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9일 목요일

감정의 평정심이 뇌의 작용을 안정시키지 않을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몰입해 있을때 '미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한다.
당구에 미치다. 바둑에 미치다. 영어에 미치다. 수영에 미치다. 사랑에 미치다.
정신이 이상하다 라는 측면에서 '미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만 아니라 어떤대상에 대한 감정의 과잉상태 일때 '미치다'라는 단어를 상용한다.
무엇인가에 미쳤을때 바둑에 미쳤을때, 당구에 미쳤을때, 어떤 여자에 미쳤을때, 미친 대상과 비슷하게 생겼을때 비슷하게 생긴 대상이 바둑알, 바둑판으로 보이기도 하고, 당구공으로 보이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 하는 여자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으로 유추 해보면, 어떤 대상에 대해서 감정이 과잉일때, 우리의 시각은 실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인식을 하기도 한다고 생각해볼수 있다.

현제 밝혀진 바로는(어디서 보았느데 어디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는 대상은 사진처럼 있는 대상이 그대로 뇌에 세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진처럼 세겨진 정보가 뇌로 보내진다고 한다. 그 정보의 전달 과정에서 그 정보들은 실제 보는 것과 다르게 왜곡이 되어질수도 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이 정확한지는 알수 없다. 사람이 본 것을 그대로 스크린으로 나타낼수 없기 때문에 여러 실험을 통해서 이러한 가설이 시각에 관해서 많을 부분을 설명을 해주기 때문 지지를 받지는지도 모를일이다.)

실제로 본것과 뇌가 인식한것이 감정 상태에 따라서 보는 것이 왜곡이 생길수 있으므로 눈으로 본것이 뇌로 전달될때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구에 미쳐 있으면 어떤 대상이 당구공으로 보이는것이 우리가 보는 시각이 뇌로 전달될때 당구에 미쳐있다라는 감정에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될수 있을것 같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할수 있다.

무엇인가에 미쳐 있을때, 감정이 대상에 집중해있을 때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닐수도 있다.
그 감정의 집중이 불안 일수도 있고, 공포일수도 있고, 슬픔일수도 있다.
그리고 잘못 본 것이 더울 두렵게 슬프게 불안하게 만들수 있을 것 같다.

잘못 본다라는 것이 지속되어 질때 이것은 문제로 느껴질수 있는데, 그원인은 과도한 감정의 집중이 계속 되고 있다라고 할수 있을것같다. 풀리지 못한 감정의 상태의 지속때문이지 않을까.
잠을 자면 꿈을 꾸는데, 눈과 귀가 작용을 하지 않고있어도 꿈속에서 보고 듣고 한다. 뇌에서 그림을 만들어 내는데, 그 꿈은 자신의 무의식적 감정의 상태에 따라서 악몽을 꾸기도 하고 길몽을 꾸기도한다.

우리 조상들이 항상 평정심을 강조 했는데, 감정의 평정심이 뇌의 정상작용을 도와서 세상을 바로 볼수 있게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2012년 1월 17일 화요일

욕망이 제약되다.

새해부터 뛰어 다니기로 했다.
가끔씩 걷기도 하면서 뛰기도 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책을 읽기 위해서 지하철을 타곤한다. 하루에 두번 탈수 있다.
도착지 까지 가는데 15분 다시 돌아 오는데 15분, 그 사이 시간동안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뛰어 다니다 보면 시간이 남으면 자투리시간으로 1시간 2시간이 비면 커피숍에 가서 커피 한잔을 시키고 책을 본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두시간 정도 확보 된다.

요세는 장사가 잘안된다. 책을 본다고 장사에 소흘해서 인지도 모를 일이다.
돈을 벌려고 하면 집착을 해야 하는데, 공부하고 있는게 집착을 버리는 거니까, 장사가 잘될리가 없을것 같기도 하다.

사람에게 욕망이 있는데, 욕망은 제약을 받는다.
요즈음에는 돈에 의해서 욕망이 가장 제약을 많이 받는다.
욕망을 충족 하면, 그욕망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충족 시킬수록 욕망은 커진다.
나는 경제 사정이 안좋기 때문에 욕망은 돈에 제약 받는다.
경제사정에 맞추어 욕망을 줄여 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욕망이 경제 사정에 맞게 줄지 않으니 이것도 고역이다.

만약 재벌로 태어났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할수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의 욕망을 멈추게 할수 없었을 것 같다.
현재의 나는 돈에 욕망이 제약되기 때문에 이카루스처럼 되지는 않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다고 해야 하나 슬픈 현실이지만,
욕망이 줄어 들수록 세상이 더 크게 보여 지는것 같다.

가끔 추운날 커피전문점에서 커피한잔을 마시면서 책에 빠져 있으면 잠시 내 욕망을 잊는다.
내 욕망은 제약을 돈이 안드는 욕망으로 대체하면 되는데... 마누라가 자신의 하고자하는 욕망이 경제사정에 제약이 됨을 볼때 안타깝다...

지금 마누라는 자고 있다. 가끔은 싸우기도 하고 삐지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나는 마누라를 통해서 삶을 배우고 있다. 마누라를 만나지 못했으면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이 살았을것 같다.

" 매일 기계를 만지는 일을 하며 살아가지만 갑자기 자신에게 '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 일까? 그것은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묻는 학식 없는 노동자가 있다고 칩시다. 그는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깊은 곳에 이르는 길'위에 서 있는 셈입니다. " -폴 틸리히-

2012년 1월 13일 금요일

듣는 귀

이야기를 듣는다는것이 쉬운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서운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다면, 그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힘들것이고,
진보를 지지하는데, 엄청나게 강한 보수의 시각으로 진보정치인의 흠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이것도 힘들 것이다.
반대로 보수를 지지하는데, 엄청나게 강한 진보의 시각으로 보수정치인의 흠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이것도 힘들 것이다.
교통사고를 경험해서 그 쪽으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데, 누군가 그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할경우도 듣고 있기 힘들 것이다.
자신이 불안해 하는 것이 있는데 상대방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또한 듣기가 힘들 것이다.

이야기를 할때 듣는다는 것은 가끔은 엄청 힘든일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야기 하는 본인의 쌓인 것을 푸는 것이므로 오히려 이야기를 하는쪽이 스트레스가 풀린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들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칼로저스의 상담대한 부분을 읽었는데, 그가 말하는 상담의 핵심은 듣는것이라고 한다. 듣는다는 것은 참아서는 계속 듣고 있을수 없다.
전이나 저항때문에 분노가 올라 오기도 하는데, 그걸 참고 표시를 내지 않으려고 하면, 한번을 들을수 있지만 지속할수 없다.

듣는 것이 귀에 거슬리지 않아야 들어수 있는데, 그러한 단계에 올라가기 위해서 자신의 끊임없이 비워야 할것 같다.

세상이 갈수로 개인적이 되어 가는 것이 갈수록 귀에 거슬리는 소리 들이 많기 때문에 들을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를일이다.

듣고 화를 내는 것보다 더 안좋은 것은 그 올라 오는 화를 만들지 않기위해서 듣는 것을 포기 하는 사회의 분위기로 가는 것 같다.
어떤 농담의 한마디로 고소의 대상이 되는 사회...

앞으로의 공부의 방향은 어떤 말이든 들어 줄수 있는 귀를 가지기 위해 수양을 해야겠다.

2012년 1월 9일 월요일

세상에 정신적인 고통을 안고 살아 가는 것은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인것 같다

사람은 엄마를 통해서 세상에 태어난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는 일정기간 동안 아무것도 할수 없다.
그 일정 기간 동안 아기는 엄마를 완전히 믿는다.
믿는다 라는 개념도 없지만, 완전히 엄마를 믿는다.
믿지 못하면 자라지 못한다.

아기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게 되면 엄마에 대한 완전한 믿음은 조금씩 약해져간다.
어느 순간 엄마의 유한성을 발견한다. 엄마가 자신에게 해줄수 없는 것을 조금식 발견하면서 사춘기를 맞이 한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깍을때 머리를 이발사에게 맡긴다. 믿는다라는 개념도 생각나지 않지만, 그냥 머리를 맡긴다. 그러나 이발에 대한 기술이 많을 수록 이발사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병이 나서 병원에 갈때 의학상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의사를 믿지못한다.


믿음이란 '자신이 모른다라는 것'을 알때 깊어지는것 같다.
어찌 보면 소크라테스가 무지에 대한 자각(모른다라는 것과 할수 없다라는 것을 포함하는)이 믿음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선택을 받았다거나, 모든것을 다할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자신만을 믿게 되고, 다른 사람을 믿을수 없게 된다. 사회적을 성공하면 할수록, 그 성공이 자신에게서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은 없어진다. 그 대상은 신에 대한 믿음도 포함된다.
세상에 홀로 있는 인간이 된다. 가장 궁핍한 상태가 된다.


믿음은 자신의 부족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되고, 믿음의 완성은 그 자각 자체도 없어지는 '무'에서 완성된다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정신적인 고통을 안고 살아 가는 것은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인것 같다.
옆사람을 못믿기 때문에 마음에 묻힌 말을 할수 없고, 그 할수 없는 말때문에 응어리가 지고, 그 응어리가 고통을 만든다. 고통스럽지만 말할수 없다. 믿을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것을 가져도 궁핍한 상태가 된다.

옆의 사람을 믿기 시작할때 치유가 시작된다.

2012년 1월 2일 월요일

단 한사람도 믿지 못하면선

인간은 믿음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믿음의 붕괴는 삶의 붕괴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 믿음은 보이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고, 구체적인 대상을 가져야 한다.

옆에 있는 단 한사람도 믿지 못하면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하나님의 형상을 믿는 것은 아닐까.


옆에 있는 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선생님의 치료에 있어서 저를 실제로 치유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곧 그녀는 스스로 대답했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항상 저를 위해 있었고,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할때면 언제든지, 낮과 밤 어느 시간이든 선생님에게 전화 걸고 갈수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누군가가 실제로 저를 위하여 항상 존재할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선생님이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수십번의 경험들이 서서히 선생님을 믿을수 있게 하였어요. 말하자면 제가 자신의 힘이 커가는것을 느꼈을때 까지는 저는 선생님을 통해서만 살수 있었어요.이전에는 결코 경험해본적이 없었던, 선생님의 신뢰성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전 세계에 대한 신뢰가 점차 커갔었어요." - 정신분선과 현존재 분석- 메다드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