만 가능한것이다.

인간은 살아 가면서 죄를 지을수 밖에 없다. 완벽하게 도덕적으로는 살아 갈수 없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 할수 없다면, 나또한 누군가에게서 용서 받을수 없을수 있다 라는 등식이 무의식 깊숙히 새겨진게 된다.

인간은 죄를 지을수 밖에 없다(도덕적으로 완결해 질수는 없다.)라는 실존 상황에 놓여져 있다.  

마음에서 발생하는 사태(생각)들이 금기적인 것이고, 마음이 순수하지만 위의 등식을 가진 사람의 경우라면, 내면적 갈증은 증폭할수 있을것 같다.
이러한 증폭은 마음의 병을 유발할수 있다.

마음이 병이 발생하는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너무 순수해지려고 하는 것도 마음이 병의 하나의 요인일수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2011년 6월 13일 월요일

폴 틸리히 /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자

일요일 밤이 지나 월요일이 되었다.
삶이란 그냥 흘러 종착점을 향해 나아간다. 무엇인가 허전하면서도 그냥 흘러간다.
삶의 동력을 잃은 듯도 하면서, 방향성도 잃은것 같고, 그렇지만 물위의 나뭇잎이 물길을 따라 그냥 일정한 방향으로만 흘러 가듯... 내가 방향을 설정하지 않아도 그냥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 간다.
오늘 하루가 그렇게 느껴졌다.

'항상 깨어있어라' 깨어 있지 못하면 그냥 흘러 갈수 밖에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깨어 있기 힘든 이유는 순응하는 삶을 살아 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순응하는 삶, 깨어 있을 필요가 없는 삶... 권력에 순응하고, 돈에 순응하고, 두려움에 순응하는 삶...
나는 그렇게 살어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틸리히는 설교집 "영원한 지금"을 통해 '순응하지 말라' 라고 말한다.

" 순응주의적 경향은 ... 또래 집단의 규율이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들보다 중요하게 간주되는 소년 시절을 거치고,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부과한 규준들이 아주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고등교육 기관에서 몇년을 거치고, 성인들간의 경쟁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고 성공을 위한 수단들에 적응하는 시절을 거치고, 성숙과 권력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금기들을 해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하는 시간들을 거친후, 종교의 선전자들이 임박한 종국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낡은 종교적 순응주의를 전파하는 우리의 삶의 만년까지 계속 됩니다."
...
" 예수님을 가장 효과적으로 위협하고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순응주의는 그분 시대의 '종교적 순응주의' 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교회 안에서도 다르지 않았고 지금도 마찮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회들안에서 오는 세대를 대표하고 있을지라도, 이 세대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은 이세대의 부패와 그것의 선과 악의 혼합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역사는 교회의 부패에 대한 끊임없는 증언의 역사입니다. "
...
"그러나 나는 주저 없이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조차 순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그런 행위 또한 모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틀릴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순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런 모험은 가장 고상한 형태의 종교까지도 포함해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저항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
...
"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죄책감조차 감당해야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실패하는 자는 용서받을수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자는 그의 존재 전체가 이미 실패입니다. 그는 용서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이세대에 순응하지 마십시요"

어릴때 깨어 있는 삶은 멋있게 보였고,그것이 삶의 의미 처럼보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깨어 있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가난이 두렵고, 아픔이 두렵고, 불안함이 두렵다. 그래서 이러한 두려움을 해소할 만한 것들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 가고 있다.
말은 머리에만 머무른다. "깨어 있어라, 순응하지 말라" 머리에서는 알겠는데 몸은 순응하면서 살아 가고 있다. 시간은 언제나 종착점을 향해 나아간다. 주어진 시간은 사라져 가고있다.
급박함이 없으면 주어지 시간은 사라지고 말것 것이다.

시작하는 월요일 다시 급박함을 가지고 마음을 다잡자...

2011년 6월 4일 토요일

우울증이란 망각할수 없는 슬픔과 고통...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을 해야 한다.
어떤 기억들이 우리를 괘로워 지게 하거나 기쁘게한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때, 우리는 고통스러워 진다.
그 기억이 오래되고 나의 다른 기억들을 지배할때, 우리의 삶은 고통으로 얼룩이 진다.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우울증이 되기도 하고, 정신적 혼돈이 되기도 한다.
고통를 주면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 그것이 우리를 마음에 세겨져서 그 고통의 틀속에서 세상을 바라 보게 만든다. 그 틀속에서 바라 보는 세상은 -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여도 - 아름 다운 세상이 아니며, 기쁨이 라고하고 하여도 기쁨이 아니다.

잠을 못자는 사람은 잠을 못잤던 기억들이 그를 지배하게 되면, 불면의 시간이 길고 기억이 강하면 강할 수록 잠을 더욱 못자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사람에게는 망각이 필요하다.
요즈음은 기억해야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어릴때 부터 뇌에 기억하는 기능이 최대한 발달 되어 진다.
기억은 발달 하는데, 생활은 단순해진다.
단조로운한 생활속에서 강한 자극은 아주 강력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생활이 단조롭기 때문에 기억은 더욱 강해 진다.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세상을 잘못 보고 있다'고 아무리 말하여도, 그 사람의 고통은 실존하고 있은 것이며, 설득 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은 고통을 내면으로 가지고 들어 가버린다. 고통은 실존 하는데, 세상이 '당신이 느끼는 고통은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다' 라고 하기 때문에 고통을 가진 내가 이상한 것은 아닐까 라고 하고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
감자 박스에 상처난 감자를 같이 넣어 두면 시간이 지나면 다른 감자들도 같이 썩어가듯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음에 눌러 숨겨두면, 다른 기억들도 고통스러운 기억들어 바뀌어 간다.

어찌보면 망각이 필요한 세상이다.
잊을 것은 잊어야 한다. 그러나 망각을 용납하지 않는 세상이다.
세상은 너무 정확한것을 요구하고, 일거수 일투족이 드러 나는 세상이다.

망각 할수 없는 기억을 가진 사람, 그 망각할수 없는 기억이 고통과 슬픔이라면, 힘들게 살아 가는 사람이다.
어찌 보면 우울증이란 망각할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을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 망각할수 없는 기억과 마주 설수 없을때 사람들은 잊기 위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과학은 발달하고 수많은 뇌와 신경에 대한 연구도 나온다. 잠에 대한 연구도 진행된다.
그래서 약도 나오고 치료방법도 나온다.
그러나 우울증은 증가하고, 불면증도 증가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증가한다.
어찌보면 답은 과학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 망각하지 못하는 기억을 감싸 않아 줄수 있는 주위의 사랑이, 망각하지 못하는 기억보다 더 커질때,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기억은 조금씩 지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망각할수 없는 고통의 해결책은 과학이 아니라 나와 가족간의 관계, 나와 친구들과의 관계, 나와 사회와의 관계속에 있을것 같다.

2011년 6월 1일 수요일

과학은 진리일수 없다

과학이란 가능성 높은 가설이고, 검증하는 과정이다.
과정은 종착점이 아니므로 종착점에 다다를때 까지는 진리일수 없다.

가설이 검정 되었더라도 현재의 알려진 정보에 의해 검정이 된것이므로 현재 알고 있는 것이 완전하다고 말할수 없으므로, 검정된 것이 100% 참이라고 말할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100% 참이 아닌 것은 진리라고 말할수 없을것 같다.
그래서 과학은 진리일수 없다.

그러나 과학만큼 사실에 가까운 것은 없으므로, 삶에서 잘사용하면 유용할것 같다.

과학과 진리는 다른 문제이다.
과학이 진리라고 여기는 순간 과학은 우상이 된다.

그러면 진리가 무엇인가.
잘모르겠다.

시간 흘러 간다.

시간이 흘러 간다.
흐른다는 것은 어떠한 방향으로 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물은 영원히 흐르지 않고 바다라는 종착점을 향해 방향성을 가지고 달려 간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은 쉬지않는다. 어딘가에 막혀 쉬고 있으면 물은 썩는다.

시간은 그냥흘러 간다. 내가 잠을 자든, 놀던, 돈을 벌든 어떻게든 흘러간다.
시간은 나에게 무엇인가. 축복인가? 고통인가?
한정된 시간속에서 한정된 공간을 점유하면서 살아간다.
나에게 시간이 주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이유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본적은 없다.
그러나 인과율을 따른다면 그 원인은 존재하리라 여겨진다.

분명 이유는 있는데, 나는 그냥 막 살아 가고있다. 그 이유를 찾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분명 나에게만 유효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으로서 보편적인 이유는 있겠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지금은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잠을 자지 않고 나의 아주 개인적인 생각을 쓴다. 아주 산만한 ...

2011년 5월 22일 일요일

나는 가수다. 좋은 사회

나는 가수다를 보았다.
그들이 그런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을 알릴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능력을 가지고 그냥 있었다.
그러나 무대가 생겼다.
그들의 가진 것들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열광한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가진능력을 가지고 살아 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을 펼쳐보이지 못하고 살아간다.
무대가 필요하다.

무대는 권력자들이 만든다.
권력의 구조에서 소외된 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일 무대가 없다.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가 된다면...
무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능력이,  사회에서 인정하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면...
다양한 능력은 사라지고, 각자의 능력을 갈고 닥는 것이 별로 쓸데없는 짓이 되는 사회가 된다면...
무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능력이 없어서, 소외된 자들을 사회는 패배자 라고 부른다.

2011년 5월 18일 수요일

폴 틸리히, 마누라의 잔소리...

오늘 폴 틸리히의 책 2권을 샀다. 한권은 오래전에 샀었는데, 이번에 두권을 더 샀다.

마누라가 알면 한잔소리를 들을 일이지만,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항상 담배값으로 책을 산다고 마누라를 설득한다.
그래도 잔소리는 날라 온다.


책은 가격이 있고,  나는피우지 않는 담배의 가격으로 대체를 하지만, 마누라는 그것으로 살수 있는 다른 물건으로 그 가격을 대체한다.
마누라의 잔소리는 책을 사는 날 한번으로 끝난다.

그것이 고맙다.


틸리히의 첫번째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 에 나오는 은혜에 대한 말을 써본다. 힘이 들때 가끔씩 읽으면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은혜는 우리가 큰 고통 속에서 쉼을 얻지 못할때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의미하고 공허한 삶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했던 혹을 그로부터 소외되었던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그와 우리사이의 분리가 보통이상으로 깊다고 느낄때 우리에게 덮쳐옵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우리의 무관심, 우리의 약함, 우리의 적의,  그리고 우리의 방향과 평정의 상실에 대한 우리의 혐오감이 우리에게 견딜수 없는 것이 될때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것은 해를 거듭해도 우리가 갈망했던 삶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을때, 오래된 충동이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우리를 지배할때, 절망이 모든 기쁨과 용기를 파괴할때 우리를 엄습합니다.

때로 그런 순간 한 줄기 빛이 우리의 어둠을 꿰뚫고 들어 옵니다. 그리도 다음과 같은 말이 들여 오는듯 합니다.
 [너는 용납되었다, 너보다 큰것에 의해 그리고 네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에 의해 용납되었다. 지금은 그이름을 묻지마라. 아마도 훗날 너는 그이름을 알게 될것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말라. 아마도 훗날 너는 많은 것을 하게 될것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말라. 아무것도 이행하려고 하지 말라. 아무것도 의도하지 말라. 그저 네가 용납되었다는 사실만 받아들이라!  ]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런 경험후에 우리는 전보다 더 훌륭하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전보다 더 많이 믿게 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것이 변화 됩니다. 그 순간에 은혜는 죄를 정복합니다. 화해가 소외의 심연위로 다리를 놓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수용 외에는 그 어떤 종교적, 도덕적, 혹은 지적 전제 조건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이런 은혜의 빛 안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 및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은혜의 힘을 인식합니다. " - 흔들리는 터전, 폴 틸리히 -

2011년 5월 6일 금요일

믿음을 머리로 하고 있는 내자신을 바라 보고 있다.

몇년전 저녁쯔음 50대 아주머니와 20대 남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밝게 웃는 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비쳐보였다. 내가 그분들과 스쳐지나갈때쯔음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지나가고 있었고, 20대 남자는 정신지체장애인인듯이 보였다.
아마 장애인으로 살아 가려면, 웃으면서 살아가야 사람들이 덜 싫어할것 같다는 생각에 자신으로부터 이던 가족으로 부터이든 웃음이 얼굴에 새겨진 듯한 모습이었다.
어미니에게 있어서 자식은 운명이다. 자식을 사랑할수 밖에 없다.
외면할수 없으므로, 그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렸을지 모르겠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돌보아야 한다.
마누라를 사랑한다. 마누라는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힘들어한다.
그것 때문에 간혹 싸우기도 한다.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살고, 지금까지 조금 무관심하게 살아 왔다면, 어머니에 간병에 대한 조금의 불성실은 그렇게 가슴아프지 않을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와 가까이 살고, 항상 돌봄을 받았고, 너무 사랑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어머니의 아픔에 무관심 하다는 것이 더욱 심적으로 힘들어 질수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또 사랑하는 마누라가 어머니를 간호하는데 힘들어 한다면, 그것 또한 심적으로 힘든 일이 될것이라 여겨진다.
가장 편한 것은 내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도 부족하고 마누라에 대한 사랑도 부족하다면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이상황에서는 마음이 가장 편안하게 될수도 있을것 같다.

마음이 편안하다는게 항상 좋은 것인가. 이런 의문이 든다.
삶이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죽을때까지 살아가는 것이 최고로 잘 살아 가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랑이란 시련과 불편함과 힘듬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느껴간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갈수록, 내가 짊어지고 가야만하는 시련의 무게가 늘어감이 느껴진다.

장애인 아들하고 지나가면서 눈물흘리던 아주머니의 사랑은 그아들을 외면할수 없게 만드는 무거운 짐으로 보여졌다.

얼마전 암으로 돌아가신 한분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이 살아가면서 하지 못해 안타가웠던 것을 들었다. 해보고 싶었지만 못해본것들이 아니었다.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이었다.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할때, 자신의 짐이 너무 무거워 잠시 무관심 해서 그 고통을 나누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까운 것이라고 한것 같다.

내 짐이 무거워 힘들어서, 내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함에 무관심 해지고 있는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짐이 무겁고 더욱더 많이 지면, 지금은 힘들어도, 기다림속에서 내 짐을 나눌사람들이 늘어가고, 한줄기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은총의 삶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믿음을 머리로 하고 있는 내자신을 바라 보고 있다.

2011년 4월 19일 화요일

갈수록 믿는다는 것이 쉬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든다.

요몇일 요한복음을 읽었다.
하나하나의 의미들이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직 어렵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이 기적들이 나온다.
기적을 행할실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실때 가장 아끼던 제자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을 모른체한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면서 우리에게 말하려고 했던것이 무었일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믿음이란 보이는것으로서 믿는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으로써 믿는것을 말하려 했던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은 내가 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내가 못나서도 아니고, 단지 내가 그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러나 부모님이 어떻게 나에게 해주느냐에 따라서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이상하다. 부모님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라는 것이 조금 자연스러운것 같다.

요즈음 교회들이 혼란 스러운것 같다.
보이는 것으로서의 믿음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서의 교회의 형상은 부흥을 하는데, 보이지 않는 쪽으로서의 믿음은 약해져가므로 요즈음의 혼란이 생기는것이 아닐까.

갈수록 믿는다는 것이 쉬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든다.
말로는 쉽다. 내가 믿는다는 것은 나와 하나님 만이 알수 있을것 같다.
가끔씩 믿음을 가장해서 살아간다. 내가 나를 속이기도 한다.
그래도 안심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2011년 4월 9일 토요일

고엽

자다가 일어 났다.
조용하다. 컴퓨터를 키고 책상앞에 앉았다.
헤드폰을 쓰고 고엽(Autumn Leaves) 듣고 있다.고엽 5곡정도를 연속해서 듣고있다.
이브몽땅이 부르는 걸로 듣고 있다.
지금은 누가 연주한건지는 모르지만 피아노 연주곡으로 흘러나온다.
조용할때 들으면 눈물이 날것만같다. 마음이 소용돌이 치는듯한 연주가 내 정서를 변화시킨다.
이제쳇베이커의 트럼팻으로 연주되는 고엽이 나온다.
같은 곡인데 연주하는 사람, 부르는 사람에 따라 너무 다르다.

지금 이걸 듣고 있고, 잠시후 지금 또 다른 걸듣고있고, 잠시후 지금 다른 걸 듣고 있다.
이런식으로 고엽을 들으면 지금이란 단어를 사용한것 같다.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렸다.
현재라는 것은 순간(찰라)인것 같다. 느끼고 표현하려는 순간 지금은 지나가버린다.
대부분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이고 현재 혹은 지금은 너무 순간(찰라)라서 인식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린다.
그러나 내가 접하고 있는 시간은 항상 지금이다. 지나간 것은 내가 접했던 시간들이고 앞으로 다가올 것은 내가 접할 시간들이다.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너무 나온것 같다.

또 자러 가야겟다.
내일 일을 해야한다.

2011년 4월 6일 수요일

장/단기 적으로 돈이 중요하다.

현재 내게 많은 돈이 생긴다면, 나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도 좀더 쉽해 할수 있게 해줄것 같다.
그러나 내가 오늘 착해진다거나 바르게 살아 간다는것은 지금 당장의 문제를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단기적으로 보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바르게 살아 간다는것 보다 중요하게 보여진다.

장기적으로는 어떨까. 바르게 살아간다는것과 돈을 추구하는 것에서...
어릴때 부터 '인간으로서 바르게 살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돈이 중요하다.
돈이 없으면 노숙도 해야하고, 구걸을 해야할지도 모른다.

내가 바르다라는 것은 나의 문제이고 내가 노숙을 하고 구걸을 해야 한다면 내 가족의 행복은 멀어진다. 아파도 참아야 하고, 조미료 덤뿍 든 음식을 먹어야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 해야만 할수도 있다.

내가 부유하다라고 하는것은 내 가족의 행복도 같이 담보한다. 좋은 학교에다닐수 있고, 유기농식품을 먹을수 있고, 아프면 병원도 갈수 있고, 세계로 다니면서 견문도 넓힐수 있다.

나의 문제로만 국한되어 진다면, 바르게 살아가는것이 중요한것인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결정했으므로 그것에 파생되어지는 고통도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도 같이 포함한다.

이렇게 봐서 장기적으로도 돈이 중요한것 같다.
그러나 장기적 단기적 모두 유한의 개념이다.

무한의 개념에서 생각해본다면,
종교라는 것은 영원의 개념이 들어가므로 무한을 포함한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유한의 개념을 넘어 살아 가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현실에서는 돈이 중요한데, 왜 어릴때 부터 바르게 살아 가는것을 가르쳤을까.
아마 무한의 개념을 포함해서 선조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왔던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든다.

2011년 4월 4일 월요일

마주서다

김밥을 파는 분이 있었다.
그분 집에 김밥을 먹으러 여러명이 갔다.
그런데 김밥이 약간 짜운것이었다.
나 뿐문 아니라, 다른 분들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장사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는 김밥이 짜다라고 하는 사실을 그분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분에게 김밥이 짜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니 그분이 약간은 불쾌한 투로 " 나는 원래 짜게먹는다" 이렇게 말을 했다.
나도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당신을 위해 사실을 말하였는데, 이렇게 반응하는걸 보니 '김밥집이 장사가 안되는 이유는 뻔하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밥이 짜다'라는 사실 그것 때문에 장사가 안될수도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 주었는데, 그 김밥집 사장님은 내 말을 안듣고, 왜 짜증을 내는건지.. 그분에게 문제가 있다라고 그렇게 단정을 지었다.

그런데 집에와서 공곰히 생각을 해보니, 어떤 것이 사실이더라도 내가 말을 할때, 내가 하는 말뿐만 아니라 태도나 감정도 같이 그분에게 전달이 된다라는 것을 조금 느끼게 되었다.
어쩌보면 나는 '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었던것 같다.
그것을 말하는 태도에서 나는 당신에게 충고를 해주고 있다.
'내 말이 정확한 사실이기 때문에 당신은 내말을 들어야 한다'라는 그런 감정도 동시에 전달이 되고 있지는 않았을까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분에게 사실을 전달하기 전에 상처를 먼저 입힘으로 인해서, 그분이 '짜다'라는 사실을 듣는것 보다 상처의 아픔이 먼저 느껴져서 사실이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위의 것과는 별개 이지만, 내가 판단해서 어떤것이 진실이라고 여겨 지더라도(사실 내가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판단한다것 자체가 불가능 하지만) 상대방이 그 진실에 대면을 해서 그 진실과 마주 설수 없다고 생각되어 진다면, 나는 그것을 말함에 있어 유보를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가진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유보함은 계속 될수 없으므로, 어떻게 하면 그가 그 사실과 마주 설수 있도록 도와 줄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2011년 3월 31일 목요일

경제적, 과학적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1975년에 나온 책이라 세로읽기가 되어있고, 책을 넘기는 방향도 지금과는 반대로 되어있다.
눈이 적응이 안되서 책이 눈에 잘들어 오지 않는다.
불트만이 쓴 부분인데 "우리가 음악적이 아니면 음악을 다룬 텍스트를 이해할수 없다는 사실은 쉽게 수긍이 간다. 우리가 수학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수학에 관한 논문이나 책을 이해할수 없고 또 우리가 철학적으로 사고할수 없다면 철학에 관한 책을 이해할수가 없다."

요즈음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두가지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 보는것 같이 느껴진다.
하나는 '경제적인가'와 하나는 '과학적인가' 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 보는것 같이 여겨진다.
경제적인 틀로 보았을때 가치가 없는 것들은 배척이 되고, 과학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실들은 버려지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자기 개발을 한다. 자신의 경제적인 가치를 높이기위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자기 개발을 해야 한다고 미디어들은 말한다. 과학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미덕인 사회에 살고 있다는 여겨진다.

과학적틀과 경제적틀만으로 세상을 이해할수가 있고,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틀 들은 부수적인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든다.

2011년 3월 25일 금요일

분노

"우리들은 분노의 발작을 일으키기로 결정을 해서 행동화하는 것이 아니다. 분노는 갑자기 그리고 맹렬히 우리를 급습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분노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조절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
화난 사람은 그의 정신을 잃는다. 미워하는 사람은 그의 정신이 강화된다. 예를 들면 편집증 환자의 강한 증오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극히 작은 적개심의 흔적까지도 알아차리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강한 사랑은 그로 하여금 상대방의 아름다움과 착함의 아주 미묘한 표시에 대해서 조차도 극히 민감하게 한다. 그러나 분노는 눈을 먼다."

.....

"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인간 실존이 불안하다면, 그의 위축은 단지 감정적인 경험의 영역에서만 일어 나는 것이 아니다. 신체적인 영역은 그런 기분을 널리 반영한다. 온몸은 불안하여 웅크려들고, 사지는 두려움의 몸짓으로 움츠려든다. 목구멍은 조여들고, 심장은 경련을 일으키고, 신체의 중심부가 창자와 방광의 수축에 의해 래몬처럼 짓눌린다."
메다드 보스의 정신분석과 현존재분석이라는 책중의 한부분이다.

예전에 본 "28일후" 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분노바이러스에 간염이 되어 세상이 파괴되어 가는 그런 영화였던것 같은데...

분노에 대해서 한번 책을 찾아 보았다.

2011년 3월 22일 화요일

내가 다른 사람 때문에 잘못 되었다고 느껴질때

내가 다른 사람때문에 잘못 되고 있다고 여긴다면, 내가 탓하고 있는 다른 사람에 의해 잘되기 전까지 내가 잘되기 위해서 할일이 없어진다.
결국 나는, 나를 위해 할일이 없어지므로, 내운명은 전적으로 내가 탓하고 있는 사람에게 의존하게된다.
내가 남의 탓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탓하는 사람에게 내 운명을 맞긴다는 것이고, '내가 내운명을 개척할수 없다'라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비록 어떤 일이 남의 탓일지라도 나는 나를 돌아보아서, 내가 잘못한것을 찾으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 되어진다.
그것이 인생에서 내 운명을 위해 할수 있는 최선의 길인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11년 3월 19일 토요일

데쟈뷰 현상 ; 마음이 썩이 문드러진다.

테드에서 올리버 색스의 강의를 들었다.
90가까이 된 어떤 할머니가 무엇인가 환각현상이있다고 한다.
"동양옷을 입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낙 내리락 한다" 라고 하고, 소리는 들리지 않는 무성영화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그 할머니는 시각장애인이었다.
그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미쳤다거나 노망이 난것으로 생각할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잘 생각나지는 않는데, 무슨 신드롬이라고는 병이라고 했다.

청각장애인의 10%정도는 환청을 경험하고, 시각장애의 10% 정도는 환시를 경험한다고 한다.
그러나 주위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것 같아서 그 말을 못하고 혼자 괘로워 한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뇌의 일정부분에 문제가 생겨서 나타나는 것일뿐 미치거나 이상한것이 아니라고 하고, 그 환시나 환청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한것 같다.
올리버색스 그 자신도 가끔식 경험을 한다고 한다.
이 강의를 듣고 올리버색스의 책을 두권이나 샀다. 그의 사람에 대한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책을 두권이나 샀기 때문에 마누라의 잔소리는 따뜻하지는 않았다.

얼마전인가 데쟈뷰현상에 대해서 강의에서 본것 같다. (영어 실력이 모자라서 제대로 들었는지는 모르겠고, 오래 되어서정확하지는 않다.)
처음 봤음에도 어디서 본듯한 것 같이 느껴지는것을 데쟈뷰 현상이라고 하는것 같다.

어떤 사물에대한 기억은 뇌에 저장될때 그 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정보가 같이 저장이 되는데, 그것을 본 시간도 같이 저장이 된다고 한다.
뇌에 저장이 될때, 사물이나 사건이 저장되면서 시간이 빠진경우나, 오차가 생겼을때 방금 본 사실이 언제라는 것이 빠져서 저장 되었기 때문에 예전에 본듯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걸 느끼게 된다고 한것 같다.
데쟈뷰 현상이 보인다고 해도 별 이상한것은 아닌것 같고... 그냥 내 뇌가 잠깐 오류가 생겼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할것 같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사고로 인해서 뇌의 전두엽(전두엽인지 후두엽인지 잘생각이 나지는 않는다)이 손상된 사람들이 데쟈뷰 현상을 많이 경험한다고 한것 같다. 전두엽이 손상된 사람에게 아주 자주 일어 난다고 하는걸 봐서 이게 어떤 신비로운 현상은 아닌것 같다.

어찌보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나만 느낄수 있는 개별적인 사건들이 이상하다고 해서, 두려워 하거나 내가 이상한것 아닐까 하는 마음은 가질필요는 없는것 같다.
몸에 작은 상처도 자꾸 만지면 큰상처가 되듯이, 마음의 작은 현상도 자꾸 집착하게 되면 큰 현상으로 변해 갈수도 있을것 같다.
사람들은 "마음이 썩이 문드러진다." 이런 말들을 한다.
물이 흐르지 못해 고이면 썩게 되듯이, 내게 올라오는 생각도 그냥 흘러 가야 썩지 않는것 같다.
혼자서는 힘들면, 주위에 도와줄 사람들을 찾자. 손을 내밀고... 이야기 하자.
마음에 쌓아둔 말을 하는 순간 고인 마음은 조금씩 흘러갈것 같다.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비빔밥을 먹으러 갔다가, 된장찌게를 먹다.

퇴근할 시간이 다되어간다.
오늘 장사는 별로다. 돈을 벌어야 하는데 신경을 써야하는데, 자꾸 다른 생각만 하다 보니, 돈버는데는 집중력이 발휘되지 못한다.
사실 집중력을 발휘 해도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한다.

어제 점심을 비빔밥을 먹으러 갔다가, 아줌마가 된장찌게를 주는 바람에, "나는 비빔밥을 시켰는데요" 라고 말을 했는데, 아줌마가 너무 미안한 표정을 지으셔서 그냥 된장찌게를 먹었다.  그런데 아줌마가 비벼먹으라고 다른 나물과 고추장을 주셔서 비빔밥과 된장찌게를 같이 먹었다. 아마 내 표정이 너무 절박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마누라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좀 깨끗이 입고 다니라고 하는데,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깨끗한것 같은데...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들하고 가끔 포카를 치면, 앞에 펼쳐진 액면을 중심으로 본다. 내가 초보자라서 항상 돈을 잃는다. 잃어 봤자 얼마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잘 치는 친구는 액면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좋은 차를 타고, 얼굴이 귀티가 나고, 옷이 깔끔하고, 목소리가 깨끗한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장사를 오래하신 분들은 장사하는 부분에 한해서는 핵심만을 바라 보는것 같았다. 핵심을 바라 보는 사람과 껍데기만 바라보는 사람... 장사기술에 차이가 나기 마련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사람을 볼때 보여 지는 부분을 먼저 보는데, 내가 하수라는 증거인것 같다.


나는 액면가가 좋지 못한데, 액면가가 좋은 사람을 좋은사람으로 여기니  아이러니 하다.

나는 내멋에 사는데... 상대방은 보여지는 부분으로 판단하고 있으니...
상대방도 자기 멋에 살고 있다고 생각을 바꾸어야 할것 같다.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을 자고 나면 하루가 지나간다.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해도 하루는 지나간다.


오늘 한 일은 별로 없는것 같다.


점심을 먹으러 갔었다. 비빔밥을 시켰는데, 된장찌게가 나왔다.

비빔밥을 시켰는데라고 말하니, 아주머니는 우주에서 제일 미안한 표정으로 바꾸어 주신다고 했다. 근데 된장이 더 맛있을것 같아서 그냥 먹겠다고 했다.

그러니 아주머니는 비벼먹을수 있도록 다른 나물들과 고추장을 갖다 주셨다.

된장찌게도 먹고, 비빔밥도 먹은 형국이 되었다.


어찌보면 세상사 너무 따지고 살아 갈필요도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손해도 보면서 살아 가다 보면, 그게 오히려 속이 편할것 같다.

손해보지 않으려고 아둥바둥 노력을 해봤자, 노력 한만큼 손해가 나는 것이니, 조금 손해보면서 그노력을 다른 곳에 쏱으면, 내가 얻는 것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손해를 안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하고 어울리게 되고, 손해를 조금 봐도 괜찮다고 생각하다보면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는것 같고, 관계속에서 조금씩 이익을 보려고 하다 보면,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는것 같다.

사람은 알게 모르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편해 져서 서로 끌어 당기는 자력이 생기는 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내가 힘이 들어질때, 손해를 서로 조금 보는 부류에 속한다면, 그 사람들이 조금씩 도와 줄수도 있을것 같아서, 쉽게 인생에서 망하지는 않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다른 부류들은 내가 힘들어 지면 서로 모르는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힘든 나를 외면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11년 3월 7일 월요일

내책상.... 시간

17인치 모니터, 넷북, 스케너, 프린터 이렇게 책상위 놓여져 있다.
데스크탑은 고장이 나서 넷북에 17인치 브라운관 모니터를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다.
넷북 속도는 너무느려서 마음이 급하면 짜증이 난다.
넷북은 스케너 위에 있다. 스케너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넷북 옆에는 프린터가 있다. 카트리지가 없어 거의 사용을 안한다.
사진 한장을 올리면 되는데 사직 찍기가 귀찮아 글로 쓴다.
귀에는 헤드폰이 쒸워져 있다. 넷북의 단조로운 음색보다는 헤드폰으로 듣는게 좋다. 그리고 마누라가 자고 있기 때문에 소리를 크게 못든기 때문에 헤드폰을 쓰고 있다.
책상위에는 이것 저것 책들이 올려져 있다.
마누라는 내가 책사는것을 싫어 한다. 돈도 많이 못버는데, 책을 산다고 야단이다.
도서관에 빌려 보면 안되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책에는 애착이 강하다.
컴퓨터에도 애착이 없고, 휴대폰에도 애착이 없고, 책에는 애착이 있다.
요즈음 책값이 비싸서 많이 사지 못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책을 마음대로 사는데..
돈을 많이 벌면 책읽을 시간이 없으질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돈이 많이 없으니 놀러 갈데도 별로 없고 하니 시간이 조금 난다.
시간은 언제나 있는것 같은데, 다른 무엇인가 하고 있다. 내가 결정을 해서 하는 것보다는 한 순간 한순간 무엇인가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인가가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때가 많다.
오른쪽으로 고개 돌리면 세키가하라전투, 기업의 창의력, 음성과학 등등의 책이 보인다.
시디도 있고, 여권도 보이고, 건전지, 달력 등도 보인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도정신치료입문, 교회주보, 정신요법의 기본문제, 휴대폰, 이어폰, 볼펜 등이 보이고, 멀리 책장에는 전쟁과평화 등등이 보이고, 모두 자세히 쓰기는 종류가 많은것 같다.
내 책상은 항상 쓰레기장 같다고 마누라의 불평이 심하다. 할수 없다.
습관이 너무 깔끔하면, 삶이 팍팍하다고 마누라한테 핑계를 대곤한다.
깔끔한것도 좋은 습관인데, 그냥 핑계를 그렇게 댄다.
이말로 인해 서로 마음이 편해지면 그냥 좋은거다 이렇게 생각한다.

헤드폰을 벗었다. 음악을 들어면서 다른 것을 하니까 기분이 음악의 정서로서 변해가는 것같아서, 그 정서에맞는 생각이 나오는 것 같아, 일단 벗었다.

아무 생각없이 막 글을써보니 손가락이 생각하는 것 같다.
손가락이 생각을 하는걸까. 아니면 손가락은 생각하는 나의 명령을 받아서 그대로 하는 것일까.
손가락이 생각을 하지 않는면, 위계가 생기게 되는것 같다. 명령을 내리는 나의 어떤 부분이 있고, 그 명령에 따르는 어떤 부분이 있고, 명령을 내리는 부분은 어디일까 궁금한데, 뇌라고 그냥 생각이 난다. 뇌는 누구의 명령에 따르는 걸까. 이런식으로 물고 늘어 지면 끝이 없는것 같다.
1과 0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무한대의 수가 있고, 하이튼 따지고 들면 모든것은 무한데로 수렴되는것 같다.

지금은 12시 50분 1시까지만 쓰고 자야 겠다. 일단 10분이 남았다.
뭘로 10분을 체울까. 고민하지 말고 손까락이 생각하도록 만들자.
만들자 하는 순간 손가락은 명령을 받는다.

헛소리라도 그냥 함 지껄여 봐야겠다. 그 사이 2분이 지났다.
생각을 아니 시간이 훅... 지나간다. 손가락은 생각을 못하는 것 같다.
다시 1분이 지났다.
시간에 대해 한번 써보자. 6분 남았다.

시간 흘러 간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수 없다.
흐른다는 것은 방향성을 가진다는 건데 시간이 방향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면 나이가 들고, 언젠가 죽고, 죽은 후에도 시간이란 존재하는 것일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시간이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인가.

4분 남았다.

어떤 때는 1시간이 10분 같고, 어떤때는 1시간이 3시간 같다. 그러나 시계는 그냥 똑같이 흘러 간다.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은 10분 같은 1시간인가 3시간 같은 1시간인가. 아니면 시계가 가르키는 1시간인가. 궁금하지만 3분이 남았기 때문에 궁리는 내일 해야 겠다.

시간하면 아인슈타인이 떠오르는데 왜인지 알수 없다. 그냥 떠오른다.
2분 남았다. 답답하다. 한정된 시간을 두고 ..... 그사이 생각하는 사이 1분이 남았다.

1분 그냥 시간이 간다. 10분이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다.
시간은 시간이다. 제목을 쓰고 마무리하자..

2011년 2월 12일 토요일

연결되어 있다.

감기가 들어 귀가 멍하다.

귀가 멍한것 빼고는 다른곳은 아픈곳이 없는데.. 그다지 몸은 편하지 못하다.

몸이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한곳이 아프면, 다른 곳들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전체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만약 일정 부분에 감각이 없다면, 그 감각이 없는 부분에 상처가 난다 하더라도 다른 부분에는 여향을 미치지는 못할것이다. 이경우 몸은 편안할 수 있지만, 실재 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닌것이라고 할수 있다.

가족이 있다. 가족내에 구성원이 있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은 공부도 잘하고 착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그중 한 아이는 매일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고, 집을 나가서 살고 있다.

그 가족은 행복할까. 그 한 아이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언제나 걱정한가지를 가지고 살아 가리라고 여겨 진다.

그 아버지는 아침에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한다. 경쟁에 이기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간다. 그아버지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그 아버지가 놈팽이 아들을 외면한다면(이미 집에서 나갔으므로) 나름 걱정없이 살아 갈수 있으라 여겨지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운명적으로... 그렇게 왜면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그 아들을 외면하는 것은 우리 몸의 일정 부분의 감각이 마비되어서 그 일정 부분이 아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부분이 편안하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 같다.

그러나 몸의 일정부분이 마비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것이므로 통증이 오더라도 그 마비된 부분을 먼저 풀어야 한다.

아버지가 놈팽이 아들을 외면해서는 단기적으로는 편안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다른 부분들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건강한 가정이라면, 그부분을 외면할수 없기 때문에 놈팽이 아들이 건강한 정신이 되도록 모두 열심히 노력을 할것이다.

내 다리가 편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부분이 편해야 편해 지듯이, 내 자신이 편해지기 위해서도 가족 구성원들이 편해야 나도 편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내몸이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가정도 그 구성원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이 되어 있다.

이것을 사회로 확장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벼랑끝에서 힘들게 메달려 있고, 어떤 사람들은 모든것이 풍족하게 살아 가고있다. 사회에서 학교에서 언제나 경쟁력을 외치고 있다.
경쟁에서 패하면 벼랑끝으로 몰리게 된다. 승자가 모든것을 가지는 구조이다.
내 몸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가정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사회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고 여겨진다. 많이 사람들이 벼랑끝으로 몰리는 상황들이 나와는 상관없이 라고 느껴질수도 있을것 같다.
그러나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의 일정부분이 마비되어 가고 있는것은 아닌지 모를일이다. 어딘가 마비된 사회...

놈팽이 아들이 있다. 그 부모는 그아들이 바른길로 가게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번다.
부모는 힘들지만 그 아들이 바른 사람이 된다면, 그 힘듬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것이다.
누군가는 사회의 경쟁에서 져서 벼랑끝으로 밀려간다.
그 누군가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이고, 형제일것이다.
부모에게 자식은 승자이든 패자든 자식이다.

사회는 국격을 따지고, 세계1위가 되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국격이 높고 , 세계1위가 되었는데, 자식중 누군가는, 부모중 누군가는, 형제중 누군가는 벼랑끝으로 밀려서 허우적 거리고 있다면 우리의 삶에서 국격과 세계1위가 중요한 것일까.

모든 사람이 다 풍족하게 살수는 없지만, 서로 아타까워하며, 눈물을 닦아주면서 느리지만 천천히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는것이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자식은 부모를 무시하고, 부모는 자식에 관심이 없는 가족.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증오하는 사회.
이경우 연결이 끊어져 있다 라고 할수 있을것 같다.

삶의 의미란 끊어진 연결을 붙여가는 과정이라고 할수 있을것 같다.

2011년 2월 7일 월요일

선생은 본디부터 큰 것을 쓰는 데 서투르군요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존재하고 있을까.
돈이 부족해서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 잠이 오지 않아서 밤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 몸이 아파서 죽음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 등에 둘러 쌓여 그 안에 존재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존재가 이러한 불안 속에 쌓여 있다라고 강하게 느껴질때, 우리는 불행한 삶속에 놓여져 있다라고 볼수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가격은 싸지만 자장면이 맛있다는 느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라는 사실, 오늘은 춥지만 봄이 온다는 사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라는 것등등... 이러한 행복한 느낌들도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느끼고 바라보는 삶이 불안한 쪽을 향해 있다면, 우리는 불행속에 살고 있다고 여겨지고, 내가 바라 보는 삶이 행복한 실존쪽으로 향해 있다면, 우리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 가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사실 불안에 대한 강렬한 경험들 ( 불면, 질병, 상실 등등...)은 행복에 대한 경험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분명 그러한 불안 근심 분노라는 실존들에 둘려쌓여 존재 하고 있다 하더라도, 봄의 따스함, 부모님의 사랑, 내가 사랑하는 것들, 하나님의 사랑등 또한 실존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하겠다.
내가 불행에 둘러 쌓여 있어 괴로움에 빠져 있지만, 내의 의식이 그쪽으로 향할뿐, 고개를 돌리면 다른 것들도 나를 둘러싸고 있다고 할수 있을것 같다.
행복의 시작은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는 것에서 시작되어 질수 있을것 같다.

그리고 내가 할수 있는 것과 내가 할수 없다고 여기는 것도 한방향으로만 보기 때문인것 같기도 하다.

장자의 소요유 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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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 위왕은 나에게 큰 박씨를 주었내. 내 이것을 심어 잘 길렀더니 다섯섬들이의 열매가 맺혔네. 이것에 물을 담았더니 그 무겁기란 혼자 들 수가 없을 정도였지. 이를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자니 평평하고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네. 확실히 크기는 크지만 쓸모가 없기 때문에 나는 이를 부숴버렸네."
장자는 대꾸했다.
" 선생은 본디부터 큰 것을 쓰는 데 서투르군요. 송나라 사람으로 손이 트지 않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대로 솜을 빨아 바래는 것으로 업을 삼았소. 나그네가 이 소문을 듣고 백금을 주고 그 방법을 사기를 청하였소. 그 장석이 일족을 모아 의논하기를 < 우리가 대대로 솜을 빨아 바래는 일을 해왔지만 수입은 몇 푼 안되었다. 지금 하루아침에 비방을 백금에 팔라 하니 이 기회에 팔아버리자> 하였소.
나그네는 이 비방을 사가지고 이걸로써 오왕을 설득했소. 오왕은 그 사람으로 장군을 삼았소. 겨울 월나라 사람과 수전을 벌여 월인을 크게 무찔렀소. 오왕은 그 전공을 치하하여 땅을 갈라주어 그를 후로 봉했소. 손트는 것을 낫게 함은 마찬가지요. 그런데 혹은 봉작을 받고 혹은 솜빠는 일을 면치못하오. 즉 모든것은 쓰기에 달린것 이오.
지금 그대에게 다섯섬들이 박이 있소. 어찌 이로써 큰 통을 만들어 강호에 띄우는 걸 생각지 않고 너무 커서 들어갈 곳이 없음을 걱정하는가. 이는 곧 선생에게 손된 마음이 있기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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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행한것 같아도 방향을 돌려 자세히 들여다 보면 행복한 것들도 같이 존재 하고 있다.
내가 가진 것들도 별로 없는것 같지만, 큰일을 할수 있는 씨앗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다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가진 행복들은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면서 나를 바라 보고 있어야지만, 이 경쟁사회에서 뒤쳐지면 죽는다라는 개념으로 부터 빠져 나올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큰일이란 사람들의 관점에서 큰일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서 죽는데 그러나 "나의 삶은 존재의 이유가 있다" 라는 관점에서 존재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2011년 2월 6일 일요일

습관

" 한동안 입고 나면 옷이 처음 입었을때보다 몸매 모양에 잘 달라붙게 되고 직물 조직에 변화가 생겨 직물의 새로운 응집습관이 향상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또 어느 정도 사용한 자물쇠는 잘 작동 되지만 처음엔 자물쇠의 기계 작용에 거친 면이 있어 그것을 극복하려면 힘을 더 많이 써야 했다. 자물쇠 장치의 이와 같은 저항을 극복하는 것이 습관이 형성되는 현상이다.
한번 접었던 종이는 다시 접을 때 힘이 덜 든다. 동일한 결과를 재차 얻기 위해서는 더 적은 양의 외부 원인을 요구하게 되는 습관의 본성때문에 이처럼 수고을 덜하게 되는 것이다.
바이올린은 휼륭한 예술가의 손에서 연주됨으로써 소리가 더 좋아 진다.
왜냐하면 화음을 내는 조화 관계와 일치하는 진동습관이 마침내 바이올린의 목재 섬유에 젖어 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연주자가 가지고 있던 악기가 어머어마하게 값이 비싼이유이다. 흐르는 물줄기는 혼자 힘으로 통로를 파고들어 그 통로를 점점 더 넓고 깊게 만들어 물줄기의 흐름을 멈춘다음에 다시 물을 흐르게 하면, 물은 혼자 통로를 따라 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경계통에 점점 더 적절한 통로를 만들어 한동안 중단 되어도 외부로부터 유사한 자극을 받으면 절절한 통로로 흐른다는 중요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 원리" 중에 나오는 글이다.
윌리엄 제임스에 의하면 모든 일을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은 좋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다.
어떠한 것을 습관화 시켜서, 의식하고 있지 않더라고 그렇게 되도록 하는것 이 좋다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다. 좋은 습관을 기른다는 것은 물이 처음 길을 어렵게 만들면 그다음부터는 물이 그 길로만 가게 되듯이, 좋은 습관을 기르면, 내가 굳이 의지를 가지고 염려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렇게 되어 진다 라는 것 같다.
" 모든 교육에서 중요한것은 신경계통을 적대자로 돌리지 말고 동맹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습득한 것을 기금으로 삼고 자본으로 삼아, 그 기금에서 얻은 이자로 편하게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가능한 많은 유용한 행동들을 가능한 어릴때 자동적이고 습관적으로 만들어야 하며, .... 일상생활에서 사소한 일들은 노력을 많이 필요가 없는 자동이 되도록 넘길수록, 그 만큼 고급한 정신 능력은 자유롭게 되며, 그 고급 능력은 본연의 임무를 더욱 잘 할수 있게 할것 이다. "- 윌리엄 제임스, 심리학 원리"

무엇인가 한가지를 생각한다면, 뉴런들이 결합해서 하나의 신경경로를 만든다고 한다.
그러한 생각을 재차 하면 신경경로는 더많은 뉴런들이 결합을 해서 강화 되어진다고 한다.
습관이란 뉴런들의 결합을 강화시켜서 자동적으로 그러하게 되로록 하는것 인것 같다.
아침에 일찍 일어 나는 습관이 되어 있으면, 내가 일찍일어 나야지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동적을 일찍 일어 나게 된다.
아침에 일찍 일어 나는 사람은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라. 아침에 일찍 일어 나는 습관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이다라고 해야 적절할수 있겠다고 느껴진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일찍 일어나는 것도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으로 보여질수 있을것 같다. 세상에 보여지는 많은 현상들은 처음 시작은 의지를 가지고 시작이 되었을지 모른지만, 현재를 습관화 되어진 것들인것 같다.

사소한 일에 의지를 가지고 해야 한다면 정작 중요한 일에는 의지를 가지고 할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 들게 되는것 같다.

2011년 1월 30일 일요일

잠에 오지 않는것에 대한 변화된 생각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어떠한 증상 인것 같다.
몸이 아프다 던지, 다리가 떨린다던지, 주위가 시끄럽다던지 하는 요소가 있으면 잠이 잘안오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 - 분노, 불안, 슬픔-의 증상으로서 잠이 안오기도 한다.

잠이 안오는 원인이 외부적인 경우 분위기를 바꾼다던지, 치료를 받아서 원인을 제거하면 잠이 잘올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원인이 내부적인 것인 경우, 감정에 관련된 것인 경우, 불면에서 빠져 나오기기 힘이 드는것 같다. 감정은 전염성이 강해서 어떤 하나의 불안 때문에 잠이 안오기 시작하면 그 감정이 다른 감정들을 건드리고 그 감정들은 다른 감정들을 자극해서 잠에 대한 불안감으로 빠져 들게 하는것 같다.
잠이 오지 않는 원인이 잠에 대한 불안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으로 잘못 귀결되는것 같다.

생각이란 통제할수 있을것 같으면서도 통제하기 가장 어려운것 같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쑥올라 오는 불안을 통제 할수 있다면, 잠도 안오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어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 할수로, 불안의 강도를 키우는 역효과도 오는것 같다.

잠이 오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탈피하려고 노력 할것 같다.
그러나 생각을 누르면 부작용이 커지듯이 그것은 불면의 강도를 높이는것 같다.

느리지만 불면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내가 처음 잠을 못잘을때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 봐아 할것 같다. 그리고 그 감정이 원인이 되어서 어떻게 다른 감정에 영향을 키치면서 변화해 왔는 가를 조용히 생각해보아야 할것 같다.
불면증이 마음에서 왔다고 느껴지면 잠을 자려고 누웠을때 느껴지는 감정(불안,초조, 긴장, 분노, 흥분 등등...)에 대해서 조용히 관찰을 해보아야 할것 같다. 그리고 그 원인의 근본으로 조용히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할것 같다.
불면이 오래 되었다면 그만큼 숙면으로 돌아 기는 시간이 걸릴것 같다.
감정이 쌓여 잠이 오지 않으면, 쌓인 감정을 빨리 풀어야 잠을 잘잘수 있을것 같다.

뇌는 뉴런들이 연결되어 되어 어떤 패턴들이 만들어져 있느데, 형성된 패턴들이 지도첨럼 되어 있어 우리가 쉽게 반응하고 살아 가도록 각개인 마다 다르게 형성되어 있을것 같다 . - 사람이 살아가면서 문화나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 가는것같기도 하다. -
잠을 하루 못자면 잠에 대해 반응한는 뉴런들의 결합이 변화를 하게 되고, 잠을 못잘수록 잠을 못자는 패턴이 고정화 되어 진다고 행각된다.
우리가 레몬을 보면 자동적으로 침이 나온다. 뇌의 뉴런들이 그런 패턴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같다.
잠에 대해서 잠과 불안의 패턴이 형성되면, 잠에 대해서 생각만 해도 불안이 올라오는 패턴이 되어 버리는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 패턴을 깨야 하는데, 그방법을 스스로 알고 있을것 같다.
우리가 대면하기 싫은 불안이나 근심일수 있기 때문인것 같기도 하고...

잠에 대해서 생가해보다가 앞으로 동양적인 사고가 세상에 주류가 될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이 정확하고 문명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고, 하고 있고, 할것 이지만, 나의 문제에 대해서는 해결해주고 있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잠의 문제에서 수면제가 오늘 잠을 자게 할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잠이 오도록은 못해줄것 같다.
마음이 편안해 지는것은 오늘 잠이 오고, 내일도 잠이 오고, 쭉 잠을 잘 오도록 해줄것 같다.

2011년 1월 3일 월요일

다마지오의 이론을 통한 잠자는 방법

다마지오의 이론에 의하면,
자극-> 정서-> 느낌 -> 신체반응 이런 순서로 만들어 진다고 한다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

외부의 자극은 정서를 만들고 정서는 느낌을 만들고, 그 느낌은 신체 반응을 만들어 낸다.
다시 신체 반응은 자극으로 다가오고 자극이 정서로 느낌으로 신체반응으로 재생산 되어진다.

외부의 자극은 시각정보, 청각,촉각, 생각 등을 포함한다.
학교다닐때 선생님이 지금부터 10분후에 질문을 하겠다고 말하고 틀리면 한대 맞는 다고 하면, 그러한 정보는 학생에게 두려움 혹은 긴장감을 가지게 하는 정서를 만들고, 그 정서는 어떤 느낌을 만들어 낸다. 학생에 따라서 준비가 잘되어 있는 학생이나, 완전히 포기한 학생은 그러한 자극이 다른 정서를 만들어 내고, 다른 느낌이 들수 있게 할수 있을것이다.
그느낌에 따라서 신체는 심장이 빨리 뛴다던가, 동공이 확대 혹은 축소, 혈관이 넓어 지거나 좁아지거나 하는 등의 신체 반응이 나타날수 있다.
이러한 신체반응은 다시 자극이 되고 정서와 느낌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더욱 빨리 가슴이 드근거리 던가 하는 반응이 일어 난다.

이것을 잠에 대해서 연관 시켜보면(잠이 잘 안오는 사람의 경우)
잠자리에 누워있는데 잠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그러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두려움의 정서가 다가 올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그 정서는 잠을 자지 못할수 도 있겠거니 하는 불안한 느낌이 다가온다. 불안한 느낌은 자동적으로 가슴이 가깝하게 한다거나, 발끝이 찝찝하게 한다거나. 나의 말초신경들이 긴장상태에 빠지게 해서 작은 자극에도 반응하도록 만들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자극은 다시 두려움의 정서를 강화시키고, 느낌을 자극하고, 몸의 반응을 촉진 시킨다.

출근을 해서 갑가지 쓰려고 하니까. 말이 두죽 박죽 되고 있다.

인위적으로 정서를 변경하기는 어려운것 같다.
일단 어떤 정서 속으로 빠져들면, 선글라스를 끼는 것과 같아서 그 색속에서 다른 사물이 인식되기 때문인데, 외부작극을 인위로 변경을 가하면, 잠을 좀더 잘 잘수 있다고 여겨진다.

잠을 자려고 할때 방해하는 자극이 외부적인것인 '하지불안증후군'과 같은 물리적인 경우는 그 치료을 해야 할것 같다. - 사실 나는 하지불안 증후군이 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마음에서 만들어는 불안이 자극일 경우는 숨쉬기 방법을 조금 바꾸면, 잠을 빠져 들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천천히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천천히 입으로 숨을 내쉰다.
코로 숨을 들여 마실때는 " 감사" 그리고  입으로 숨을 내쉴때는 " 합니다."
라는 생각을 한다. 다른 문구를 생각하면 될것 같다.
이것을 10번이상하면서 생각을 숨이 들어 오는것과 숨이 나가는것 그리고 문구에 집중한다.
이렇게 하면 일단 내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을 끊어 내는 낼수 있고, 그러면 정서가 조금씩 바뀌어 진고, 느낌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신체반응이 긴장단계에서 이완으로 변해 가는것 같다.

하나 단점을 숨쉬기를 10번할때 까지 귀찮아 질수도 있고, 다른 생각이나 자극들이 들어 올수도 있는데 최대한 숨쉬을 쉬면서 자기가 만든 문구에 집중한다.
문구는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하면 된다.

이렇게 해서 잠이 오지 않을수도 있을것 같은데, 일단 몸을 이완시키고 나면, 잠에 대한 불안 감을 조금 떨쳐낼수 있을것 같다.

숨쉬기가 중요한것은 이차 호흡을 통해서 뇌로 충분한 산소를 공급을 해 주면 마음이 상쾌해질수있다.

어제 잠이 안와서 이렇게 한 30번 정도 하고 나니까. - 30번 하기 까지 처음에는 귀찮고 집중이 안되었는데- 마음이 조금 편해지고 깊이 잠을 잤다.

아침에 생각이 나서 출근하자 만자. 이걸 쓰고 있으니까. 뒤죽박죽 이다.
저녁에 다시 읽어 보고 수정을 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