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7일 일요일

분노에서 벋어나기


우리는 가끔 감정의 자동성에 빠져서 허우적 거린다.
자동적으로 불안이 올라오고, 분노가 올라온다.
그리고 그 자동적이라는 것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불안 분노 허무 그러한 감정속에 빠져 버린다.
빠져린다. 그리고 허우적 거린다. 벋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동양의 전통에서는 그 감정에서 벋는 나는 방법을 발견했다.
호흡을 느끼는 것이다.
항상 숨을 쉰다.
쉼쉬고 있다 는것을 알지만, 숨쉬는 것을 느끼지는 않는다.
조용히 쉼쉬는 것을 느껴본다. 그러나 금방 다른 생각들이 떠오른다.
쉼쉬는 것을 조용히 지속적으로 지켜볼수 있다면,
어떤 감정의 올라왔을때 숨쉬는 것을 지켜봄으로써 올라온 감정에서 벋어 날수 있게 된다.
손의 움직임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자동적을 움직이는 숨쉬기, 손의 움직임등을 느낌으로서 자동성에서 벋어난다.
이러한 방법은 자동적으로 올라오는 불안 분노 등에서 벋어나게 하는 방법이 된다.
그러다 보면 왜 내가 분노하는지 왜 불안한지를 알아챌수 있게 된다.

베토벤 에로이카 , 진리는 한잔의 차속에 들어 있을수도 있다.

마누라와 음악을 들었다.
베토벤의 에로이카라고 마누라가 곡명을 말하면서 저렇게 어려운 곡을 어떻게 쉽게 잘연주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나는 그곡에 어려운지도모르고, 잘연주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누라는 그것을 분리해서 들을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연주한다는 관점에서 그곡을 듣는다.
그러나 나는 그곡에 나에게 좋은 느낌인지가 중요한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동일한 소리이지만, 나와 마누라가 듣는 관점은 다르고 느끼는 바도 다르다.
마누라가 이야기가 맞는것도 아니고 나의 이야기가 맞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맞도 저것도 맞고...
'만물은 저것이 아닌것이 없고, 이것이 아닌게 없다'라는 장자 제물론의 나오는 말이 생각난다.
'느끼는 나' 그것만이 실제인데, 그 실제를 벋어나 이것이 맞고 저것이 틀리다는 관념으로 들어 간다.
우리는 실제에 살고 있으면서, 관념속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
실제는 내가 생활하는 방에 있고, 먹는 음식에 있고, 들리는 음악소리에도 있다.
그러나 진리는 먼곳에서 있다고 여긴다. 그것이 관념이고 그곳에서 허우적 거리는 동안는 진리를 보지 못한다.
파랑새는 내옆에 있다.
내가 마시는 녹차 한잔, 그속에 도(道)가 있다.
내가 마시는 녹차한잔이 하찮은 것이라고 여기기 때무에 그 녹차 한잔이 하찮은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