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변호인 / 감동적임

어제보다 조금 차가운 아침이었다.
눈발이 조금 날리려는듯, 오늘은 자전거 타는것을 포기 하고...
오전 장사는 쉬기로 하고 반나절 휴가를 갔다 오기로 했다. 물론 혼자서...
그리고 극장으로 갔다. 아침 10시 변호인 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둘이서 혹은 혼자서 아침 조조 영화는 2/3정도 찬것 같았다.

영화는 따뜻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변호사의 이야기다.
그냥 보통사람 처럼 살아 가는 사람이다.
"당신의 돈을 지켜드립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가치는 돈이다.
내마음의 가치의 우선순위도 돈인것 같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변호사가 살아 가는 삶이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삶이다.
나도 그것을 추구한다. 돈을 벌고, 그돈으로 가족을 지키고, 사회적으로 대우받으면서 사는 삶... 그것은 속물도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일반적은 삶이다.

영화는 어떤 사건을 맞이한다.
그사건은 그 변호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지켜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나는 눈물이 맺혔다. 내가 진정 지켜야하는 것을 지키면서 살아 가고 있는가.

이 영화가 정치적인가. 논란이 있다.
정치란 모든영역이다.
영화 '소원'을 보았다. 그 영화도 사회를 변하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 가고 있는가. 혹은  사회가 변해야 한다. 주장한다.
그러면 영화 '소원'도 정치적 영화가 된다.

보수란 지키는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나를 지켜야 하고, 나의 가족을 지켜야 하고, 사회를 지켜야 하고, 국가를 지켜야 한다.
행복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나로 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일생동안 무엇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가. 나를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
영화에서 변호사는 '국가는 국민이라고 말한다.' 국민은 나이고 개인이다.

영화는 누구를 위한 영화라고 말하기 어려운것 같다.
아들을 지키기위한 엄마, 자식이 바른 사회에서 살게하기 위한 아버지,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각개인을 위한 영화이다.

지킨다는것이 보수의 뜻이라면... 이영화는 보수를 위한 영화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지키며 살아 갈것인가?
내가 지키고자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반듯이 나에게 행복(사람들이 생각하는)을 가져다 줄것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키고자 하는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공곰히 생각해보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주는것 같지는 않다.
지키고자 하는것은 무엇이야 하는가.
영화는 양심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지켜야 한다.
영화에서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한사람(송변호사말고)이 나온다. 그는 군인이다. 명령과 양심앞에서 양심을 선택한다.
성당이 나온다.
양심은 하나님의 소리이다.
그는 그래서 모든것을 건다.
내가 보는 그의 앞날은 참담하다. 군에 갔다와서 사회생활을 조금 한 사람이라면 그가 양심에 따르는 삶이 그를 얼마나 참담한 삶으로 일끌것이라는 것은 눈에 선하다.

하여튼 그는 양심을 따른다. 어떠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양심에 따르는 삶이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여겼을 것 같다.

이영화는 정치적이거나 누군가를 미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닌것 같다.

우리는 살아 가면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양심의 소리이다.
그 양심의 소리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것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좋은 국가란 무엇인가.
누군가 양심을 지키기 위함에 대해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2013년 11월 18일 월요일

대구 두류공원의 가을 / 길은 이어줌이다. / 2013년 11월 18일 오전 11시경

자전거를 타고 잠시 두류공원을 경유해서 서문시장으로 갔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다.
11월 18일 나의 상식으로는 가을이다.
그런데 날씨는 겨울이 다가 온것 같다. 나는 이미 내복도 입었고, 오리털 파카도 입었다.
실내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이렇게 입고 있으면 답답하겠지만, 밖을 돌아 다녀야 하는 나로서는 추위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이다.

자전거를 세우고, 가방에 있는 사진기를 꺼내서 사진 여러장을 찍어 봤다.

길위에 사람들이 사라졌다.  다 어디로 가버린걸까.

길은 길이다. 나와 너를 이어주는 길...
추위는 이어짐을 어렵게한다.
그래도 길은 그대로다.
내가 너를 만나려고 하는 순간,
길은 그대로 있다.
어떠한 시련이 와도 길은 그대로다.

나는 너에게 닿고자 한다.
길은 이어줌이다.



 벤치도 오늘은 비어있다.
 추위로 인해 수많이 사연들이 오늘 하루 쉰다.
 그러나 추위를 이겨낼 따뜻한 사연들이 그위에서 만들어 질지도 모를일이다.

  내가 너에게 닿기 위해서 누군가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
  가을의 벤치는 '기다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것 같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생각나다.

  나는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너는 희망이다.

아침

춥다.
바람이 불고, 쌀쌀하다.
장갑을 끼고
자전거를 탈 준비를 한다.

자전거를 타고 매일 가는길
어제의 그 길과는 달라져 있을것이다.
낙옆이 더 많이 떨어 져 있을 것이고,
지나 가는 사람들도 바뀌어 있을 것이고,
나도 하루 만큼 바뀌어져 있고.

가만히 있는 것은 없다.
언제나 새롭다.


2013년 11월 15일 금요일

식물생장용 LED 만들기 / 밀싹 재배 / 식물재배용 LED

어제 저녁에 시간을 내서 식물생장용 LED를 만들었다.
몇달전에 사놓은 LED모듈을 어제 납땝하고 조립해서 연결해봤는데 효과가 있을지 관찰해보아야 할것 같다.
가계에 햇볕이 잘 들지 않기 때문에 광합성을 위한 빛을 공급할수 있다면, 여러가지 간단한 재배 테스트도 해볼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을 해본다.
LED의 구성은 4가지로 배열해보았다.
일반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하는 Blue 계열과 Red 계열의 led를 두개 녛고, Warm White와 Cool White를 하나씩 넣어 4개로 구성을 했다.
햇볕을 못밭아서 보리싹이 광합성을 못해서 노랗게 되었는데 그게 개선될수 있을지 몇일 관찰을 해보아야 겠다.
그리고 LED의 구성을 다르게 몇가지 해서 어떤 것이 보리싹이나 밀싹에 최선인지 한번 테스트 해보아야 겠다.  (아마 식물마다 요구하는  빛의 파장이 다르지 않겠냐는 가정하에서 )

겨울이라서 씨앗이 거의 팔리지 않는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림이, 시간이 지나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들을 충실히 체워가야 겠다.

아래 사진 어제 만든 식물 생장용 LED 와 LED 빛을 받는 밀싹


2013년 11월 14일 목요일

새싹 브로콜리 키우기 / 재배과정 정리

새싹 브로콜리를 키우는 과정을 한번 정리해보았습니다.

1. 필요한 준비물
   - 새싹 브로콜리 씨앗 (샘플용 소용량사용)
   - 새싹재배기 (아래쪽에 구멍이 있는 다기사용)
   - 부직포(거즈나 키친타월 등도 가능)

      (새싹 브로콜리 씨앗 사진)            

2. 재배과정
   1) 씨앗을 물에 4~6시간 정도 불린다.


   2) 다기 바닥에 부직포를 깔고 불린 씨앗을 넣는다. (다기의 경우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서 아랫쪽에 물을 넣을 수있다. 아래쪽에 물이 있기 때문에 수분조절이 용이하다.)

   3) 신문이나 다기 뚜껑이 덥어 둔다. (새싹 재배에서 제일 중요한것이 햇볕차단이다. 씨앗이 발아를 한후, 싹을 티워서 어느정도 올라 올때까지는 빛를 보아서는 안된다. 그래서 신문을 덥거나 해서 햇볕을 차단해야 한다.

   4) 아침저녁으로 씨앗이 말랐는지를 확인하면서 분무기로 물을 준다. 1~2일 후에 발아를 시작한다.


   5) 사진에 나오는 재배과정은 11월 7일 부터 저녁 7시 부터 시작했다. 요즈음 온도가 낮기 때문에 낮은 온도에서 재배를 했는데 성장속도는 약간 느린 감이 있어도 15도 정도의 온도에서도 재배에는 지장이 없는것 같다. (3~4일 정도 지난  사진이다.)

   6) 햇볕을 보지않기 때문에 광합성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잎이 노랑색을 띤다.
      알팔파와 같은 콩나물 계열의 씨앗은 햇볕을 전혀 쬐지 않는게 보기 좋고 맛도 좋다.
    (콩나물 의 경우 노란색으로 길러서 먹는것 같은 이치)
    그러나 브로콜리의 경우 어느정도 자라나서 먹기 하루전에 했볕을 쬐여 주면된다.


   7) 위의 사진의 상태에서 햇볕을 조금 쬐어 주면 광합성이 시작되고 아래와 같이 색깔이 변하기 시작다.

새싹을 재배하는것은 아주 쉽다. 그런데 중요한게 수분, 온도와 빛의 관리이다.
예전에 새싹 상추가 아무래 시간이 지나도 발아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뭐가 문제 일까. 해서 3번정도 조건을 다르게 해서 재배를 해도 실패를 했었는데, 알고 보니 상추 씨앗을 경우 25도(온도)가 넘어가면 발아를 하지 않고 휴면에 들어 간다고 한다.
그래서 실패했었던 경우가 있엇다. 그래서 씨앗을 냉장실에 넣고 몇일 후에 꺼내서 다시 재배하니 발아를 시킬수 있었다.

아래에는 새싹 브로콜리를 흙에 심은 경우이다. ( 2cm정도 가 올라올때 까지 빛을 차단 하고, 그 이후에 햇볕에 노출시켜서 키운경우다. )




물로서 새싹을 재배할때 보다 훨씬 더 잘자란다. 흙의 영양분을 흡수하기때문인데 개인적 생각으로는 먹기 위해서 재배하려면 흙에서 키우는 편이 좋은것 같다.
흙으로 재배하는 과정은 다음번에 한번 정리해 보아야 겠다.


자기가 새싹을 재배해서 먹으면 완전히 유기농 제품이 된다.
물외에는 어떤 것도 들어 가지 않고, 흙으로 키운 경우에도 흙과 물의 성분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가지 않는다.
에비앙 생수를 사용해서 재배하면 프랑스물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공기의 성분이 같다고 가정하면 프랑스산 새싹 브로콜리(씨앗을 원산지가 다를수 있지만) 와 비슷하게 될수 있고,
삼다수를 사용하면 제주도에서 키운 것과 비슷해 질것 같다.

씨앗은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가능성들은 발아되어질수 있는 조건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조건이 된면 자신의 모든 가능성들 키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성장한다.
그런데 가끔씩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씨앗을 발견한다.
씨앗 자신의 가능성을 피우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의 모든 가능성을 다 꽃 피우고 있는가?
 내가 게흘러서 가능성들이 움추려 들어 있이 않은가?'

요즈음 들어 삶은 나의 정성에 따라서 충실해지기도 하고, 빈약해 지기도 한다 라는 것을 씨앗을 키우면서 느껴간다.


2013년 11월 5일 화요일

밀싹 재배, 보리싹 재배

밀싹과 보리싹을 키우고 있다.
건강에 좋다고 잘라서 녹즙을 몇번 해먹었다.
밀싹재배에 관한 정보는 유튜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재배조건이 설명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다.
      <밀싹>


<보리싹>

.

보리싹의 재배의 경우 미국에서는 밀싹보다는 인기가 없는것 같다. 그래서인지 재배에 관한 정보가 적다.

생장속도에서 밀과 보리의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밀싹을 키우기가 보리싹 보다 쉽다.

밀싹과 보리싹을 수경재배를 해보았는데, 흙에 재배하는 측면이 훨씩 발아율이 높고 관리도 편하다.

밀싹과 보리싹 재배에 대한 정보를 좀더 다듬어서 블로그에 올려 보아야 겠다.

2013년 10월 29일 화요일

영화 소원 , 우리의 소원은 무엇일까.

일요일 저녁 '소원'이라는 영화를 봤다.
오랜만에 집사람하고 본 영화였던것 같다.

오늘은 장사도 잘안되고... 시간이 나서 몇자 적어 본다.

고난은 영화속에 주인공의 가족들에게 닥친다.
아무런 준비도없이, 그리고 감당할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영화는 고난을 겪어 가면서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다.
아픔을 감당하면서 각자의 자리를 지킨다.

회복은 관계에서 온다.

엄마는 엄마로서.. 아빠는 아빠로서 이를 악물고 그 자리를 지킨다.

우리는 가끔 나에게 지워진 짐을 벋어 버리고 싶을때가 있다.
그 짐을 벋어버리면 행복해질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원이 아버지가 혹은 어머니가 그들이 짊어진 짐을 벋어버리고 싶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짐을 지고 살아 가고 있다.
그리고 가끔 그 짐을 벋어 버리고 싶어진다.
그리고 행복은 짐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짐이 없는 가벼운 어깨에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삶은 어떤 형식으로든 유한하다.
가볍게 살아가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 가든... 삶은 유한하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극중의 설경구가 어떻게 살아 가야지 행복한지 안다.
그 과정이 고난이라도 그 짐을 벋어 버린다면, 영화는 아름답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영화속의 주인공을 판단할때와 같이 생활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그 기준을 들이 댈까.
영화를 보면서..나는 슬퍼하고 분노하고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슬퍼하고 분노하고 공감하는 '나'라는 사람이 선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판단할줄 아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선한 사람이라고 가정해버렸다.

선을 안다고 해서... 선한것인가.

유학에서는 시비를 구별하는 것이 가장 낮은 단계이다.
나는 아직 가장 낮은 단계에서 해매고 있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설국열차 마지막 장면 북극곰이 영화의 모든것을 설명한다.

영화를 안보신 분은 읽으시면 안됩니다.


설국열차 마지막 장면 북극곰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생물이 멸종했는데 어느날 북극곰이 다시 살아 났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극곰이 살수 있는 환경이 있었고, 북극곰의 먹이사슬로 연결되어있는 동물이 살았있었을 것이다. 

설국열차에서는 모두 자리를 지킬것을 강요받는다. 
그것은 설국열차안에서만이 살수 있는 공간이고, 그 공간을 지킬필요가 있을때 참으로 성립된다. 

윌포드는 밖같의 환경에 대해서 몰랐을까
아니면 자신의 신격화를 위해서 바깥도 살수 있다라는 정보는 통제했을까.

어린이 학교가 나온다. 
학교에서 윌포드는 모든사람을 구한 신적인 존재로 교육받는다. 
그리고 열차안만이 살수있는 공간이라고 교육받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얼어죽은 장면을 보여주면서, 밖은 죽음의 공간임을 이야기 한다. 그 아이들이 자라면 어떻게 믿을까. 

그런데 요나만이 그 교육에서 자유롭다.
기차에서 태어나서 그 교육을 받지 않은듯 하다. 

커티스도 자유롭지 못하다. 
밖으로 나가는 문을 폭파하려고 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가 생각하는 생존의 공간도 열차내로 머물러 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 생각은 조작되어 질수 있다. 
그러나 느낌이라는것은 조금더 진실에 가깝다. 

밖으로 나가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누이트족이었다고 한다. 
태생적으로 눈에서 살던 사람들.. 그들의 느낌속에는 밖에 살수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얼어 죽었을까. 윌포드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에 의해서 타살당했을까. 
이누이트족은 북극곰을 보았을 가능성이있다. 혹은 눈이 모양에서 온도를 느낄수 있었을수도 있다. 

단하나만이 진리이다. 그 진리를 지키기위해서 당신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은 통제되어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은 어디에서 일어 날까. 
우리의 삶곳곳에서 이러한 것들이 일어난다. 
불교에서도 우리가 감각으로 느끼고 보는 직접적인 경험은 가짜일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기독교에서는 항상 깨어있으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도 기독교도 종파의 입장으로 돌아 가버리면 깨어있는 사람이 버겁다. 
원자력만이 우리가 발전할수 있는 길이다. 다른것을 처다 보지 마라.. 그건 말이 안된다라고 이야기 한다. 

북극곰이 살고 있다. 그러면 어떤 제한된 공간속에서 다른 사람들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수도 있다. 그러면 윌포드가 말하는 가정은 깨어진다. 
그의 신격화는 무너진다. 
아마 다른 사람이 알았다면 사람들은 계급혁명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아니라. 밖으로 나가기 위한 투쟁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윌포드가 제공하는 조건내에서 투쟁을 한다. 그러나 남궁민수만이 밖으로 나가기 위한 투쟁을 한다. 
윌포드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은 남궁민수이다. 
그러나 언젠가 기차가 문제가 생기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을 윌포드는 알고 있었는것 같다. 기차의 엔진은 조금씩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그래서... 꼬리칸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남궁민수만은 죽일수 없었다. 언젠가 기차의 문을 열기위해서...그래서 유폐시킨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 진리라고 믿고있는 것들... 이것들이 진짜인가?

정신분석에서 마음을 분석할때... 우리가 실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대부분 가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는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 있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어떤것은 표면의것이다. 그 표면은 그속에 있는 어떤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게 보통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이다. 

우리의 확고한 생각을 무너트려야 마음의 고통속에서 벋어날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 직면하는 개개인의 문제는 각자가 가진 자신의 확고한 생각에서 기반한다고 여겨진다. 확고한 기반이 무너지면 큰일 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지키기위해 노력한다. 
그노력이 비정상적일때 그게 우울증이고 정신분열이고, 노이로제이다.
영화를 개인의 마음과 연결시키면, 깨어있다라는 것은 괘롭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깨어있는 자만이 문을 열수 있다.

열차안에서 대부분 마약에 취해있다. 윌포드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깨어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북극곰이 있다. 그것을  윌포드가 이미 알고 있었다면,..
열차속의 사람의 생각은 이미 조작되어진 것이다. 상생이라는 미명하에...

영화를 어떻게 읽든 그것은 자유이다.
이영화가 자신이 가진 굳건한 생각을 다시한번 되돌아 보게 만든게 계기로 작용했으면 어떨까...

영화는 박진감이 넘치지도, 그래픽이 뛰어난지도 모르겠다.
감독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천부적이 재능이 느껴진다..
그런 감독이 부럽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노력을 해도 잘 되지 않되는데.....

그러나 영화를 다시 보면 졸것 같다...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으니까...

2013년 8월 5일 월요일

설국열차 결말 / 봉준호감독은 천재다...

설국열차...
제목이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설국열차라는 이름에 끌러서 극장으로 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구를 구하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이 지구를 파멸로 몰고 간다.
빙하기가 오고, 사람들은 살기위해서 열차에 오른다.
노아의 방주 그속에 탄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듯이 열차에 오른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열차는 앞에서부터 꼬리칸으로 등급이 나누어져 있다.
제일 뒤쪽같은 무임승차를 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인도 카스트의 불가축천민처럼 대우를 받는다.
지구상의 인간은 열차안에만 존재하고, 그 열차속은 하나의 사회(국가)가 된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위치를 지킬것을 강요받는다.
그 질서의 유지가 같이 살아가기위함이라고 이야기 되어진다.
그런데 꼬리칸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우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다.
태어남이 사회적 신분이었던 시대가 있었던것과 같이 그들이 최초에 탑승의 위치가 자신들의 지위가 되어버린 곳이다.

열차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혁명은 시작된다.
혁명의 목적은 지도자의 변경이다.
혁명의 주체가 지도자가 되고, 열차내의 정치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는 목적을 가진다.

혁명의 시작을 위한 기차와 기차사이의 문을 여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송강호이다.

이렇게 영화가 흘러가면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이 주재가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적 세계, 그 세계의 문제는 지도자가 잘못되었때문이다.
그 속에서는 각자의 본분을 지켜야한다.
현재의 기독교도 플라토의 이데아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영화속 중간 중간 종교에 대한 조롱이 나온다.
현재의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세상, 우리는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합리적인것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명확성을 쫓아서 나아간다.

기차는 세계를 돈다.
1바뀌가 1년이다.
돌고 도는 인생, 기차내의 사상은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돌고 도는 기차는 불교적 세계관에 가깝다.
100바뀌돌기전데 기차속의 사람은 죽게 되어 있다. 어떻게든...

이렇게 투쟁의 승리가 영화의결말 이었다면, 봉준호 감독은 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것 같다.

기차속에서의 100바퀴속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것이 목표라면... 그리고 그 목표에 인도되어 살아 가는 것이 구원이라면...인간의 가능성은 무엇일까.

세상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아 가고 싶다.
문은 잠겨 있고, 열쇠가 필요하다. 그열쇄가 남궁민수(송강호)에게 있다.
기차속에서 혁명이 성공하면 어떻게 될까.
기차속은 바뀌어 질까.
이게 감독의 물음인것 같다.

우리의 역사이든, 우리의 인생이든...쳇바뀌 도는 굴레에서 벋어나야 한다.
그것은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열차속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은 누구일까.
혁명가 커티스일까. 길리엄일까. 윌포드 일까.
그건 남궁민수이다. (개인적생각이다.)

그만이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할수 없다. 영화를 안본사람에게는 날벼락일수 있으므로...)

영화중간에 학교 장면이 나온다.
어린아이들이 교육을 받는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기차의 중심인물이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싶다.
나와 종교적 관점이 약간 다르지만, 충분이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해온적도 있는것이 사실일것 이다.
기차내의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한 교육일수 있다.

기차가 100바뀌 돌기 전에 죽는다.
우리의 삶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1등석에서 꼬리칸으로, 꼬리칸에서 1등석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삶의 가치는 기차의 폐쇄성처럼 갖힌것일까.

이제 삶의 패러다임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것 같다.
결말이 허무할수 있다.
인간의 목적은 자신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존재하는 것이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생각을 해본다.

만약 봉준호 감독이 서양사람이었다면 혁명의 성공으로 영화가 끝났을 것같다.
그러나 그는 한국사람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동양적 / 한국적 가치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남궁민수도 한국인다. 그게 열쇄로 여겨진다.


2013년 7월 7일 일요일

분노에서 벋어나기


우리는 가끔 감정의 자동성에 빠져서 허우적 거린다.
자동적으로 불안이 올라오고, 분노가 올라온다.
그리고 그 자동적이라는 것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불안 분노 허무 그러한 감정속에 빠져 버린다.
빠져린다. 그리고 허우적 거린다. 벋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동양의 전통에서는 그 감정에서 벋는 나는 방법을 발견했다.
호흡을 느끼는 것이다.
항상 숨을 쉰다.
쉼쉬고 있다 는것을 알지만, 숨쉬는 것을 느끼지는 않는다.
조용히 쉼쉬는 것을 느껴본다. 그러나 금방 다른 생각들이 떠오른다.
쉼쉬는 것을 조용히 지속적으로 지켜볼수 있다면,
어떤 감정의 올라왔을때 숨쉬는 것을 지켜봄으로써 올라온 감정에서 벋어 날수 있게 된다.
손의 움직임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자동적을 움직이는 숨쉬기, 손의 움직임등을 느낌으로서 자동성에서 벋어난다.
이러한 방법은 자동적으로 올라오는 불안 분노 등에서 벋어나게 하는 방법이 된다.
그러다 보면 왜 내가 분노하는지 왜 불안한지를 알아챌수 있게 된다.

베토벤 에로이카 , 진리는 한잔의 차속에 들어 있을수도 있다.

마누라와 음악을 들었다.
베토벤의 에로이카라고 마누라가 곡명을 말하면서 저렇게 어려운 곡을 어떻게 쉽게 잘연주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나는 그곡에 어려운지도모르고, 잘연주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누라는 그것을 분리해서 들을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연주한다는 관점에서 그곡을 듣는다.
그러나 나는 그곡에 나에게 좋은 느낌인지가 중요한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동일한 소리이지만, 나와 마누라가 듣는 관점은 다르고 느끼는 바도 다르다.
마누라가 이야기가 맞는것도 아니고 나의 이야기가 맞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맞도 저것도 맞고...
'만물은 저것이 아닌것이 없고, 이것이 아닌게 없다'라는 장자 제물론의 나오는 말이 생각난다.
'느끼는 나' 그것만이 실제인데, 그 실제를 벋어나 이것이 맞고 저것이 틀리다는 관념으로 들어 간다.
우리는 실제에 살고 있으면서, 관념속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
실제는 내가 생활하는 방에 있고, 먹는 음식에 있고, 들리는 음악소리에도 있다.
그러나 진리는 먼곳에서 있다고 여긴다. 그것이 관념이고 그곳에서 허우적 거리는 동안는 진리를 보지 못한다.
파랑새는 내옆에 있다.
내가 마시는 녹차 한잔, 그속에 도(道)가 있다.
내가 마시는 녹차한잔이 하찮은 것이라고 여기기 때무에 그 녹차 한잔이 하찮은 것이 된다.

2013년 6월 27일 목요일

예술과 외설 / 외설의 긍정적 기능 / 정신분석적 해석

성욕이 있다.
사전에는 "성적행위에 대한 욕망" 이렇게 나온다.
성욕이란 '섹스하고 싶다.'라는 느낌의 드러냄 이라고 볼수있다.

성욕이라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고,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하다.

모든 사람에게 성적 욕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낼수 없다.
성욕은 사회적 규범과 도덕에 의해서 제어된다.
일반적으로 성적욕망을 드러낼때 열린공간에서는 자신을 욕망을 드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도덕 규범을 통해서 스스로를 검열하고, 세상이 인정하는 범위내에서 욕망을 드러낸다.

사람에게는 '섹스하고 싶다'라는 성적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해결방법을 추구한다.
욕망의 해결방법이 금지된것들은 억압된고, 사회적으로 순화되어 밖으로 드러난다.

누구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성적 판타지가 있을수 있다.
성적 판타지와 사회적 규범/도덕의 격차가 커질때 성욕을 억압되고 억압된 성욕을 더욱 커지게 된다.

많은 성인들에게 섹스는 일상의 하나이다.
즉 밥을 먹는것과 같은 삶의 하나이다.
그러나 섹스는 도덕과 규율에 의해 제한된다.

예술과 외설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외설이라고 불려지는 것들이 있다.
삼류소설, 포르노, 허슬러, 플레이보이 등등..
이런 것들의 특징은 성육을 끌어 올리려는데 중심있다.

예술작품이라고 불리워 지는 것들의 목표는 성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말하자고 하는 의미를 추구한다.

의미의 추구와 직접적 성욕의 발현 이것이 예술과 외설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성욕이라는 것은 사회적 도덕과 규범에 의해 스스로에 의해  검열되어서 밖으로 드러난다.
자신이 성욕이 사회적 규범과 도덕에 위배되지 않을때에는 그대로 드러나명 억압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 어긋날때 억압되어진 상태에서 드러남으로 일정한 욕구는 갖히게 된다.
억압이라는 것은 눌려진다는 것이다.
비도덕적인 성욕들은 눌리어져있고, 그힘은 눌리워진 만큼 강화되어 있다.

성욕은 눌리워진것들이 강한것이다.

외설은 눌리워진 성욕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외설을 내용은 비도덕적인 것들이 많다.

완전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성욕과 사회적 규범/도덕의 범위내에 성적 욕망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욕은 일정부분 프로이드식으로 말하자면 초자아에 의해 눌리어져있다.

눌리어져 드러나지 못하는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충동은 커진다.
충동은 행동화의 위험을 내포한다.
강렬한 충동은 강렬한 행동화는 포함할수 있다.

외설의 기능이 있다.
개개인들이 가진 눌리어진 욕망의 해소를 돕는 기능을 한다.
외설이라 불리워지는 것들을 봄으로써 일정부분 눌이어진 욕망이 밖으로 드러난다.
그러면서 눌리어진 욕망이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간다.

따라서 충동의 긴장감은 어느정도 해소되기도 한다.

그러나 외설의 문제점도 존재한다.

2013년 5월 25일 토요일

파파로티 / 빌리엘리어트의 감동을 그대로...

거금 4000원을 주고 영화를 다운 받아 보았다.
파파로티

영화 내용은 뻔하다.
제자가 나오고, 선생님이 나오고, 마지막 장면은 빌리엘리어트 닮았다.
영화가 빌리엘리어트와 조금 비슷한 느낌이 드는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조금더 한국적이다.

모든걸 뻔하다고 생각하면 하지않는다.
그러나 그 뻔하다고 하는 속에 다른 느낌이 들어 있다.
뻔하다는 생각속에 있으면 자꾸 뻔한것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러면 모든것은 뻔한 것이 되고, 내가 생각한 데로 뻔하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뻔하다는 생각을 지우고 보면, 새로운것들이 보인다.

이영화의 시작과 끝은 예측가능하다. 그러나 재미있다. 감동이 있다.

한석규가 선생님이다. 제자를 만난다.
그 제자를 사람만드는 과정이다. 아니 그가 가진 능력을 펼쳐내게 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할때 이렇게 생각한다. 희생한다고 생각한다.
그 희생이라는 것 때문에 완전히 뛰어 들어가지 못한다.
정신적 고통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를 돕고 싶다 그러나 완전히 뛰어 들기란 어렵다.
'희생'이라는 말이 가로 막는다.

한석규는 그 제자에게 뛰어든다. 과연 희생을 위함이었을까.
희생이 아니라 그속에 자신의 구원이 동시에 보였기 때문이다.
좌절된 삶속에서 의미없음 속에서 자신의 구원이 그 제자 속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속으로 뛰어든다. 그게 그 제자의 구원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희생인듯 하지만 자신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주위의 고통을 외면하고 싶어지기도한다.
모르면 미안할 필요도 없고, 내 삶에 방해도 되지 않을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피할수 없는 고통들이 있다. 주위사람들로 인한...
그것으로 부터 벋어나고픈 생각이 든다.
그리고 누군가 나의 고통을 알아 줬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에서 한석규는 내마음처럼 등장한다. 관심이 없다.
중간보스가 이렇게 말한다. ' 내일도 뭐할지 모르겠다'
모두 고립되어 홀로 존재한다.
그래서 모두 내일 뭐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 마음속으로 뛰어든다.
희생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 간다.
내일 할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자신을 살리는 길인듯 하다.

다시한번 영화는 뻔하다.
뻔하다고 생각을 버리고 보면 뻔하지 않을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를 느끼고 호흡할수 있다.
웃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음악에 취하고...
다보고 나면 역시 내생각데로 영화가 흘러 가는구나. 알수 있다.
그러나 느끼고 호흡한 경험은 내속에 남는다.

이제훈이 부르는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못이루고' 한번 들어 보고 자야 겠다.
공주는 잠을 못이루지만.. 나는 잠이 온다.
오래전에 마누라하고 오페라를 보러가서 한번 들어 본것 같다.
그게 언제였는지도 생각이 안나고, 그때의 감동도 생각이 안난다.
생각이 나든 안나든 그때의 감동을 느꼈으면 그만인것을....

2013년 5월 16일 목요일

세상의 시작 / 진리는 이것만이어야할까.

세상의 시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시작을 본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시작되었다라고 많은 종교에서 이야기한다.
어떤 세상의 시작이 정확하다고 믿기 전에 수많은 시작에 대한 이야기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각자기 서있는 위치에서 맞지 싶은 어떤것을 선택한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 시작은 하나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결국 하나는 맞고 나머지는 다 틀린 것이 된다.

우리는 어떻게 선택을 하는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영역속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세상의 시작에 대한 선택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반영한다.
세상의 시작에 대한 믿음속에 각자의 역사가 포함된다.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어떻게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한것 일까.
아니면 내가 세상의 시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까.

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별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거짓이므로 필요없는 것일까.

어느새벽 정화수를 떠놓고, 군대에간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미니는 잘못 믿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것만이 진리이다' 이것을 넘어서야 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나의 진심이다' 라는 것이 '이것만이 진리이다'를 넘어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종교는 진리의 문제를 넘어서는 진심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종말론에 관해서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은 종말을 바라는 것일까.
참 희얀하다. 그런 생각을 한적이 있다.
사람이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을 포기 한것일까. 궁금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종말론을 믿는 사람은 종말을 넘어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믿는 것같다.

어떤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의해 모든 사람들에게 종말이 오더라도 자신들은 그 종말에서 예외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임박한 종말에서 예외가 되고자 모든것을 헌신한다.

북구의 신화에서 종말의 전조는 세상의 혼란이라고 한다. 도덕이 무너지고 정의가 무너지고.. 무든것이 혼란한 상황이 전조하고 한다.
사람이들이 임박한 종말이 가까이 왔음도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계가 혼란해졌기 때문일것이다.
성경에서는 의인 한명이 없어서  한도시가 멸망한다.
임박한 종말을 믿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믿을 의인 1명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일것이다.

사람은 각자의 세계속에 살고 있다.
그 세계가 풍요로움의 연속일수도 있고,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일수도 있다.
종말은 이세상에 믿을 대상인 의인을 한명도 발결할수 없는 세계속에 있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것일수 있다.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는 것은 세상에 고립되어 이상태로는 살수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인것 같다. 이성적이 종말론이 맞다 틀리다 말할수 있다.
그러나 고통때문에 종말을 바라는 사람들은 그 맞고 틀리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종말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면 현실이 지옥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임박한 종말을 믿는 사람들을 시비지심으로 바라보면 그들이 틀린사람이다.
그러나 임박한 종말을 믿는 사람들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면 그들을 이해할수 있다.

종말론은 한계상황에 마주해서, 도저히 버틸수 없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작의 희망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섹스하다 / 언어는 어떻게 나에게 다가오는가

관계를 맺다
정사를 나누다
교접하다
성행위를 하다
성교하다
섹스하다
빠구리치다
씹하다

네이버사전에 '육체적 관계를 맺는것'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하나의 상황을 두고 다른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뉘앙스는 조금씩 다르다.
사람마다 다가오는 느낌도 조금씩 다를 것이다.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언어의 선택을 달리한다.
좀더 직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아래쪽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성욕을 느끼게 만드는 언어는 어느것이 더 할까.

정치미디어 전문가들은 언어의 선택에 사활을 거는것 같다.
어떤 단어를 선택할것인가.
어떤 정치인이 공식적으로 하는 말은 실제로 유권자의 감정의 변화를 염두해 두는 것같다.

성욕이 발동할때 우리는 구글에서 어떤 검색어를 사용할것 인가.
가장 야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를 써서 검색할것이다.
각자 성욕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는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을 성욕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를 잘알고 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도 잘알고 있다.
내가 선택해서 내 감정을 움직이느냐, 누군가에 의해 움직여 질것인가.(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좀더 정치적으로 들어 가본다.

일반적으로 부인을 소개할때 '우리 부인이다' '혹은 '우리 남편이다'라고 말한다.
영어로 our wife or our husband 라고 표현되지만, 미국에서 이렇게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들은것 같다.
'우리'라는 용어가 지역적으로 다르게 쓰이는것 같다.

'우리가 남이가' 라는 현상이 있었다.
두개의 단어가 무엇인가를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비록 그 사람이 잘못을 한것이 있어도 지켜주어야 할 어떤것을 포함하고 또는 내가 잘못을 해도 우리라는 테두리 내에서 용서받을수 있다라는 것을 포함한것 같기도 하다.
아마 혼란했던 우리나라에서 우리라는 테두리 네에서 보호받고 보호 해주었던 것이 녹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라는 용어에서 이러한 마음들이 녹아 있었는데 누군가 그 용어를 정치적으로  '우리가 남이가' 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남이가' 아주 무식한 말로 들린다.
그러나 그말을 사용했던 당사자들은 그 말이 상징하고 있던 것을 알았었던것 같다.
종교적 용어를 보면 안주 단순하다. 각인 되기 쉽고 그러나 그 종교적 말들 속에서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다.
그 녹아 있는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아마 이성적으로) 무의식적으로는 그 말을 느낀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아주 상징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말에 움직인다. 그 말에 움직이는 사람은 6.25를 경험하고 현대사의 격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여겨진다.

정치인들은 단순무식한 말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식한것이 아니라. 아주 상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 상징의 언어의 당사자가 되는 사람은 그 말에 반응한다.
시대에 따라서 드러나지 않는 여론의 흐름은 항상있다.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서 정치인들은 노력한다.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는 어떻게 보이면 무식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언어는 무의식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의 단어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려고 많은 정치인들은 비난을 무릅쓰고 그 단어를 품는다.

'우리가 남이가' 그냥 뭐 그런 무식한 말을 하는 정치인이 있느냐 이렇게 비난하고 말면 되일인지도 모르겠다.(지금은 '우리가 남이가' 라는 용어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것 같다.)
 
친구들이 모여있다. 한친구가 다른 친구를 도와주면서 '우리가 남이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의미를 경험한다. 경험은 무의식으로 쌓인다.

누군가 나의 무의식을 깨운다.  그것이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상징성이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는 깨어있어라 하는 지도 모를일이다.
정신분석이라는 것이 무의식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인데...

몇일 전에 했던 일을 기억해보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의식 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일수도 있을것 같다.
하루의 대부분은 무의식 적으로 행동한다.
우리의 행동은 의식적 행동보다는 무의식적 행동이 더 많다.
무의식에 호소하는 언어라는 것은 상당히 강력하다.
종교적 언어는 단순하면서 반복을 요구한다.
그래서 종교적 언어는 믿는사람에게 아주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 강력함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반대일수도 있게 한다.
드러나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가 남이가' 를 듣고 행동의 변화가 오는 사람에게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알게 모르게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 논리적인 것에는 마음을 닫는다.
논리적으로 어떤것을 도출하는 것보다, 자신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논리를 찾는 다고 하는 편이 맞는것일수 있을것 같다. 그 속에는 무의식이 있는것이 아닐까.
 
'레몬'이라고 했을때 침이 고인다. 그러나 이것은 레몬을 경험해보고 맛을 몬사람에게 나타는 것이다. 레몬을 모르는 경우는 침이 고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단어가 우리의 몸에서 자동적으로 침이 생성되도록 만든다.
 
미디어들은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단어들을 사용한다.
자신들의 맞게 변화되기 원하는 바램들이 들어 있다.
그 변화가 우리에게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선택은 '내'가되어야 한다.
 

2013년 5월 10일 금요일

장자 응제왕 마지막장 / 혼돈 / 있는 그대로 바라보다

장자 내편 응제왕 마지막 장 혼돈의 죽음으로써 끝을 맺는다.
장자의 시작은 대붕의 비상에서 시작한다.
어찌보면 시작과 끝이 상통하는 듯이 보인다.
인간은 시작과 끝을 가진다.
대붕의 좌절로서 혼돈의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남해의 임금과 북해의 임금이 중앙의 임금 '혼돈'을  찾아 온다. 
혼돈을 최선을 다해 대접을 하고, 대접을 받은 두임금은 무엇을 해줄지 찾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최선을 한다. 그러나 그 최선이 혼돈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사람은 명확히 아는 것들이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의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바른것이 무엇인지 안다. 알기 때문에 그와 반대로 하는 사람을 보면 고쳐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상대를 변화 시키고 싶은 생각을 가진다.
자신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변화시키고 싶은 욕구는 커지게 된다.
'안다'라는 것에 대해 장자는 이야기 하는것 같다.
중앙의 임금' 혼돈'에게 두 임금은 베풀고 싶다. 자신들이 아는 명확한 어떤것으로써 행한다.
만약 자신의 앎이 혼돈에게 해를 끼칠수 있다라는 생각을 했었으면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들의 앎에 의심이 없었기 때문에 혼돈을 죽음으로 내몬다.

대붕을 절대적 경지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대붕인 '나'라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장자는 모든것을 아는 '나'가 대붕이 아닐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것 같다.
내가 모든것을 아는 사람, 혹은 선택 받은 사람으로 여기는 순간 그 명확함이 '독'이 됨을
이야기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우리각자는 대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붕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것으로 자각해서도 안된다. 대붕임을 잊어야 한다.
대붕이 되기위해서 앎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앎에 머무른다면 세상에 구별을 만들고 독이 되어버린다. 그 앎을 넘어 서야한다. 장자는 앎이 필요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앎을 넘어섬을 이야기 하는것 같다.

두 임금은 앎을 넘어서지 못한다. 앎에 머물러있다. 그래서 그 앎에 절대성을 부여한다.
그 절대성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 판단의 대상을 변화시키려 한다. 자신의 기준으로
절대적 판단 기준은 질서를 요구한다.
그래서 혼돈은 죽은다. 

장자는 죽음을 통해서 대붕의 좌절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닌것 같다.
이 사건을 통해서 초월해야할 어떤 것을 이야기 한다.
그것을 찾는 것은 각자에게 맞긴다.

현존재 분석에서 정신의 혼돈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할때 발생한다고 한다.
자신이 실현해야 할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이그러 질때 마음에 혼돈이 온다고 말한다.
그 이그러짐은 관계를 통해서 발생한다.
관계속에서 한쪽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할때 문제가 생기게 된다.
절대적 기준을 가진 한쪽의 눈에는 상대는 혼돈인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혼돈을 정돈하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상대의 병을 만들어 버린다.

살다보면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이 더힘든것 같다.
가만히 지켜봐주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변해 가고
가만히 키겨봐주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화가  요청된다.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자신을 고정된 상태로 남겨버린다.
역설적이다.

빅터프랭클의 '로고테라피'도 역설이라는 방식을 택한다.

삶이란것, 한번씩 뒤집어서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을것 같다.

2013년 4월 30일 화요일

우울증과 가족 / 긍정적인 감정의 효과

어떤 사람이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때, 아마 상당기간 우울증을 앓아 왔었는데 '그것이 우울증이다 라는 것'을 확인한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상당기간 고통을 느끼다 도저히 견딜수 없어서(그것이 가족이든 본인이든) 병원에 가서 그것이 우울증이다 라는 것을 안것이라고 보아야 할것 같다.

그것이 우울증이다 라는 것을 확인할때 까지 그 주위사람들은 우울증을 가진 사람으로 대한것이 아니라 '성격이 이상한, 혹은 예민한, 부정적인, 화가 많은' 사람으로 대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그러한 성격에 대한 대처로서 무시, 설득, 강제 등의 방법을 사용했을수 있을것 같다. 이러한 대처가 소용이 없에 됨을 알았을때 병원으로 갔을 것이고, 우울증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최초의 우울증의 시작에서 우울증인지 알았을때의 간격이 넓을수도 있고, 좁을 수도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간격은 꽤 될것 같다.

그 간격에서의 대응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면 우울증의 진단이 없엇을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라는 것은 그 사이의 일반적인 대처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 실패로인해 파생하는 문제로서 갈등이 발생할수 있었을 것이다.

우울증 환자가 가지는 일반적 분노라는 감정은 이 사이에 더욱 증폭될 가능성이 높을것 같다. 누구로 인하여 증폭하였는가. 그것은 그 옆사람들로 인하여 증폭하였다 이렇게 느낄 확율이 높을것 같다.

우울증이 무서운 병인것은 이 갈등의 양상이 지독하다는데 있는것 같다.
우울증 환자도 가족에 대해서 감정이 상해있고, 가족도 우울증 환자에 대해서 감정이 일정 정도 상해 있을수 있을것 같다.

우울증환자와 가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우울이라는 것이 어렵풋하게 나마 '슬프다'라는 우울이 아님을 알것이다. 분노 불안이 우울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주위에서는 긍정적인 감정을 가져라로 위로한다.
'슬프다'라는 것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극복이 가능할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분노나 불안이 오랬동안 쌓여서 우울한 형태로 드러나는 경우는 긍정적인 감정의 접근은 잘못되 접근이 될수도 있을것 같다.

우울증이라는 말속에서 우울이 '슬프다'를 의미하지 않을수 있다 라는 것을 빨리 알아야 할것 같다.

2013년 4월 25일 목요일

샤마니즘 / 엘리아데 / 우울증 퇴행

4월 장사가 잘안되니 좀더 장사하는데 시간을 투자하다 보니 책을 읽고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집에 오면 저녁먹고 쓰러저 잠이 든다.

대구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새로 생겼다.
책두권을 샀다. 신화와 현실, 샤마니즘 /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책들이다.
중고서점이라서 책가격이 저렴해서 나에게는 다행이다.

정신분석을 공부하다 보니, 어느순간 부터 자연스럽게 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를 믿고 있어서 다른 종교나 신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것이 조금은 불경스러운 것은 아닌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그런생각에서 많이 탈피하고있는것 같다.

프롬이 말했던가 (확실하지는 않다.) 사람의 마음을 x-ray로 알아 볼수 있다면 거의 99%는 각자의 우상을 숭해하고 있을 것(그게 기독교인일지라도)이라고

엘리아데의 샤마니즘은 기독교인으로서 조금은 불편한 책이 될수 있을것 같다.
무당이 나오고, 무당이 되는 과정들이 나온다.
그 무당이 되는 과정에 각기 다른 신들이 나오고, 어떤 판타지가 나온다.
무당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워져야 하고, 그 새로워지는 과정이 자신이 파괴되는 과정이다.
스스로 파괴되는 죽음을 통해서 새롭게 부활하고 그 부활을 통해서 능력을 부여받는다.

현재 우리는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아주 객관적인것 같지만 우리의 문화의 틀로서 만들어진 세상이다.  엘리아데의 샤마니즘들은 각부족들이 바라본 세상들이다.
우리는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라는 당위에서 세상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그속을 살아간다.
샤마니즘은 세상을 바라보던 틀이었다. 그틀속에서 세상을 바라보았고 생활했었다.

이제 샤마니즘은 힘을 잃었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우리는 각자의 샤마니즘을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종교관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각자 외운데로 논리적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운데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 행동은 무의식적인 경우가 많다.
그 무의식에 샤머니즘은 살아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많은 우울증이나 신경증을 가진 사람들은 일정 정도의 판타지(샤마니즘적 요소)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로인한 퇴행이 발생한다.
우울증때문에 판타지가 만들어 진것이 아니라, 우리속의 판타지가 우울증에 의해서 밖으로 드러난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2013년 4월 8일 월요일

나이 40

나이 40이 되었다.
가끔 나이를 잊었는데, 40은 기억에 세겨졌다.
어색하다.

한가지 변한게 있다.
길을가다 이리저리 둘러보면 같은 길을 걸어왔었는데,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서 서있는 위치에 따라서 길은 다르게 보인다
나는 같은 길을 걷고있다고 생각해서 한번도 그 길들을 자세히 둘러 보지 않았었는데, 자세히 둘러 보니 길은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깨어나서 눈을 떠야겠다.

눈을 뜨고 살아왔지만, 눈을 감고 살아온것은 아닐까.
나이 먹었다는것에 감사하자
내일은 또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다.

2013년 4월 2일 화요일

개나 소나 다한다.

'개나 소나 다한다. '
이 말속에 남과 구별되고자 하는 욕망이 포함되어 있다.

'남과 구별되어 드러나고 싶다.'라는 말을 직접하기 어려워서 '개나 소나 다한다'라는 말로 둘러서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이말속에 자신의 욕망이 한번 뒤틀려서 드러난다.

'개나 소나 다한다.' 라고 하는 사람들을 인정해주자.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데, 내가 인정해줌으로써 그의 욕망을 조금이나만 충족해줄시 있다면, 유쾌한 것 아닐까.

2013년 3월 19일 화요일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억을 가지고있다.
그 기억들의 연결을 경험이라고 한다.

어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들이있고, 기억에서 사라진 것들이 있다.
기억에 남은 것들이 경험이 된다.
어떤 것들이 기억에 남을까.
나에게 의미 있는 사실들만 기억에 남는다.

나는 어떤 대상(사물이든, 사람이든, 생각이든)을 만난다.
그 대상들중에 의미있는 것들만이 기억으로 남게된다.
그 기억들을 경험이라고 한다.
경험은 나의 의미의 역사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사람은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 가야 할지를 배우게 된다.
생존과 관련된 것들은 기본적으로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대부분은 부모님이나 학교를 통해서 의미있는 것들을 배우게 된다.
배움을 통해서 의미를 알게 되고, 그러한 의미들이 나의 경험을 이룬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가면서.. 그러한 의미들이 진정 내가 추구하는 의미인가를 묻게되는 시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 시점에 내가 경험하는 것들이, 내가 추구해야할 진정한 의미가 아닌경우... 지나간 경험들 조차도 무의미하게 되는 시점이 온다.

제도나 규율로서 강제되어지는 의미들은 사회생활에서는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러한 의미들을 거부할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만이 추구해야할 의미들도 존재한다.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무의미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간다.
세상의 의미에서 나의 의미로 전환이 이루어 지는 시점, 불안이 다가온다.
세상의 의미는 나의 책임에서 벗어나지만, 나의 의미의 추구는 나의 책임으로 가다 오기 때문이다.

이시점 불안이 찾아 온다. 나의 존재의 무의미를 느끼는 순간...
세상에는 많은 불안들이 있지만, 이때 찾아 오는 불안이 실존(내가존재하는 이유에서오는)적인 불안이 된다.
우리는 이 불안을 거부할수 있다. 불안을 잊기 위해서 세상은 나에게 많은 것을 제공해 준다.
세상에서 제공해주는 의미를 잡기만 하면 불안에서 탈출 할수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공해주는 의미만으로는 부족한다.
의미가 경험을 이루고, 나의 역사를 이룬다.
그러면 세상이 제공해주는 의미만이 나의 역사를 이룬다면, 나의 역사는 나의 것이 되지 못한다.

무의미를 만난다.
불안해진다.
우리는 그불안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노력해서는 안된다.
그불안에 맞서서 그불안에 나에게 가르키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불안은 나의 의미, 나의 역사를 시작하는 방향을 알려준다.
무의미라는 것은 의미의 시작이다.
무의미를 회피하면 무의미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무의미한 나의 역사...

무의미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나에게 의미의 방향을 알려주는 성장통이다.

무의미 때문에 삶을 중지해서는 안된다.
무의미가 고통스럽더라도...
그 고통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일깨우는 어떤 것이다.
새로운 삶은 거기서 시작한다.

2013년 3월 18일 월요일

나를 찾아서...찾기 시작하면 찾을수 없다.

'나를 찾는다' 이말속에 '나'라는 존재가 현재의 나와는 다르게 어딘가 존재해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
내가 찾는 '나'라는 존재는  뭔가 이상적인 것을 알고 있고, 완벽한 존재인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찾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를 찾는다고 시작할때 우리는 사색을 시작한다.
머리로서 나를 찾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생각하고 있는 내가 '나'인데,  지금의 내가 '나'가 아니라면 누가 나인것일까.
지금은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고 진정한 '나'는 따로 있다고 말할수 있을것 같다.
나는 분리 되어 존재하는 것인가.
내가 '나'를 찾기 시작하면 나는 나로 부터 분리 시키기 시작한다.
찾는 대상이 되는 '나'와 찾고 있는'나'로 분리 된다.
내가 찾고 있는 동안는 나는 완전한 나를 찾을수 없다.
왜냐 분리되어 있는 반쪽의 나밖에는 발견할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이 우리를 성숙시킨다 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생각한다'라는 단어에 주목을 해야한다.
생각하는 것이다.
화장실 휴지가 없이 1주일을 살아야 한다면, 불평이 나올것이고, 이것을 못참는 사람도 나올것 이다. 나도 이미 휴지에 적응해 버려서 나뭇잎이나 신문지등을 사용하는것은 생각할수도 없다.
고난이 나를 성장시킨다고 하지만, 휴지없이 1주일을 보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런 고난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는 성숙시키는 고난이 아니라고 여길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의 현실과 몸으로 느끼는 현실은 항상 다르다.

내가 발견하고자 하는 '나'라는 존재는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이상적인 존재인것 같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휴지도 없으면 불편을 느끼는 '나'이다.
뭐가 진짜 나인가.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가 진짜라고 믿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를 바라 보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나'는 불편함에 불평하는 '나'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와 현실에서 적응된 '나'와의 차이가 너무 커지면 분열이 일어나고, 그 분열은 정신분열이 되거나 우울증이 될수도있다.

그러면 나는 찾는 것은 필요 없는 것일까.
나를 찾아야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행동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나'인것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나'는 분리된 나이기 때문에 그 '나'는 반쪽의 '나'밖에 될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나를 발견 할수 있을까.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순간 내가 지금여기서 발견하는 '나'는  내가 모른다라는 것을 아는 순간이 온다. 그때 자신이 뚜렷히 보이게될것 같다.
내가 발견하는 것은 '부족한 나'가 아닐까.
나의 발견은 나의 완성이 아니라, 내가 모른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처음이지 않을까.


















2013년 3월 13일 수요일

인생은 편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사무실에 앉아있다.
밖은 비소리인지 차소리인지 분간이 안되는 소리가 들린다.
형광들 불빛과 컴퓨터 모니터 두개에서 나오는 불빛이 태양을 대신하고 있다.
오늘은 태양이 힘을 잃어, 이 두개의 불빛이 나의 시야를 밝혀준다.

점심을 먹었고, 조금은 나른하고 조금은 잠에 취해 있다.

일을 보러 밖에 나가야 하는데, 조금 지체 하다... 30분이 흘렀다.

마이크를 주문했다. 글을 이야기로 해보려고 하는데...
어제 내가 내목소리를 듣고 기가 막히더라.
너무 익숙한 내 목소리가... 내목소리인지 분간이 안될정도로...

'인생은 편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이말이 내 가슴에 들어왔다.
나를 둘러싼 어떤 것이든 내가 감당해보자.
쓰러지면 쓰러지는데로... 아프면 아픈데로..

2013년 3월 11일 월요일

숨쉬기 너무나 익숙한것...

숨을 쉰다.
대부분의 시간, 나는 내가 숨쉬고 있다라는 사실을 망각한체 살아 간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굳이 의식을 하지않고 숨을 쉰다.
'나는 매순간 내가 숨쉬는 것을 의식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을 뭐라고 할까.
그러한 의식은 다른 삶을 방해한다. 바쁘게 살아 가는 세상에서 그만큼 뒤처친다.

'내가 숨쉬는 것을 의식하는것' 이것이 명상이라고 한다.
내가 '나인 것의자각'의 시작을 숨쉬는 것 부터 시작한다.
그 시작이 숨쉬는 것을 의식하면서 시작하는 것은 숨쉬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인것 같다.

3월이 왔다. 나의 계획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들은 뒤로 밀린다.
언제나 특별한 무엇인가를 찾는다.
숨쉬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숨쉬는 것을 의식하지 않은체 살아 가듯이, 나도 중요한, 너무 익숙한것을 가장 뒤로 미루면서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2013년 2월 28일 목요일

들국화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것만이 내세상을 위해 사노라면

중학교 때 들국화 테이프를 하나 샀었다.
테이프가 늘어 질때 까지 듣고 들었다.
노래는 전인권이 제일 잘하는줄 알았었다.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
가사의 내용도 잘 몰랐고, 세상도 몰랐던 시절
시간이 가면 세상이 좋아 진다고 생각했던 그런 시절, 들국화노래를 들었었다.
'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날도 날이 새면... 내일은 해가 뜬다'
언제나 해가 뜨고, 삶이란 버터내면 밝은 날이 온다고 믿었던, 그러나 인생도 모르면서 

이제 삶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쳐 가는데,
낮이 지나면 밤이 온다는 사실도 깨쳐간다.
그리고 나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과도 마주한다.

그래도 그들의 노래가 좋다.
이제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 눈이 촉촉해진다.
 ' 그것만이 내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나를 둘러싼 더이상 물러설수 없는 상황속에서...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스트레스와 면역기능의 관계에 대해서..

"신체의 면역체계는 신체의 어느 곳이든 널리 퍼져있는 병원균의 산발적인 공격을 대개 우리가 알아차릴수 없는 가운데에도 훌륭하게 막아낸다. 그러나 큰 공격을 당할 때에는 면역 체계가 격렬하게 반응해서 병원체뿐만 아니라 몸 자체도 위험에 빠뜨릴수 있다.
.....
때문에 몸에 면역체계의 움직임을 제어할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
면역반응과 염증반응을 억제하기 위한 이 호르몬이 바로 신체자생의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졸이다." - 몸의기억  중

스트레스와 면역체계의 사이클
   - 스트레스체계가 활성화 되면 면역체계는 약화된다.

스트레스축의 활성화 : 새벽 4시와 6시 사이 , 오후 4시쯤 /
면역체계의 기본 활동 : 스트레스축와 활성화와 정반대가 된다.(건강한 사람의 경우)

면역체계와 코르티졸 사이에서 일주기 리듬에서의 속도
    - 태양 혹은 빛의 흐름
    - 사회적 원인

" 만약 스트레스 축(스트레스 호르몬 크로티졸을 포함한)과 면역체계사이의 균형이 깨진다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해결할수 없는 인간관계의 문제, 만성피로, 우울질환으로 뇌 안에 핵심 스트레스 유전자 CRH가 활성화 되고, CRH의 활성화로 코르티졸이 증가한다.
그 결과 면역체계는 감염을 막거나 상처를 극복하는데 방해를 받는다." - 몸의기억  중


스트레스란 몸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과대한 스트레스는 면역 기능을 저하 시킨다. 면역기능을 깨지 않을 정도의 스트레스는 필요한것 같다.
그정도라는 것이 먹는것, 자는것, 화장실 가는것을 심각하게 방해하지 않는 수준의 스트레스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우울증의 원인 / 현상학적 접근 /

'하다', '하고싶다', '해야한다'
'하다'라는 말은 상태를 나타낸다.
'하고싶다'라는 말은 욕망을 나타낸다.
'해야한다'라는 말은 의무를 나타낸다.

현재 내의 외면적 상태는 '하다'라는 표현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하다'라는 것은 '하고싶다'혹은 '해야한다'의 드러남이다.

'하고싶다'라는 욕망은 '해야한다'라는 것으로 제약된다.
즉 하고 싶은 것은 해야하는 것과 반되가 될때, 제약되어야 하는 것으로 '하고싶다'라고 해서 다 할수 있는것은 아니다.
'해야한다'라는 것은 '하고 싶다'라는 것을 제약하지만, 제약되 되지 않을때가 있다.

'하고 싶다'이것은 감성적인것이라고 할수 있고, '해야한다'라는 것은 이성적이라고 할수있다.
- 사실 정확하게 이렇게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어린시절 엄격한 부모님에 의해서 '하고싶은것'들이 해야만 하는 것에 의해 제약된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모든것을 다해주는 부모님에 의해서 '해야만 하는 것'들이 제거 되어지고 하고 싶은 것들만 해온 사람들이 있다.
이상태로만 지속되어 진다면 아무문제가 없다.
그러나 삶은 마디를 가지면서 새로운 상황에 접하게 된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사람을 만나고, 하기 싫은 것들도 해야만 하는 상황과 부딛친다.

'하다'라는 상태는 밖에서 보면 동일하다.
그러나 그 '하다'라는 것이 욕망의 조절일수 있다.
그리고 그 '하다'라는 것디 욕망의 실현일수도 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욕망의 좌절을 이성적으로 깨달앗을때 문제가 발생된다.
'해야한다'로만 살아온 사람이 '하고싶다'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을때 '해야한다'라는 것이 좌절로 인색되고, '하고싶다'라는 것만 하는 사람들이 세상과 마주쳐서 살아가면서 하는것이 '해야한다' 라는 것이 될때 문제 상황이 된다.

모든 우울증을 설명할수 없지만 어떤 우울증은 욕망의 좌절과 관련 있을것 같다.
모든 겉으로 드러나는 '하다'는 동일하지만, 그속에 숨어있는 원인 '하고싶다''해야한다'의 모습은 달리 한다.

자신이 해오던것을이 해야만 하는 것들임을 깨달은 사람, 자신이 마주치는 상황이 해야만 하는 것들인 상황...

한쪽은 가족속으로 들어 갈수 없고, 한쪽은 밖으로 나올수 없다.
'안과 밖' 에서 자유로와야 하는데 한쪽만 자유롭다.
어느 일부분만이 자유로운 상태 이것이 우울증의 상태인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우울증 이있는 사람에게 운동해라, 밖에 나가라 좋은 처방인것 같다.
운동하는 현상, 밖에 나가는 현상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속에 '해야한다'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그것을 받아 들이는 우울증상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비하하는 것일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울증이 걸려 나가지 않는 이유가 '해야한다'라는 것에서 유발된것이므로,
운동하는 것이 좋고, 밖에 나가는것이 좋지만, 더욱 상처를 입히는 말이 되는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제 우울증 치료에서 '긍정정 감정을 가져라''운동해라' '밖에나가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초기 치료에서 실수를 하는 것들중하나라고 한다.




스스로의 제약속에 빠져 있다.

컴퓨터를 50만원 예산으로 최적화되는 제품을 구매하려는 사람이 있다.
컴퓨터를 100만원 예산으로 최적화되는 제품을 구매하려는 사람이 있다.
컴퓨터를 1000만원 예산으로 최적화되는 제품을 구매하려는 사람이 있다.

세사람중에 누가 컴퓨터의 기능을 가장잘 구현할것인가.
50만원의 예산에서 최적의 상태를 내는 컴퓨터는 100만원의 예산으로보면 아주 형편없는 컴퓨터일수 있다. 1000만원의 예산에서 본다면 100만원짜리도 형편없는 것이다.
예산의 제약이 없다고 한다면 1000만원의 예산으로 최적화 된 컴퓨터가 가장 컴퓨터의 기능을 잘 구현할것이다.

설날에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50만원이라는 예산에 최적화 된 컴퓨터를 찾고 있는것은 아닌지..
더 넓게도 볼수 있지만, 나의 조건에 한계되어져서 스스로 50만원 컴퓨터의 삶을 살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불안감이 들었다.
나에게 필요한 컴퓨터의 성능자체를 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의 50만원의 예산속으로 유폐시키고 살아 가고 있는것은 아닌가?
삶자체를 보면서 살아 가야하는데, 내가 가진 제약조건 속에서 삶을 바라 보기 때문에 내가 바라 보는 삶자체가 그만큼 좁혀져 있는 것은 아닐까.?
50만원에 마추어 컴퓨터의 기능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기능에 맞추어 예산을 더 확보해야 하는건데, 나에게 주어진 제약조건에 맞추어 내가 추구해야하는 삶을 나의 제약조건으로 축소시키면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좀더 넓게 보지 못하면, 나의 삶이란 내 스스로 축소시켜버린 것이라는 기분속에서 설을 보낸다.   

2013년 2월 7일 목요일

다함께 차차차 A Class -> S Class 업그레이드 총비용

다함께 차차차  A Class를  S Class로 업그레이드 비용
---
A Class -> S Class : 60000
1레벨 업그레이드 : 9000
2레벨 업그레이드 : 12000
3레벨 업그레이드 : 18000
---
총비용 : 177,000 = 60000+ 27000(9000x3) + 36000(12000x3) + 54000(12000x3)
---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전체업그레이드가 어려울것 같다.

기록에 집착하지 말고... 시간날때 잠깐 즐기는 게임으로 접근해야 정신건강이 도움이 될것 같다.

다함께 차차차 2월7일 업데이트 내용 / 해미 S Class 로 변신 /

지겨워서 다함께 차차차를 하지 않으려 했는데
아침에 보니 업데이트가 되었다.
설날 짜투리시간을 점령하기위한 게임사간의 경쟁이 본격 시작된것 같다.

A Class 로보카폴리 시리즈 3종(각 트로피 60개)이 추가되었고,
S Class 로 마타도르(트로피 120개)가 추가 되었다.
4 종류의 차종의 구매가 트로피로만 가능하다고 나온다. (현재까지)
그리고 기존의 A Class의 차종을 S Class로 업그레이드 가능하다.
A Class -> S Class 업그레이드 금액은 60000
그리고 세부 업그레이드 1단계 9000,
2단계 12000 이고
3단계는 아직 확인을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모아놓은 73000 동전으로 어떤 차종을 업그레이드 할까 생각중이었다.
가능한 차종은 아니마,해미, 브레이커, 매거넘
선택의 기로에서 로보카폴리가 무게가 중심으로 된것 같아서 이번 업데이트의 중심이 무게가 아닐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해미를 S 클래서로 업데이트 했다.
해미의 색상이 흰색으로 바뀐다.
연비를 1단계 업데이트 하고나서 게임을 시작해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놓아 두었는데 55000점이 나온다.
두번째는 58000점에 390동전이 모인다.
아니마를 업데이트 했어야 하는것을 아닐까. 아쉬움이 남지만... 60000 동전은 너무 커서 한동안 업데이트 할수 없을것 같다.
결국 돈이 점수를 만드는 구조다.

지겨워서 안하려고 했는데, 다시 업데이트해서 확인해보려고 하는 욕구가 꿈틀거린다.
일을 해야 하는데... 게임하고 업데이트 하고, 이글을 쓰면서 30~40분을 날린다.

2013년 2월 5일 화요일

다함께 차차차 이제 지겨워진다. 이제부터 윈드러너 ...

다함께 차차차라는 오락이 지겨워 지기 시작한다.
새로운 자동차가 등장하고 점수계산법이 달라 지는 변화가 있었다.
동일한 방법으로 게임이 수행된다
'차차'라는 추월하는 방식으로만 점수를 높일수 있다.
그래서 높은 점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겨워진다.
반복 숙달은 언제나 지겨운 법이다.
2개월이면 완전히 지겨워지는 오락을 반복 숙달한 사람은 많지 않을것 같다.

얼마전 차차차 개선이 있었는데, 돈으로 점수를 사는 방식으로 개선된것 같다.
돈이 없으면 일정수준 이상의 점수를 낼수 없다.
이것이 게임의 한계 상황이다.
반복 숙달해서 점수를 올릴것인가. 캐릭터를 사서 점수를 올릴것인다. 아니면 다른게임으로 전환할 것인가.
나는 윈드러너로 전환했다.

게임어에게 새로운것(작은 노력으로 좀더멀리가도록 하는것)을 추가하지 못하면 드레곤 플라이트처럼 될것 같다.

요즈음은 다함께 차차차 하루에 한번도 안하는 날이 늘어 간다.

얼마전에 큰 도전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보기 시작했다.
다함께 차차차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보다 더 지겨워 지는것 같다.

인간이 무의미에 직면하면 한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게임도 무의미(재미없음)의 한계상황에 가까이 가고 있는것 같다.

2013년 1월 26일 토요일

다함께 차차차 아니마 부스터사용의 무용성 /고급휘발유가 효과적

부스터가 생각보다 필요없는 아이템인것 같다.
고급휘발유 사용시와 부스터 사용시 첫레이스를 비교해보았다. (아니마 AClass 풀업시) ---
1. 부스터 사용시(동전800개) -
       연료( 두번째 레이스 시작시): 가득참
       점수 : 9700점
2. 고급휘발유 사용시(동전 900개) - 물음표 상자 부스터 1개 먹음 (첫레이스에서 부스터 항상 나옴)
       연료( 두번째 레이스 시작시): 가득참
       점수 : 8100~8700점 (차차를 1~3회 함) 차차를 많이 하면 점수가 더 높아 질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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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비교에서 부스터와 고급휘발유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 부스터 효과 거의 없음.
점수 1000점 정도 더나올수 있음.

부스트를 사는 것보다 동전 100개 더주고 고급휘발유가 효과 적임



- 시험조건
1. 부스터 1회 사용테스트
2. 고급휘발유 2회 테스트
  -> 총 3회 테스트이기 때문에 대수의 법칙이 적용안됨. 개인적 테스티이기 때문에 일반화가 곤란함
 ->차종에 따라서 시험결과는 달라 질수 있음

다함께 차차차 아니마 업그레이드시 다른 차종과 비교 풀업

몇일 간의 해미를 통한 자동 돈벌기를 상용해서 아니마를 B Class에서 A Class 로 업그레이드 하고 A Class 아니마의 모든 업그레이드를 완성했다.
버튼 몇번 누르고 할일을 하고 하면 되니까. 눈이 빨게가지고 노가다 할필요도 없고...

하이튼 아니마를 A Class 풀업을 했을때 다른 차종의 최고점수를 한번 비교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나의 경우이다.)

<조건>
 1. 나이가 들어 차차를 잘 하지 못한다. 차차를 하려고 시도하면 부딪치는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점수가 나지 않는다. 차차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 두가지 경우에 한정하는 때가 많다.
      -> 어떨수 없이 추월해야 할때,
      -> 그림자를 먹었을 경우, 그냥 앞에 차와 부딪친다. 그림자를 먹으면 부딛쳐도 차차로 인정해준다.  물음표 박스(그림자)를 먹고 앞에 차가 쭉 오고 있으면 대박이다.
 2. 동전을 먹으려고 노력 하지 않는다(기록을 달성하려고 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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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커 :
   1. 최고 점수 36만점
   2. 사용아이템 :  비상연료, 부스터, 터보(5개) ,물소 원샷, 고급휘발유, 공구상자(비상연로)
매그넘 :
   1. 최고 점수 38만점
   2. 사용아이템 :  비상연료, 부스터, 터보(5개),물소 원샷 ,고급휘발유, 공구상자(비상연로)
해미 :
   1. 최고 점수 33만점
   2. 사용아이템 :  비상연료, 부스터, 터보(5개),물소 원샷 ,고급휘발유, 공구상자(비상연로)
아니마 :
   1. 최고 점수 67만점(아무 아이템을 안써도 24만점 까지 나왔음)
   2. 사용아이템 :  비상연료,  터보(2개) ,고급휘발유, 공구상자(비상연로) -> 터보나 물소원샷을 추가 구매시 점수가 더 나올수도 있을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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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하는 감각이 떨어지는 경우 아니마의 속도정도면 앞의 차를 피할수 있어서 부딛치는 사고를 방지할수 있는것 같다.
차차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점수가 안나오기 때문에 무조건 멀리간다는 생각으로 해야 점수가 올라 가는듯 하다. 그리고 차차 숫자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아도 상황에 따라서 앞차를 피하려고 하는 것이 차차가 되는 경우가 많고,의도적으로 하는 차차의 숫자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것 같다
차차의 경우 연속 차차의 경우만 점수가 높지만 나처럼 순발력이 떨어지는 경우는  차차를 30번(연속차차가 안되는경우) 더한다고 해서 ( 9000점=30회 x 300(차차 1회당 점수가 확실치 않음 ) 최종 점수에는 지장이 없는것 같다.

그러나 물음표 박스가 그림자인경우는 최대한 다른 차들과 부딛쳐서 차차를 만들어야 한다.
순발력이 떨어 져도 앞차와 부딛치는것은 다른 경우보다 쉬운것 같다. 이경우 연속 차차가 되기 때문에 점수는 엄청 올라가는것 같다.

사용해본 결과 아니마 AClass 풀업한 경우가 다른 차종보다 점수가 최고로 나오는 것 같다.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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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가 되는 차종은 계속 변해 가는것 같다. 어떤 차종이 대세가 되면 게임사에서 차량 성능의 미세조정을 통해서 밸런스를 조정하는것 같다.
아니마의 경우도 지금은 점수가 잘나오는데 다음번 업데이트시 밸런스 조정이 일어날것 같다. 그래야 게임어들이 다른 차량을 사게 되니까. 다른 차량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고 그래야 게임사가 돈을 벌기 때문이다.
내가 할수 있는 방법은 최고 점수를 한번낼때 상점에서 아이템을 사고 나머지는 돈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지 다음번 대세가 되는 차종이 등장할때 바로 구입해서 풀업 할수 있다.
규칙은 게임사가 만들고, 게임어는 게임규칙에 종속되어 있어서 한가지에 올인하면 규칙이 변경되면 패닉이다. 규칙은 게임사 마음대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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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5일 금요일

다함께 차차차 돈모으기 해미 자동 돈벌기

요즈음 다함께 차차차 라는 스마트폰 오락에 빠져 있다.
점수를 많이 내는 재미로 하는데, 점수를 많이 내기 위해서는 동전을  모아야 한다.
고급휘발유 900
부스터 800
터보 5개 1500
공구상자 600
물소원샷 1000
비상연료 1500
총 5500

동전 = 게임기록

기록을 세우기 위해서는 한번에 5500의 동전이 필요하다.
편하게 동전을 모으는 방법을 나름대로 통계적으로 분석해보았다.
  (간단한 통계이므로 상관관계는 낮을것 같다.)

 게임시작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많히 놓아 둔다.
  준비하기-> 게임시작 : 2분에 한번씩 버튼 2번 누른다. ( 나머지 시간에는 그냥 할일을 하면 된다. )

1. 차종 : 해미 A Class (풀 업그레이드)
2. 캐릭터 : Sarah Cha (자석으로 동전을 당김)
3. 실행방법 : 준비하기-> 게임시작 ( 이렇게 누르고 아무것도 안함) 중앙차선 유지
  -> 중앙차선 유지이유 :
        Sarah Cha의 경우 중앙차선에서는 양쪽 동전을 다먹음 / 놓치는 동전이 없음
4. 테스트 횟수 : 10회
5. 한 게임당 시간 : 평균 1분 54초 ( 최소 1분 47초 ~최대 2분 17초 소요)
6. 한 게임당 동전 획득 : 평균  268 ( 최소 183개 ~ 최대 341개)
7. 6회 기준 게임 소요 시간과 동전 획득  (타이어가 6개 주어지므로) -> 12분 / 1608개
8. 실제 게임에 투자하는 시간(회당) : 2초 (준비하기 버튼 누르기 + 게임시작 버튼 누르기)
9. 하루 7세트 실행시 동전획득 : 11256 = 268 x 6 x 7
10. 하루 동전 11256개 획득을 위한 투자 시간 : 84초 = 2 x 6 x 7 (게임 실행 시간 제외)

기타 (동일한 방법 / 버튼 두번 누르고 아무것도 안함)
브레이커(풀업) 태스트 결과 (6회 테스트 결과)
  -> 해미의 경우 보다 회당 평균 동전 약30개 적게 모임
 메그넘(풀업)(2회)
  -> 브레이커의 경우 보다 회당 평균 동전 20~30개 적게 모임
아니마 (B Class 풀업)
 -> 회당 동전 101개 , 199개, 159개  / 3회 테스트 함

동전을 획득하는 변수 (해미기준)
1. 물음표상자 : 파괴부스터가 중앙차선에서 걸리는 횟수
    -> 10회 기준 평균 7회 정도 1번 이상의 파괴부스터 물음표 상자 획득
2. 동전과 골드바 / 각실행시 마다 얻을수 있는 갯수가 다른것 같음
   -> 동일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동전 획득에 차이가 남 (중앙차선을 유지시 모든 동전과 골드를 먹기 때문에 각판마다 동전이 다르게 나온다고 불수 있음)
3. 물음표 상자 : 일회용 범퍼 / 그림자 획득시 더 멀리 갈수 있음
4. 중앙차선에서 부딪치는 차량의수 & 차량의 종류 (트럭이나 버스의 경우 지체시간증가)
5. 중간에 전화가 오면 게임을 중단해야함.

해미 자동돈벌기 사용시 장점
1. 게임중독에서 탈피
2. 동전량에 따라서 기록 달성 & 차량구입 업그레이드 가능
   -> 현재 해미/브레이커/메그넘 -> 풀업
  -> 기타 다른 B Class 차량을 보유
  현재 동전수 : 25000개
3. 일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음
4. 2일 이면 20000짜리 A Class 자동차를 구매할수 있다.
5. 하루에 2번 기록 갱신을 도전할수 있다. ( 회당 풀아이템 5500동전 사용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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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너무 진지한 글만 올린것 같아서 가벼운 내용을 한번 올려봅니다.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기도는 철저히 개인적이어야 한다.

'믿는다'라는 단어에대해서 항상생각하게 된다.
믿음은 항상 부족하다. 내주위의 모든것에대한 믿음들이 항상부족하다.

기독교에서의 믿음의 행위는 기도로 통하는 것같다.
타인을 위한 기도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철저히 자신을 위한 기도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고선 기도는 허위가 될수 있다고 여겨진다.
나만의 생각일수 있지만, 철저히 자신의 문제가 아니고선 진실한 기도가 이루어 질수 없다고 여겨진다.

나와 떨어진 타인을 위함이란 관념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와 내가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고통이 나와는 별개의 것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진정한것이 되는 것인가.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나의 고통이다.
나가 그(녀)의 고통을 보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의 고통과 그(녀)의 고통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녀)가 아프다. 나는 그 아픈 모습을 보면서 고통을 느낀다. 내가 느끼는 그 고통이 나의 문제로 다가온다. 그(녀)의 아픔은 그(녀)의 아픔이기도 하지만 나의 아픔이기도 하다.
그 아픔속에서 기도는 진실성을 가진다.
우리는 옆사람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옆사람을 위한 기도는 허구이다.
그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그 고통이 내가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아픔은 옆사람에서 시작 되었지만, 그 아픔이 나의 문제로 다가 올때 기도는 진실해 진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를 한다. 그 속에 나의 아픔이 없다면, 가난한 사람에게 거만한 모습으로 한푼을 던져주는 부자와 다를바 없다.
기도는 철저히 나의 문제여야 한다. 나의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 오는 것이 사랑이다.
나와 너가 분리 되어서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할때 그것은 사랑이 아닌것이 된다.
그것은 관념이다.
내가 누군가을 위해서 기도할때 상대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관념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내가 분리되어 존재할수록 나의 고통은 줄어 든다.
내가 아픈 어머니를 왜면할수 있다면 그만큼 물리적으로 자유롭다.
내가 아픈 어머니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고통스럽다.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속으로 들어 간다.
기꺼히 그 고통속으로 들어 간다.
그 고통속에 신의 은총이 존재한다.
그속에 영원한 자유가 있다.

나는 그 고통속에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믿음은 나에게 어려운 숙제이다.
나의 기도는 항상 분리되어 있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한발자국 고통속을 기꺼히 들어 갈수 있어야 하는데...


2013년 1월 19일 토요일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은 어찌보면 선한 사람들이다

사람 각자는 각자의 모습으로 살아 간다.
보여 지는 모습 그것이 자신이다.
각자는 어떻게 보여지길 원한다.
누군가를 만날때, 내가 보여졌으면 하는 모습으로 변신을 한다.
옷도 갈아 입고, 만나는 대상에 따라서 내 감정또한 앞의 대상에 따라서 변한다.
내가 가진 감정(분노,  불안, 의심..) 과 욕망을 앞의 대상에 그대로 드러낼수 없다.
내가 보여질 원한다는 것은 문화, 법률, 예절 등의 형식을 기준으로 만들어 진다.
진솔하게 보여 줄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혼자있는 공간에서의 행동과 여럿이 있는 공간에서의 행동은 달라질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잘 느낄 수는 없다.
문화, 예절등을 공기와 같아서 그속에 있는 사람은 그대로 적응을 하기 때문에 그것에 맞추어 살아 간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그래서 변신은 당연한 것이 된다.
어떤 공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공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
이것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으면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바람직 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원하는 것의 차이가 커질때 문제가 된다.
"어떠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할때 그 사람이 그 모습으로 보여 줄수 없을때 문제가 된다.
혹은 자신이 보여지는 모습속에서 가식을 느끼던가, 죄책감을 느낄때도 문제가 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의 모습의 차이가 커질때 문제가 발생하고, 자신이 원하는 욕망과 그 욕망속에서 죄책감을 느낄때 마음의 문제가 될수 있다.

우울증은 두가지 속성을 가진다고 한다. 하나는 분노이고, 하나는 죄책감이다.

대상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보여 줄필요가 없다.
그러나 삶은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어떻게 보여줄 필요가 생기게 된다.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은 어찌보면 선한 사람들이다. 자신을 보여지는 모습을 판단하는 기준이 엄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죄책감이 더많이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어떤 분노를 타인에게 쏱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쏟아내는 사람들이다.
우울증에 걸리기까지 이렇게 살아온 분들이다.
그러나 울울증이 발생하면 성격은 다르게 보여진다.
도저히 견딜수 없었기 때문에 분노가 밖으로 드러나는 경우라고 볼수 있을것 같다.
드러나면 안되는 분노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최책감을 느끼게 된다.

우울증은 누구의 문제로 발생되는 걸까. 우리는 본인의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본인의 문제로 인해 만들어진 병이 아니라 그 우울증이 걸린 사람과 관계있는 모든 사람의 문제가 우울증이 거린 사람에게로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본인만의 문제라면 본인혼자 해결할수 있다.
그러나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혹은 그녀)와 관계된 모든 사람이 변하지 않은면 해결이 어려운 것이다.

2013년 1월 18일 금요일

바쁜 하루가 시작되었다.

바쁜 하루가 시작되었다.
시간 시간이 날때 마다 경험의 공유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 해보아야 겠다.
일도 해야 하고, 오락도 해야하고, 밥도 먹야하고, 사람도 만나야 하고...
하루에 수십가지 할일이있다. 그러나 사이사이 시간이 남는다.
무엇인가 큰것을 할시간은 없는데, 사이사이 10~30분 짜투리시간이 남는다.
가만히 있어도 잡생각이 나는데... 주제를 정해서 생각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것 같다.

날씨가 춥다.
밖에 나가면 손이 시리고, 발이 시리다

2013년 1월 14일 월요일

성경 믿음 판단

성경은 상대의 믿음을 판단하기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확인 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을 강조하는 것이 위험한 것은 그 강조가 상대의 믿음을 판단하는데 쓰인다는 것이다.
나의 믿음을 누군가 판단하려고 한다면, 나는 싫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믿음을 판단하려고 한다.
이 오류에서 벋어나지 못하는 이상 나의 믿음에는 일정의 잘못을 포함하고 있다.

2013년 1월 2일 수요일

축북이라는 이름의 삶의 보자기

새로운 한해를 맞이 했다.
어제와 별반 달라진것은 없는데, TV는 하루종일 새해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뭔가 새롭게 시작할 기점이 있다라는 것은 좋은것 같다.
그러나 나를 보면 별반 달라질것은 별로 없다.

작년 한해동안 심리학(정신분석)을 개별적으로 공부하려고 했는데 책만 샀던것 같다.
책으로 보면 전문가 수준이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도 부족하고, 혼자하는 공부라서 뒤죽박죽이다. 작년 말까지 목표가 한정된 분야지만 나의 관점을 mp3로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계획 만 있었다. 막상 하려고 하니까 내가 알던걸로는 부족하고 폭을 더 넗힐 필요가 있었던것 같다. 올해 상반기 까지는 이목표의 첫단추라도 끼어야 할것 같다.
문제는 영어가 딸린다는 거다. 최신 정보는 영어로 나오는데 그게 번역 되어 나오기까지는 몇년이 걸리는 것 같다. 듣기가 안되고 읽기도 안되고... 편하게 공부해보려고 한글로 된 책만을 읽었더니,  하이튼 이제부터라도 영어로 된 자료도 조금씩 읽어야 겠다.

낮에는 장사를 해야 하니까. 시간이 나는 데로 커피숍에 가야겠다.
책보기에는 커피숍이 최고다. 나이 먹고 대낮에 커피숍에서 혼자 책보고 있으면 사람들의 시선은 딱히 할일없는 백수로 보이지만.....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에 대해서 잊은지 오래다.

삶이 나에게 주어 졌다. 그것이 나에게 축복이다.
축복은 나에게 의미를 묻는다.
나는 내 인생을 가득 채워야 한다.
축복은 나에게 내인생을 의미로 가득 채우기를 바라며
삶을 준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