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2일 수요일

잠에 관해 공부해 보고 싶다.

국민학교때 였던것 같다.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혼자 갔었다. 몇일을 자고 와야만 했다.
그날 저녁 나는 잠이 안와서 울면서 집에 가야한다고 소란을 피웠고, 그이후로 다른 집에 가기만 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다른 친척집에 가야 한다면 가장 큰 걱정은 잠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였다.
다른 집에 갔을때 잠을 자기 위한 방법중에 하나가 눈을 뜨고 밤을 지세기로 노력하는 것이었다. 무조건눈을 뜬채로 있는거다. 그러나 시골을 경우 너무 어둡기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알수 없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눈을 뜨고 있으려고 노력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에 빠지게 되었다.
한번은 가족과 함께 다른 친척집에 자고 올 경우가 있었는데, 너무 잠이 안와서 엄마한테 가서 울면서 잠이안오다고 말하면서 그옆에 누웠었는데, 엄마옆이 포근해서 인지 바로 잠이 들었었다.
요즈음 심리학에 관심이 있어서 그쪽에 관한 책을 보면서, 잠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고, 아마추어로서 잠에 관해서 내 나름의 관점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2010년 12월 20일 월요일

톨스토이의 마지막인생 - 사랑하라

교회를 갔다 오면서 오랜만에 마누라와 영화를 보러 갔다.
나는 늦게 교회를 가서 예배만 보고 오고, 마누라는 새교부 반주 때문에 나보다 일찍 가서 늦게 돌아 온다.
오랜만에 시간이 맞아 영화를 봤다.

톨스토이의 마지막인생...
한때 톨스토이 작품을 거의 다 읽었었는데 내용의 기억은 거의 없고, 카츄샤 밖에는 생각이 안난다. 아마 내 기억의 어느 모퉁이에 저장되어 있을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 되었고, 영화가 끝날때 눈물이 났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였고, 그 서로 다른 방식이 갈등을 낳지만, 사랑이라는 본질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 느껴 졌다. 그리고 사랑이 인간 존재의 이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와 나아닌 사람과의 사랑이 기쁨을 주기도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한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 기쁨도, 고통도 슬픔도 피할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린다.
사랑하는 자식이 아프고,사랑하는 마누라가 힘들어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이 고통스러워 하고 있으면, 나도 그 고통을 피할수는 없다. 그게 사랑의 운명인것 같다.

예전엔 연애가 사랑의 모든 것인줄 알때가 있었던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씩 늘때마다, 하나씩의 짐을 더 짊어 지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짐과 다른 점은 사랑의 짐은 하나씩 늘더라도, 가끔씩은 그 짐이 가벼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때문에 나도 고통을 받을수 있지만, 사랑이 나의 존재 이유이고, 목적인것 같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 형제 부모 그들이 있기에, 가금씩은 두려움, 고통, 분노, 슬픔, 절망이 다가 오더라도 내가 살아 가는 힘을 근간이 되는것 같다.

영화가 끝날때 왜 눈물이 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많은 기억들 중에 사랑에관한 기억들이, 나의 기억들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찾이 하고 있다면, 행복도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 하고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나는 행복한가? 그답은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2010년 12월 18일 토요일

잠에 대한 생각 / 다마지오의 책을 읽으면서...

요몇일 안토니오 다마지오 의 "스피노자의 뇌" 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책을 읽으면서 불면과 관련해서 생각이 떠올라 내 멋대로 적어 본다. (분명 내가 이책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수도 있을것 같다. )

불안이 밀려온다.
처음에는 조금씩 천천히 시간이 갈수로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무엇이 불안의 원인일까.
의식 할수 있는것이던 무의식 적인 것이든, 나는 알고 있고, 마주치고 싶지 않는 것일수 있다.
내가 바라보는 것들, 내가 생각 하고있는 것들 , 내가 느끼고 있는것들, 이것들이 불안의 정서를 만들고, 정서는 뭐엇인가 안좋은 느낌을 만들고, 내 몸을 반응시킨다.

행복한것들은 몸을 행복하게 반응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몸을 힘들게 만들어 간다.
내가 바라 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될지 불편하게 될지가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잠에 대한 달콤한 기억이 중심이 되어 있으면, 잠을 잘 잘수 있게 된다.
잠에 대한 불편한 기억이 있으면, 불편한 정서를 만들어 내고, 잠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불편한 정서가 되어서, 불편한 느낌이 들어 간다. 그 느낌은 잠을 자기 위해 누워있으면, 손가락 마디마디의 근육의 움직임, 발가락의 미세한 움직임, 청각은 미세한 시계의 바늘움직임까지 들리게 만든다. 그러한 근육에 움직임과 청각의 예민해짐은 다시 정서를 자극하게 만들고, 정서는 느낌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그 느낌은 나의 감각들을 더욱 예민해 지게 만든다.

잠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때, 순간적인 반응이 나의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서 긍정적인 것을 끌어 내느냐가 불면에서 탈출하느냐가 달려 있을것 같다.
수많은 내속의 기억들속에서 강렬한 부정적인 기억들보다, 강렬한 긍정적인 기억을 활성화 시키느냐가 관건일수 있을것 같다.
하나의 의식이 강렬하면, 그 의식을 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것 같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면 검게 보이고, 붉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면 붉게 보인다.
긍정적이 의식이 긍정적인 정서를 만들면, 그 틀로서 바라 보는 세상은 밝게 보여진다.
부정적인 의식은 분노, 좌절, 등을 만들고, 그 틀로서 바라 보는 세상의 일들은, 나의 분노의 원인으로, 좌절의 원인들로 보여 진다.

'잠이 오지 않을 수 있다'라는 강렬한 의식에 둘러 쌓이게 되면, 그날 하루 내가 바라 보는 세상은 그 틀속에서 보여 진다. 불안 초조를 만들고, 근육들은 미세하게 떨리게 된다. 모든 감각들은 경계반응으로 들어 가고, 소화기능도 경계을 위해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잠이 오지 않은 나날 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될것같다. 내가 바라보는 부정적 정서의 안경을 벋고, 긍정적인 정서의 안경을 쓸때 까지의 시간...

그 시작을 나를 분노케 만들고, 불안하게 만든 것에 대한 용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여겨 진다. -약물(수면제등)은 임시방편이지 않을까- 용서외에는 그 감정의 불타오름을 잡을 다른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를 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의 말은 쉽지만, 그 말이 무의식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어 몸의 미세한 근육, 감각세포속 까지 들어 가야만, 말이 말로서 머물지 않고, 마음까지 다가 가게 되는것 같다.

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바둑 1단과 10급이 대국을 할때, 1단이 왼손으로 둔다고 10급과의 결과는 달라 지지 않는다.
바둑이 뇌를 사용하는 경기이기 때문에,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사용한다고 하여도 큰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9단과 9단이 경기를 할때,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사용하게 된면 질 가능성이 높아 진다.
익숙하지 않는 손놀림에 뇌는 일정영역을 할당하게 된고, 완전히 수를 생각하는 부분에 집중도가 낮아 질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12월 1일 수요일

점심때 돼지국밥을 먹으러 갔다.
요즈음 국밥에 푹 빠져있다.

2010년 11월 25일 목요일

불면증에서 벗을 날수 있는 나만의 생각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상처는 나에게 남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증오하면
누군가를 증오하는 동안 내 의식은 쉴수 없어진다.
의식이 쉴수 없어지므로.. 의식의 정지상태인 잠을 자지 못하게 된다.
증오는 나에게 상처입히고, 그 상처는 나에게 두려움을 남긴다.
내가 두려워 하면, 그 두려움은 나를 지배한다.

불면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지배한다.

내속의 행복이 차지하는 공간은 작아지고,
증오와 두려움이 나를 차지 하게 된다.
불면으로 의식이 쉬지 못하므로
24시간 증오와 두려움이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
불면의 날은 지속된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용서에서 시작 하는 것이다.
용서는 상처를 치료하고 두려움을 줄어들게 한다.
두려움과 증오가 줄어 들면 감사하는 마음이 조금 생기게 된다.
감사하는 마음은 누군가 나를 지켜줄것이라는 믿음으로연결되고,
의식이 마음을 놓고, 쉴수 있게 된다.
이제 비로서 잠을 잘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진다.

사무실에서 뭐 먹을까를 고민하다. 햄버거로 결정을 하고... 짬이 나서 생각을 정리해본다.

산에 오르기 위해선 힘이 든다.
정상에 오르면, 힘들었던 과정이 좋은 기억으로 변환된다.
산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진 사람은 산에 오르는 것을 생각하면 행복을 느끼게 된다.

산에 오르면서 정상에 도달히기 전에 그만둔다든지 기타 성취감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은 산에 오르면서 느꼈던 과정들이 고통의 기억으로 느껴져서 산에 오르려고 하지 않느다.

산에 대한 어떤 기억을 가지냐에 따라서... 산을 오느는 과정을 고통으로 여기든지, 성취감을 맛보기 위한 과정으로 느끼든지 행복함으로 느끼던지는 사람마다 달라진다.

내가 무엇인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불행으로 바라 보고 있다고 한다면, 산에 오르는 안좋은 기억처럼, 사실은 불행이 아니고, 불행한것으로 만들어 내는 그에 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것으로 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산에오르는 것을 고통으로 바라 보는 사람은 산에 오르는 것을 행복으로 바라 보는 사람을 만나서.. 그게 왜 행복한것인지.. 성취감이 있는지.. 이야기를 들어 보고, 작은 산부터 같이 한번 해본다면, 산에 대한 기억을 바꿀수 있을것 같다.
또한 내가 불행으로 바라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행복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해보고, 작은 것부터 행복으로 느낄수 있는것을 같이 해본다면 나를 둘러싼 불행들은 하나씩 줄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행복이나 불행은 나의 주위를 맴돌게 되는것 같다.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사무실에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으며 거울을 바라 본다.
밖에 나가기전에 내가 바로 되어 있는지 거울을 통해서 나를 바라 본다.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이 나를 바라 볼때, 주위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바람직하다고 여길만한 것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잘살아 가는 것인것 같기도 하다.

거울이 완전한 나를 비추어 주지 못하는, 결함이 있는 것이라면, 거울속에 나는 완전한 '나'자신이 아니다.
주위사람들이 완벽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시선에 비추어진 나자신은 확실한 '나' 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을 통해 보여 지는 나자신은 내가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 되어진다.

내가 살아 가면서 잘살고 있다고 어떻게 알수 일을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그 정답이 아닌것 같다. (어느정도는 나를 비추어 줄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내스스로의 판단을 믿어야 하는가에 생각해보았다.
내 경험이 완벽한 것이 아니고, 내스스로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판단하는 내자신의 형상은 오류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애초 내가 찌그러진 거울을 보면서 살아왔다면 찌그러진 겨울이 거울의 진찌 모습으로 알고 살아 왔을 것이고, 그기에 빛추어진 모습도 진짜 나라고 여길것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도 확실한 것이 아닌것 같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내 거울이 될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비추어 보면서, 내가 바로 가고 있는지 다른 길로 가고 있는지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것 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쯤 왔는지를 알수 있게 해주는...

살아가면서 어느 일정부분에서라도 내가 누군가의 거울이 될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아니면 어떤 거울이 바른 거울이라고 말해줄수 있는 사람이 될수 있다면...

그러나 나의 삶은 많은 욕망과 본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를 바로 비추어 주는 거울은 있지만, 내가 바라 보고 싶을 때만 바라 보고, 거울을 외면하는 삶을 살아 가고 있는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인생의 여백을 스마트 폰이 체워간다

언젠가 부터 정신, 의식, 마음 등등의 단어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수없이 마음, 의식, 정신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왔고, 수없이 들어 왔으면서도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관심밖의 것들 이었다. 그러나 막상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니,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무엇일까요 라고 물으면, 비웃음을 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마음이 무엇인지 나는 잘모르겠다.
마음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의식과 마음의 관계는, 정신과 마음의 차이는 무엇인지 궁금함이 늘어 간다.

수많은 시간동안 진리라고 일컬어 지는 것들이 있었고, 지금은 진리가 아닌것도 있고, 아직 진리인것도 있다. 그러나 100년 후, 1000년후에도 진리로 유지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최근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책들을 보고 있다.
" 우리는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잘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습관에 의해 심리 에너지가 너무도 잘 배분되는 까닭에 거침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자명종 시계가 울리면, 우리는 잠에서 깨어 의식을 찾은 후 목욕탕으로 가서 이를 닦는다. 그리고 나면 문화가 규정해 주는 사회적 역할이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주면, 하루가 저물 때가지 일정한 양식에 따라 자동으로 행동하다가 밤이 되면 잠을 자면서 의식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 상태로 혼자 남겨졌을 때는 본능적인 무질서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가 대개는 뭔가 고통스럽고 신경 쓰이는 일에 생각이 멈춘다.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일로 관심이 모아진다. 실제 혹은 가상의 고통이나, 최근 유감스러웠던 일, 또는 오래된 갈등 등에 관심이 쏠린다. 이런 쓸모없고 즐겁지 않은 엔트로피가 바로 정상적인 의식의 상태이다. "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의 Flow 中-

내가 하고 있는 많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10년 후에 혹은 100년 후에는 당연한것 아닐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의 무질서 상태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 하고 있는 것일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 무엇인가는 사회가 규정해준 것이며, 사회가 규정해준 것이 잘못된 합의에 의한 것일수도 있을것 같다.
내 스스로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내 삶은 10년후 100년후 무의미한 삶일수도 있겠다 는 생각이든다.

스마트폰, 스마트한 삶, 스마트해지기 위해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인생을 여백을 스마트 폰이 체워간다. 화장실 갈때, 지하철 기다릴때, 지하철 타고 갈때, 친구를 기다릴때, 은행 순번을 기다릴때...
나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는 시간이 줄어 들고 있다.
잔재미에 심취하다, 인생의 큰 재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2010년 11월 8일 월요일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

여행, 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갔다.
마산에 갈 계획도 없었고, 마산에 뭐가 좋은지도 모르고, 뭐가 맛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11시쯤 마누라와 대구 서부정류장에 만나서, 마산이 눈에 들어 왔다.
마누라한테 마산으로 가보까 하니까. yes
마산행 버스 표를 끊고 마산으로 향했다.
저번에는 진주를 갔었는데.
진주를 갈때와 달라진 점을 내손에 스마트 폰이 있다는 것이었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고,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에 마산에 대해서 검색을 했다.
별로 검색이 되는 것도 없었고, 버스속에서 작은 화면을 보니 속이 울렁울렁해서 그냥 잠을 잤다. 마누라는 버스에서 잠을 잘 못잔다. 내가 잠을 자면, 자기는 심심하다고 짜증을 낸다.
그래도 나는 잠을 잤다.

마산에 도착해서 밖으로 나오니까. 어디를 가야 할지 막막했다. 항상 계획없이 여행을 가면 처음은 막막하다.
다행히 길에 야쿠르트 아줌마가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윌(고급요쿠르트의 한종류) 두개를 사고 대구에서 왔는데 마산에 어디로 가면 볼게 있냐고 물어 보았다.  ( 참고로 어디를 가든지 야쿠르트 아줌마한테 야쿠트를 하나 사면서 길을 물어보는게 가장 확실하다. 야쿠르트 아줌마의 경우 대부분 그지역 토박이 이고, 친절이 몸에 배여서 길을 잘 가르쳐 주신다. 한 구역마다 요쿠르트 아줌마들이 있다 )
국화 축제를 한다고 해서 그쪽으로 가보았다. 국화가 많았고, 꽃이 모여있으니 벌들도 많이 있었다. 그다음 마산어시장으로 가서 구경을 했다.
마산과 일본 고베의 느낌이 비슷한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한지역이 비슷해서 그렇게 느껴 졌을수도 있을것 같다.

여행은 버스나 기차 여행이 좋은것 같다. 자가용 여행은 한지점에서 한지점으로 움지이기 때문에 단일 목적이 강한다. 그러나 기차나 버스는 이동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도 해볼수 있고, 살아가는 장면들도 볼수 있다.  버스를 기다리고, 길을 묻고, 다리가 지쳐서 쉬기도 하고, 길거리 음식을 먹으면서 색다른 먹거리도 맛보고, 여행을 시작 부터 끝날때 까지, 공상에 빠져 보기도 할수 있다.

단지 마누라도 사진을 찍히는걸 싫어하고, 나도 사진을 찍는걸 안좋아 해서.. 사진을 잘찍지 않는다. 풍경도 잘 찍지 않는다. 그저 기억속에 자연스럽게 머무르도록 여기 저기를 유심히 바라 본다. 사진으로 남겨두면 사진으로 볼때만 생각이 나지만, 기억으로 넣어 두면, 필요할때마다 생각해 내면 된다.
간혹 기억들이 섞이기도 하고, 생각나지 않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삶이 일부이고, 새로운 것들을 기억에 넣어 두면 그뿐이다.
그리고,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기기 때문에 내주위의 것들에 대해서 관심이 늘어 나고, 삶이 풍부해지는 것이 될거라고 믿고 있다.

2010년 10월 30일 토요일

김민기 봉우리 / 스마트폰 옵티머스큐

여유가 없다.
몇일 전에 일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고, 스마트폰을 구입했다.
요및일 스마트폰을 익힌다고 여념이 없다.
일상생활에서 한가지 변화는 시간이 날때 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고, 음악을 듣고, 여러가지어플을 사용하는 것이다.
시간이 조금 나면 여유를 가지고 상상하고, 공상을 하고, 생각에 빠져 허우적 데기도 했었는데.. 스마트 폰이 그 공간을 차지해간다는 느낌이 든다.
삶에 여백이 없으면, 정신이 매말라 가고,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 버리면, 순간적 자극을 추구하게 되고,
결국 삶은 행복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김민기의 봉우리가 흘러 나온다.
조용한 밤 김민기의 봉우리를 듣고 있으면, 가끔 눈물이 나기도 한다.



봉우리 - 김민기 -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 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 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 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무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 볼 수 있을 테니까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 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 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같은 것이 저며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봐.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2010년 10월 13일 수요일

사이다,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

사람은 경험을 한다.
내가 하는 경험이 보편적인 경험일수 있고, 나에게만 일어 나는 혹은 내가 속한 집단에서만 나타는 경험일수 있다. 
과거의 경험 등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
내가 하고 있는 경험이 개별적이거나 특수한 것이라면, 내가 하고 있는 사고 또한 보편적이기 보다는 특수한 관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속이 체해서 힘들때 사이다를 마셔서 속이 시원해 졌음을 경험하고, 그경험이 반복 되었을 경우  다른 사람이 속이 체해서 힘들어 하고 있으면, 사이다를 권할 가능성이 있다.
또 어떤 경우 사이다를 마시면 알러지가 있는 사람이나 사이다를 마셔서 배탈이 난 경험이 지속적으로 있는 사람들은 속이 체해도 사이다를 마시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전자가 후자에게 사이다를 권하게 되면, 후자는 호의로 받아 들일것인지 악의로 받아 들일 것인지...

세상은 소통이 필요하다. 우리는 대부분 개별적인 경험들 속에서 생활 하기 때문에 소통이 없으면 갈등이 일어난다. 나의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상대는  악으적으로 느껴 질수 있다.

왜 지역간의 갈등이나 국가 간의 갈등이 일어날까. 생각해보니.
그 지역이나 국가를 경계로 해서 특수한 경험을 한다고 볼수도 있을것 같다. (인간이라는 큰틀로 보았을때 )
개별적인 경험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낳고, 서로 다른 세계관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소통은 세상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고. 불통은 서로의 생각을 억합하려 할것 같다.

2010년 10월 12일 화요일

대구 유창반점 - 맛난 짬뽕

대구에 살고 있다. 인구는 250만 그중 한명으로...

예전에는 대구 하면 사과와 미인이 유명하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대구 주변에 사과를 재배하지 않는다. 날씨가 더워져서 대구에서는 사과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과가 재배되지 않아서 그런지 예전보다 미인도 줄어 든것 같다.

대구는 덥다. 비도 많이 오지 않는다.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서 구름이 넘어 오지 못하는것 같다. 그래서 대구의 여름은 견디기 힘들다.
어쨌던 올해여름도 지나 갔고, 가을이 왔다.

월요일 멍한 정신을 이끌고 짬뽕을 먹으러 갔다.
몇십년은 된 듯한 유창반점으로 갔다.

국민학교 다닐때는 항상 짜장면을 먹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짜장면과 짬뽕을 고민하다, 이제는 거의 짬뽕을 먹는다.
세상이 달콤한 것이 아니라, 짬뽕처럼 맵고, 탁하다는것을 알아 가면서 부터 인듯 한데,
그래도 그 탁함 가운데에서도 시원함이 있고, 얼큰함이 기쁨을 주듯이, 세상도 탁한것 처럼 보여도 그 살아 가는 맛이 있고, 기쁨과 즐거움과 사랑이 있음에 짬뽕과 닮아서 그런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짬뽕을 친구는 짬뽕밥을 시켰다.
땀을 흘리면서 짬뽕을 먹으며, 와~ 시원하니 맛있다는 느낌이 확 다가 왔다.
짬뽕에 무엇이 들어가서 이맛이 나는지 내 미각은 그것 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냥 시원하고 좋다. 감기가 뚝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런 느낌이었다.

날씨가 추워지고, 감기가 들것 같은 날, 오늘 뭔가 땡기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 아마 여서기 짬뽕을 먹고 있을것 같다.

오늘도 행복한 기억 하나를 수집했다.

" 너는 자꾸 멀리만 가려느냐. 보라 좋은 것이란 가까이 있다.
다만 네가 잡을 줄을 알면 행복은 언제나 거기에 있나나..." 괴테의 말이 생각난다.

내일도 행복을 수집하기 위해 잠을 청해야 겠다.

2010년 10월 6일 수요일

잠이 오지 않는 밤 깊어 져 간다. .

잠이 오지 않는 밤  깊어 져 간다. .

10년 전쯔음에 일본에 여행을 간적이 있었다.
도지샤 대학 윤동주 시비에 적히 서시를 읽고 있었다.
그때 서울대학교 교수한분을 만났었다.  여름이라서 모기가 많아서 여기 저기 물려서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그분이 시비 앞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서있었던 나를 보고 한국인이라고 여겼던것 같았다. (모기에게 물려서 그랬는데...)
그분은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잡혀온 강항이라는 분의 자취를 찾아 다니신다고 하신것 같았다. 나도 따라 다니기로 하고 같이 움직였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다가 고향이 대구로 같았고,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 하셨다.
대구 반월당에서 남문시장 길에 벗나무를 심고 싶다고 하셨다.
지금 심어도 그 꽃을 볼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음세대의 사람들이 그 꽃을 봄으로써 기뻐하는 그런 것을 하고 싶다고 하신것 같다.
일본의 힘또한 다음세대를 위한 대비속에서 발전을 해나가는 것이라고 하신것 같다.

그리고 전략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셨다.
학자로서 전략이 필요하다면서...
미국 대학에서 강연이나 세미나를 하면 그냥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고, 일본과 중국을 넣어서 한국을 이야기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온다고 하였다.
사실 별것도 아닌것 같았지만, 내가 아무리 진심을 가지고 있어도, 상대방이 공감할수 있는 것에 맞추지 못하면 의사소통이 될수 없다다라는 의미로 느껴진다.

왜 10년도 지난 일이 생각 났는지는 알수 없다. 그냥 생각이 나서 적어 보았다.
아마 다른일들도 지금은 생각이 나지않지만, 기억 어느 언저리에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느날 문듯 생각이 날것 같다.
그게 첫사랑 일 수도 있고, 시련일수도 있고, 슬픔일수도 있지만...

요즈음 읽고 있는 책 ( 몰입의 즐거움 / 칙센트미하이 )의 한구절을 적어 본다.
' 목표가 없고 교감을 나눌수 있는 타인이 없을때 사람들은 차츰 의욕과 집중력을 잃기 시작한다. 마음은 자꾸만 흔들리고, 불안감만 조성하는 해결불능의 문제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붕괴되는 이런 최악의 무질서 상태를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불안의 샘을 의식에서 지워주는 자극에 의존하게 된다. 그게 드라마 시청일 수도 있고, 연애소설이나 추리 소설같은 판에 박힌 이야기를 읽는 것일수도 있으며, 도박이나 섹스에 빠지는 것일수도 있고, 술이나 마약에 탐닉하는 것일수도 있다. 이것들이 의식에서 벌어지는 혼돈을 짧은 시간안에 줄여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것은 허무감과 불쾌감이다.'

어느날 문듯 머리속에 생각나는 것이 과거에 내가 했던 허무한 것들과 불쾌한것들이 아니었으면 한다. 그러나 오늘 한 것들 많은 부분이 책에 나오는 허무한 것들이었던것 같다.
앞으로 쌓을 기억들은 '사람에 관한 것'이건  '일에 관한 것'이건 하루 하루 최선을 다했다는 그런 것이었으면 한다. 
말과 글은 행동이 아니므로, 습관을 그렇게 만들어 가야겠다.
다짐이 결과로 나온다고 보장은 안되지만, 또 다짐을 해본다.

2010년 10월 5일 화요일

나만의 잠자는 방법

잠을 국어 사전에 찾아 보니 "눈이 감긴 채 의식 활동이 쉬는 상태" 라고 되어 있다. 잠을 자려고 노력 하면 할수록 의식은 깨어 나기 때문에 잠을 잘수 없다.
"잠을 자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의식을 깨어 나게 만든다. 사실 생각은 해야지 한다고해서 해지는 것도아니고, 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해서 안해 지는 것도 아닌것 같다.
잠을 몇일 못자게 되면, 내 마음은 잠을 자야 한다는 의식이 중심에 서게 되고, 다른 일들은 "잠을 자야 한다는 의식"에 밀려나게 된다.
잠을 자야 한다는 의식과 잠을 못자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이 내 마음의 중심이 되어서 아무것도 할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근심 불안 긴장이 나를 누르게 되고, 카오스에 빠지게 된다.

내가 잠이 안올때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일단 눞는다. 크게 한숨을 쉬고, 큰소리로 와 ~ 짜증난다. 잠이 안오네...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잠이 안오면 할수 없지 오늘은 무슨 생각을 하고 놀까 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코로 천천히 숨을 들어마시고... 천천히 잎으로 숨을 내쉰다. 이걸 10회 정도 반복하면 마음에 안정이 조금 오는것 같았다.

그 다음 주재를 정해서 생각을 한다.
잠잘때 마다 생각한 주제 중의 하나가 (한 5년 정도는 이 생각을 했다. ) 조선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데 무엇을 가지고 갈까를 생각했다.
가지고 갈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가. 한번도 가지고 갈걸 다 정한적은 없다. 그 전에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꼭 자야하는데 라는 생각을 가지면, 위와 같은 생각도 안든다.
그러면 잠이 안온다.
잠을 자고 싶을때는 지금 자면 안되는데를 계속해서 속으로 이야기 하면 효과가 있었던 적도 있었던것 같다.

오늘도 헛소리를 적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는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고, 나에게 적용가능했던 개별적인 경험이다.

요즈음 나는 누우면 바로 잠이 든다.

2010년 10월 1일 금요일

해야 할것들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다.

2010년 9월의 마지막 날이 지나가 버렸다.
딱히 무엇을 했는지 기억은 잘안나지만 한달이 지나갔다.
추석이 있었고, 날씨가 추워졌고, 배추가격이 올라 김치가 맛있어 졌고...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저 한달이 지나 가버렸다.
가끔씩은 누군가 미워지기도 하고, 좋아 지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기뻐 하기도 하기도 하면서 한달이 지나 갔다.
나에게 별반 달라 진것은 없지만, 내몸은 노화를 진행해 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제 오늘 별반 달라 진것은 없고, 전번달 이번달 별반 달라 진것이 없고,올해 작년 별반 달라진것이 없게 느껴지지만, 조금만 잠을 못자도 다음날 맥을 못추는 것이 노화의 증거 인것 같다.

나이를 먹어 간다는것이 내가 '할수있는 것'이 줄어 간다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것 같다. '해야할일' 과 '하고 싶은일' 들이 있을수 있는데, 갈수록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할 일'들이 많아 진다.
할수 있는 시간이 줄어 가면 갈수록,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는데, '해야 만 하는 일'들만 늘어가니 아이러니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생기는 순간 그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생긴다. 어찌 보면 해야 할일이 많다는 것도, 축복이지 싶다.

내 앞에 닥쳐 있는 고난과 불안 들도, 나에게 '해야만 하는 것'들을 만들어 준다.
'해야 할것'들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다.

2010년 9월 13일 월요일

기억 , 나의 삶, 인생

몇일전 일이다.
어머니 집에 갔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어떤 할머니는 집앞에 앉아 있고, 경찰 두분은 할머니에게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다.
할머니의 연세는 70대 후반에서 80대로 보였다.
어머니 집앞에서 자기 집이 여기라고 경찰분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내가 나가서 이분은 이동네에 사시는 분이 아니라고 경찰 분들에게 이야기 해드리니까, 경찰 분들도 아신다고 하셨다.
아무리 물어도 기억이 없으신것 같았고, 작은 소리로 ' 내가 왜 이카노, 정신이 왜이리 없노' 라고 한탄을 작은 소리로 하셨다.
경찰 분들이 경찰서로 가시면, 집을 찾아 드린다고 아무리해도 여기가 우리집이고 조금있으면 아들이 일을 하고 돌아 오신다고 했다. 이름은 물으니, 이름은 아셨고, 고향을 물으니 고향이 현풍(경북 달성군)이라고 했는데, 동네이름은 모르셨다.
경찰 두분이 1시간쯤 씨름을 하시다가, 저녁 8시쯤 되어서 저희가 업을 테니까 할머니보고 업히라고 하셨는데, 할머니는 눈물을 보이며 거부하셨다.
그러니 경찰 분들도 어쩔수 없이 할머니 옆에서 계속해서 가출 신고가 있는지 경찰서에 조회를 하셨다. 저녁도 못먹고 계속 수고하시는 경찰분들을 고맙게 여겨 졌다.
경찰한분이 옷도 깨끗하고 신발도 신고 있으셔서 나오신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런 경우 근처 동네의 분이고, 거의 99% 집을 차으신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기억을 잠시 잃으신것 같았고, 치매 증세가 있으신듯 했다.
경찰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일이 있어 집으로 돌아 왔다.

집으로 돌아 오면서 기억을 잃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내가 살아온 인생을 잃어버린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 될수 있을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도 못하고, 내가 살아오면서 해온 많은 것들도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신념을 가지고 바쳐온 나의 청춘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랑때문에 가슴태우며 지새운 밤들도 기억하고 못하고, 내가 몇십년을 노력해서 일구어 놓은 집도, 재산도 기억하지 못하며,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어쩌면 내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생각해내지 못해 세상의 미아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 할머니의 표정속에서 보여 졌다. 그표정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기억은 나의 인생이며, 삶인지도 모르겠다.

2010년 8월 31일 화요일

너무 생각나는 데로 써서 내용을 알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한다.
오전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 일을 한다.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고, tv를 본다.
마누라하고 이야기 하다가 tv를 보든, 인터넷을 한다.
잠이 오면 잠을 잔다.
내가 오가는 길은 항상 일정하다.
지도에 내가 하루에 움직인 동선을 그려보면 일정 영역을 벗어나지 않은다.
이것이 내가 평일 하루에 움직이는 물리적 동선이다.

정신의 영역은 항상 저멀리 달린다.
정신의 영역은 한정이 없을 것이다.
내가 작은 방안에만 있어도, 정신은 세상의 모든것을 다 가질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의 영역도 내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그속에서 움직이려 하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행을 따르기 시작하면, 내 정신은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그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치인들은 구호를 만든다. 그 구호들이 나에게 다가오고, 나는 구호속에서 사고하기 시작한다.
편을 가르고, 다른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잘못된것 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같은 구호를 외치면, 도덕적 결함들도 이해 되는것 처럼 느껴진다.

무엇이 옮고 그른것 일까.
일단 나에게 좋을 것을 주는 것이 옮은 것으로 느껴진다.
느낌이 언제는 바른것은 아니다.
내게 불편한것으로 느껴 지는 것이 항상 틀린것은 아니다.
내 감각은 불완전한 것이다.
불완전한 감각에 의존해서 세상을 판단 하면, 그 판단도 불완전한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내가 힘이 없고, 가진것이 없고, 병약할때 내가 세상이 야속하게 느껴 지도록 만든다.
나를 둘러산 세상은 내가 힘이 있고, 가진것이 많고, 건강할때 나에게 항상 친철하게 느겨 진다.
세상이 나에게 친철하던, 야속하던, 내 불완전 한 감각 속에서 느끼는 것이다.
어느 상황에 속하던, 내가 느끼는 감각은 진실이 아닐수가 있다.

하루 하루 단순한 물리적 동선속에서 살아가면서, 정신만은 무한한 자유를 가져야함에도, 내게 느껴지는 감각에 의존하거나, 정치인들이 하는 구호속에서 사고의 영역이 제한되어 지고 있으므로, 정신도 단순한 물리적 동선처럼, 일정 영역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그러나 정신의 자유는 육체를 괴롭힌다.
선행도 육체를 괴롭힌다.
믿음도 육체를 괴롭힌다.
사랑도 육체를 괴롭게 한다.

육체가 힘들다는 것은 정신이 자유로워 진다는 기반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내가 육체적 편안함을 추구 하게 되면, 정신의 편안함을 잃어 버릴수가 있다.

몸을 움직이자.
몸을 움직이자.

2010년 8월 19일 목요일

지도자는 백성을 항상 할펴야한다.

"평화시에는 모든 사람이 몰려들며, 누구나 충성을 약속하고, 정작 죽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막상 역경에 처해서 정부가 시민들의 봉사를 필요로 할때 지원자는 별로 없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들의 충성도를 시험하는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에, 지극히 위험하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라면 어떠한 상황에처하든지 시민들이 정부와 자기를 믿고 따르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며, 그경우 시민들은 그에게 항상 충성할 것이다."
군주론 제 9장 시민형 군주국 편이 나오는 글이다.

군주론에서 줄창 주장하는것은 시민에게 미움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잘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감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도자를 미워하는 시민이 늘어 간다는 것은 지도자가 잘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시민의 수가 늘어 간다는 의미 일 수도 있을것 같다.
지도자가 잘못 된다는 의미는 나라가 발전하지 못한다는 의미일수 있지만, 시민들은 지금 발전을 못하는 것은 자신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다른 지도자가 더많은 발전을 가져다 줄것이라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면 새로운 지도자 후보들이 나오게 된다.

지도자가 권력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일수도 있지만, 지도자가 나라를 발전 시기키 위해서 가장 중요한것은 시민들의 미움을 받지 않은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말로 국민통합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해야지만 진정한 발전이 가능할것 같다.

"백성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군주는 백성도 그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며, 백성의 괴로움을 괴로워하는 군주는  백성도 또한 그의 근심거리를 근심하니, 천하 사람의 일을 가지고 즐거워 하며 천하 사람의 근심 거리를 근심하는 데에, 그러면서도 천하에 왕노릇하지 못한 사람은 아직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맹자의 한구절이다.  지도자가 미움을 받지 않을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는것 같다.

세상이 시끄럽다. 권력 주변은 언제나 바뀐다. 그들은 지도자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지도자를 보호하는것은 언제나 시민이다.

2010년 8월 11일 수요일

편지

모든 것이 잠든듯 한 밤, 음악을 따라 내마음 속으로 들어 간다.
물이 끓는 소리에 조그마한 정적은 어딘가로 사라진다.
푸른 찻잔에 길게 물을 따르고, 녹차잎을 조금 넣는다.
그리고 잠시, 그 향과 맛을 기다리며 너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가 언제 갈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 내일 일수도, 그 다음 날일 수도...

녹차의 향기가 조금씩 방안을 감싸 앉는다.
나는 이 기다림이 좋다.
진정 좋아하는 것을 만난다는 것은 그 기다림 때문에 더욱 진실해지는 것은 아닐까
오늘따라 녹차의 향기가 조금 더 진해진 것 같다.

너무나 오래 기다린 탓일까.
입술을 통해 느껴지는 향기를 조금 마신다.
새벽 안개 사이로 들리던 아리아도 내 귀를 통해 가슴으로 들어온다.

향기에 취해 쓰러 지련다.
아름다움에 취해 쓰러 지련다.
이 향기와 아름다움이 너에게 전해 지기를 바라며,
편지를 줄인다.

2010년 8월 9일 월요일

우산

이틀동안 몸살이 나서 오늘은 낮에 잠만 잤다.
다른 사람들은 더워서 에어컨을 켜고있는데, 나는 추워서 이불을 덥고 잠을 잤다.
점심이고 아침이고 보이는 음식들은 먹을 생각도 들지 않았고,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생각도 안들었다.
저녁에 약을 먹고, 잠시 시간이 지나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것 들이 생기고,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 났다.

동일한 나인데, 오늘 하루 내가 바라본 사물들이 다가 오는 느낌은 상반되 것들이었다.

나의 시각,촉각, 후각, 청각은 동일한 공간에서도 내가 처한 몸의 상태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졌다. 나의 감각들은 어떤상황 속에서 진정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감각 뿐만 아니라 내가 뒤틀린 경험들을 해왔다고 한다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들도 뒤틀려져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옮다고 주장하는 것들, 내가 맛있다고 느끼는 것들, 내가 좋다고 하는 음악들, 내가 예쁘다고 느끼는 것들, 이모든것들이 보편적인 것들이 아닌 나에게 한정된 것들 일수도 있을것 같다.

내일은 또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이세상을 살아 가기가 너무 빡빡 한것 같다.
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겠지만, 세상의 모든 구조가 돈을 중심으로 형성 되어 있기 때문에 돈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그 구조의 우산에서 벗어나서 비를 맞아야 한다.
비를 맛는 것이 낭만 일수는 있어도, 비에 젖어 감기가 들수도 있고, 독감이 들수도 있을것 같다. 몸이 튼튼한 사람들은 비를 맞아도 견딜수 있지만, 노약자 들은 비를 잘못 맞으면, 생명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나도 나이를 많이 먹기 전에 돈을 벌어서 우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2010년 8월 3일 화요일

인셉션 (Inception ; 시작), 그대도 모두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인셉션을 보았다.
어제 장사도 안되고해서..일찍 마감을 하고 마누라를 불러 영화를 보러 갔는데 그시간에 하는 영화가 인셉션 밖에 없었다. 감독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해서도 아는것이 전혀 없었다.
포스터에 디카프리오 나온다는것 밖에...

영화는 시작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눈을 뗄수가 없었다.
점점 재미 있어지는 순간 고객한테서 문자가 들어 왔다.
마누라도 지겨워 하고,나도 일때문에 영화를 20분 정도 남기고 극장을 나섰다.
영화의 내용은 꿈과 무의식을 매개로 시나리오가 잘짜진 영화였던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20분 정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론을 모른다.

영화중에 이런 말이 나오는것 같았다. "꿈을 깨기 위해서 꿈을꾼다."

그리고 장자의 제물론의 한부분에 이런 글이 있다.
[ 꿈에 술을 마시는 자는 아침이 되면 통곡하고, 꿈에 통곡하는 자는 아침에 사냥을 떠난다. 그 꿈을 꾸는 데 있어, 그것이 꿈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또 그 꿈을 점친다.
깨고 나서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안다.
.....
이 구(丘)도 그대도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꿈이야기를 말하는 것도 또한 꿈이라.
.....
내가 만일 그대와 논쟁을 벌였다고 하자. 그대가 이기고 내가 그대를 이기지 못한다면, 과연 그대가 옳고 내가 그른것인가. 내가 그대를 이기고 그대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면, 과연 내가 옳고 그대가 그른 것인가. 어느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 것인가. 혹은 둘다 옳거나 둘다 그른 것인가.
...]


영화를 보고 나서 장자의 한부분이 생각났다.
주인공 디카프리오는 팽이같은것을 돌림으로써 그것을 보고 현실인지 꿈인지를 판단 한다고 했는것 같다.
장자에서도 내가 꿈속에 사는것인지, 현실에 사는것인지 라는것이 나온다.
절대가치를 통해서 꿈인지 현실인지를 판단하고, 논쟁에서 이긴다고 진실이 아니고 진다고 거짓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절대적 가치속에서 진실이 존재한다고 한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꿈과 무의식에 관한 영화인것 같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꿈속에 살아 가고 있는지 현실속에 살아 가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것 같다. (실존에 대한 물음인것 같다. )
꿈과 현실의 기준은 디카프리오의 팽이와 같이 내 스스로 현실과 꿈을 구별하는 판단기준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장자가 말한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의 헷갈리는 세상에서 살아 가고 있는 것같다.

"세상의 모든것은 상대적이다" 라는 논리는 거짓일수 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것이 상대적이다' 라고 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것이 상대적이다' 라는 절대적 사실의 바탕위에서 논리가 전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확장해보면 내가 아는 것을 초월해서 절대적 가치가 있으리라 여겨 진다.
내가 꿈 속에서 살아가느냐 현실속에서 살아가느냐는 결국 내가 절대적 가치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느냐 아니냐 인것 같다.

세상이 혼란한것은 절대적 가치는 항상 절대적인데 절대적 인것을 상대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절대적인것에 대한 견해가 다르고, 서로 거짓이라고 우기기 때문인것 같기도 하다.
영화에서도 꿈(현실이 아님)에서 꿈(현실이 아님)으로 빠져 들수록 더욱 혼란해지고 위험한것이라고 한것 같다.

멋대로 영화에 대한 감상을 써봤다.

영화의 결론을 못봐서 조금 아쉽다... 조금있따. 결론을 인터넷으로 찾아 봐야 겠다.

2010년 8월 2일 월요일

기억으만 간직하고픈 것들

달은 언제나 지구 주위를 돌뿐
가까이 갈수 없습니다.
그렇게 운명지워져 있나 봅니다.

지구는 언제나 태양주위를 돌뿐
가까이 갈수 없습니다.
그렇게 운명지워져 있나 봅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주위를 돌뿐
가까이 갈수 없습니다.
그렇게 운명지워져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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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창사이로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나무들이 보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것인가 봅니다.
저는 오늘도 도서관 창앞에 앉아 있습니다.
눈이 오려는지 태양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요즈음 들어 학교가 아름답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곳을 점심을 먹고 산책삼아 둘러 보고 있습니다.
주위는 예전에도 아름다웠겠지요.
그런데 그때는 몰랐는지, 아쉬움이 머리를 덮습니다.

---

저녁에 갑자기 마누라가 이것을 보고 뭐냐고 닥달하길래 뭔지 보았다.
예전에 학교 다닐때 썼던것 같다.
이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기억나는게 있긴 하다.
가끔은 혼자의 기억으만 간직하고픈 것들이 있다.

2010년 7월 31일 토요일

인생도 바둑처럼

바둑을 잘두지 못한다.
한 10급 정도 된다. 그래서 바둑에대해서 이야기하는것 자체가 별로 신뢰성이 없을수 있다.
그냥 내 생각이다.
바둑을 잘둘수록 하나 하나의 수는 중요하다.
아니 1급과 5단과 10급이 생각하는 각 한수의 중요함은 급수가 올라갈수로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것 같다.
하나의 수는 다음수와 연결되고, 크게 전체의 형세와 연결이 된다.
그러나 급수가 낮을수록 한수의 다음수와의 연관성은 떨어진게 된다.
이런 측면도 있을수 있다.
10급은 10급과 주로 게임을 하고 1급은 1급과 주로 게임을 하고 5단은 5단과 주로 경기를 하기때문에, 1수의 연관성은 1급 10급 5단과 달라도 별반 지장이 없을수도 있다.

바둑이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연결이 될수도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바라보는 삶, 내자신, 세상이 항상 어느정도 맞다는 의식속에서 살고 있다.
만약 이러한 의식이 없다면, 나는 항상 불안속에서 살아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삶자체가 틀릴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것 자체가 나에게 불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틀릴수 있다는 불안 자체가 나를 성장하게 만든다.

내가 삶과 내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급수를 바둑과 비교해서 10급이라면, 1급과 5단의 삶에 대한 관점은 다를것 같다. (사실 그것을 바둑과 같이 계량화해서 나타낼수는 없다.) 내가 바라보는 의미는 급수가 다르기 때문에 능력이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고, 급수가 올라 갈수록 삶을 살아갈때 하루하루, 하나의 사건, 하나의 행동들에 대해서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하루 하루의 생활은 그냥 대충 흘러간다. 바둑 한수 한수처럼,
초보자는 한수 한수가 다음수와의 연관성이 약하다. 그리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9단의 경우는 한수 한수가 서로 아주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고,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각각은 아주중요한 수이다.

내삶에서 지겹고, 나른하고, 시간이 남아서 시간을 때울 것을 찾고 하는것 자체가, 삶과 내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초보자임을 나타내주는것 같다.

10급과 10급이 둔다면, 별반 1수 한수에 대해서 불안을 가질 필요도 없을것 같다. 그냥 하던데로 하게 된다.
10급인 내가 9단과 바둑을 둔다면, 내가 두는 한수 한수에 대해서 확신을 할수 없고, 틀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상대방이 내 한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에 빠져 나의 방식이 없어 질수도 있다.
그러나 불안감은 내가 성장을 할수 있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인생에 있어서 과도한 불안감이 우울증이나 기타 병적으로 발전을 할수도 있지만...)
9단은 10급을 알아 볼수있지만, 10급은 9단인지 1급인지 5단인지 알수 없다.
단지 나보다 잘둔다는것만 알수 있다. 인생의 고수들은 한번의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인 나를 파악 할수 있으리라 하는것도 연관지어 생각해볼수 있을것 같다.

결론은 바둑을 배워서 올해까지 5급으로 가보자.
인생도 바둑처럼... 한수 한수를 낭비하지 말아야겠다.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엉뚱한 생각

어제저녁 부터 1시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 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첫 페이지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쭉 읽어 오고 있다.
책은 1시간 읽고 2시간정도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하는데, 내용이 잘 이해 되지 않으니 생각할 부분도 별로 없고 잡생각만 하다가 잠이 들었다.
오늘도 30분 정도 읽었는데 그만 읽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한부분이 눈에 들어 온다.
" 완벽하게 건강한 인간이란 단 한사람도 있으수 없다고 의사는 말 할수 있겠으나, 똑같이 우리도 인간을 잘 알게 되면 어떤 의미에서 절망하고 있지 않은 인간은 한사람도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내면 깊숙이 어떤 동요, 불화, 부조화, 불안을 느끼고 있지 않은 인간은 하나도 없다. 알지 못하는 어떤것에 대한 불안, 도대체 알게 될것 같지 않은 어떤것에 대한 불안, 생존 가능성에 대한 불안, 혹은 자기 자신에대한 불안을 갖지 않은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누구나 정신의 병을 자신의 내부에 갖고있다."

사람은 누구나 정신의 병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마 나도 가지고 있을것 같다.
문제는 이 정신의 병이 사회생활에 영향을 주느냐 주지 않느냐가 사회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인것 같다.
아마 키에르 케고르가 말하는것이 이것은 아닐것 같지만 내 마음대로 생각해 본다.

누구나 꿈을 경험을 한다. 불안이 꿈의 가위 눌림으로 나타나고, 가위눌림이 내일의 일에 영향을 주고, 다음날 잠을 자는데 영향을 줘서 잠을 못자게 되고, 지속적인 불면증을 가져 오게 된다면, 생리현상이 뒤틀리게 되고, 시각의 정보와 청각의 정보들이 뇌에서 뒤엉켜서 엉뚱한것이 보이는 환시가 보일수도 있고, 환청이 들리수도 있을것 같다.
그 현상이 사회생활에 지장을 주고, 주위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비정상이 되는것 같다. 주위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그사람에게 작용을 해서 더욱 의식하게 되고 더욱 비정상이 되어 가는것 처럼 보이고, 생리현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것 같다.

환시가 보일수 있고, 환청이 들리수 있느데, 그걸 비정상으로 생각 하고 주위를 의식 하기 때문에, 더욱 불안이 가중되는것 같다. 불안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더큰 불안을 낳고, 자기 속에 갖히게 되는것 같다.

좋아 하는 음악을계속 듣고 있으면, 음악을 안듣고 있더라도 그 음악 소리가 들리는것 같고, 무서운 영화를 보고 나서, 혼자 어두운길을 걸어가면, 무엇인가 처다보는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도 환시와 환청과 비슷한 현상일것 같다.

문제는 내 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세심히 신경을 쓰면 더욱 예민해 져서 더욱 의식하게 되고, 문제가 되는것 같다.

누구나 다 비정상적이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엉뚱한 이야기만 한것 같다. 읽고 있는 책과 상관없는듯한...
자러 가야 겠다.

돼지갈비

와이프와 같이 돼지갈비를 먹고 왔다.
먼저 돼지갈비를 초벌구이를 해서서 가져와서 숯불에 구워 먹었다.
한번 살짝 구워져 오기 때문에 그냥 생갈비를 굽는것 보다 간단히 먹을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맛은 중상정도 였고, 소스의 향이 조금 독특해서 갈비의 맛이 조금더 맛있었던것 같다.
소갈비는 비싸기 때문에 우리는 돼지갈비로 만족을 한다.
사실 소갈비가 더 맛있긴 하다. 그중에서도 한우가 맛난다.
한우가 맛있는것은 수천년동안 한반도의 토양과 우리입맛에 맞게 적응되어져 있어서 다른 수입소고기 보다 맛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양념이나 굽는 방식도 한우의 육질에 맞게 최적화 되어 있어서 맛을 배가 시키는것 같다.
아마 미국사람은 미국소가 호주사람은 호주 소가 맛있으리라 여겨진다.
각 소고기에 맞는 조리법이 있을것 같다.

와이프가 그 소스를 연구하기로 했다. 간장, 와사비, 식초, 설탕, 정도는 들어 가는것 같은데 인터넷이나 기타 자료를 찾아 봐야할것 같다. 주인한테 물어 봐도 가르쳐 주진 않는다.
소스를 만들더라도 집에서 구워먹지는 않을것 같다.
와이프는 집에서 고기 굽는걸 싫어 한다. 일단 준비할것 들이 많이 있고, 아파트라 숯불을 사용할수 없고, 냄새가 집안 곳곳에 스며 들고, 설것이할것 이 많아서 등등 이유때문이다.
나는 집에서 먹는게 좋다. 돈이 적게 든다.

이 돼지갈비집의 특징중의 하나는 공기밥은 시켰는데 된장찌게와 김치찌게를 같이 준다는 것이 었다. 다른 곳은 되장찌게만 주는데, 여기는 사이다도 하나 서비스로 줬다.
맛을 제외하고도 다른곳보다 좋은 점이 이 두가지 이다.

와이프는 삼계탕을 먹고 싶어 했는데 내가 반강제로 돼지갈비집으로 데로고 갔다.
그나마 맛이 있었기에 와이프의 잔소리로 부터 벗어 날수 있었다.

2010년 7월 25일 일요일

방어의 개념

일상을 살아 가면서 방어라는 개념은 아주 수동적인 개념으로 생각을 해왔다.
방어자체가 수동적인 것은 아닌것 같다.

"방어라는 개념은 타격을 막는 것이고, 방어의 특징적 요소는 타격을 기다리는 것이다"
전쟁과 경영이라는 책의 한구절이다.

'특징적 요소는 상대방의 타격을 기다리는것'이라는 의미가 눈에 들어 온다.
타격을 의도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정신적으로 힘든 일인것 같다.
하지만 타격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타격에 많은 손실을 입어서는 안된다.
방어의 목적이 승리이기 때문에 반격을 위한 힘은 남아 있어야 하기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방어 할일도 공격할일도 없으면 좋을 것같다.
내가 살아 가는 공간이 적자생존의 공간이라면, 어쩔수 없이 공격과 방어를 배워야 할텐데, 현재로봐서는 진화론의 적자생존이 사회적 관념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것 같다.
어찌보면 진화론과 종교는 상반되는데, 어떤 종교지도자 분들도 무한경쟁을 외치고 있고
나또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걸로 봐서 적자생존을 현실로 받아 들이고 있는것 같다.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는데, 공격과 방어 기술을 갈고 닦으면서 한정된 인생을 보내는것이 의미 있는 일은 아닌것 같다.
살아 남는것이 목적이라면, 인간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죽음은 당연한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의미 있다라고 하는것을 모르기 때문에 현실에 적응 해나가려고 하는것 것은 아닐까. 그것을 안다며, 그것만 추구하면 되는데...

2010년 7월 21일 수요일

버스

나는 차가없다. 그래서 걸어서 많이 다닌다.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탄다.
버스는 밖을 볼수있고, 계단으로 내려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좋다.
예전에 반지하 전세에서 생활을 해봐서 그런지 지하는 별로 좋지 않다.
먼거리의 경우 버스는 너무 느리고, 버스에서 책을 보면 울렁거림이 심해 속도 울렁거린다.
그래서 버스는 가까운 거리만 주로 이용한다.

마누라 소원중의 하나가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들이를 가는것이다.
그런면에서 마누라에게 조금 미안하다.

2010년 7월 15일 목요일

가난하다는것

가난하다는것은 여러가지 제약을 가져다 준다.
사고 싶은것도 한참을 생각해야 하고, 하고 싶은것도 한참을 생각해야한다.
절약을 하면서 살아 가는것과 가난하게 살아간다는것은 보이는 측면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내가 쓰러져서...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수 없게 되었을때, 나는 어떻게 될것인다.
움직일수 없으니 돈을 벌수 없다.
어떻게 먹고 살것인다.
가족이 있으니, 나를 먹여 주리라고는 여겨진다.

허나,
와이프와 걸었다 포항바닷가도, 자주 올라 갔던 앞산도, 매일다니던 산책도 갈수 없어진다.
어머니한테 한번씩 가서 돌봐드리는 일도 할수 없고,
비오는 저녁 와이프가 해주는 해물파전과 막걸리 한잔도 할수 없어진다.
친구와 만나서 세상사이야기 하면서... 바람따라 걸어 가는일도,
노래방에가서... 목이 터지도록 노래부르던 일도 할수 없다.

친구들은 자주 못만나니 나를 떠나갈지도 모를일이다.

할수 있는 일이라곤 눈을 깜박이며, 과거를 회상하거나 신세한탄밖에 없을것 같다.
주위에서 말하는 긍정적으로 삶을 바라 보라는 말들도, 그냥 흘러 가는 말로서 느껴질것 같다.

찢어지는 가난함 이란 어쩌면 이런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가난이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것'
절약이란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것'
행복이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것'

나도 가난이란 말에 좀더 가까운 삶을 살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0년 7월 14일 수요일

감홍시 따기

하루 하루가 금방 간다는 생각은 진작 부터 했었는데,
무엇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손에 닿을곳에 홍시가 있는데,
감나무 꼭데기의 홍시를 따려고 하는 건 아닌지

손에 닿는 곳의 홍시를 따야 쉬운데

꼭데기의 홍시를 따려다
아래쪽의 홍시를 다 떨어 뜨리는 건 아닌지

2010년 7월 8일 목요일

눈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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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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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는 눈에 덮혀 숨을 헐떡인다.
태양은 대지를 구하려 하지만
그 빛은 힘을 잃은다.

대지는 숨을 헐떡이며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이들은 대지로 뛰어나와
눈사람을 만들며
조금씩 대지의 숨구멍을 튀운다.

이것은 10년 전의 이야기다.
이미 대지는 아스팔트에 뭍혀 죽었고,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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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너무 더워 10년 전에 써봤던 글을 올려 본다.

2010년 7월 6일 화요일

보이지 않은 것들

비가 그치니 조금씩 더워졌다
날씨가 사람 마음의 간사함 같이 변한 것 같다
아니면, 사람마음의 간사함이 자연을 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창으로 어두운 하늘이 보인다. 별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존재는 하지만, 구름 속에 가려진건지... 공해에 찌든 하늘 속으로 숨어 버린 것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것은 존재하지만,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별처럼 하늘에 있는 것은 아는데, 무엇인가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겠고,
처음부터 하늘에 별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 별이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를 일이다.

나도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 가는 것일 수도 있고, 아는데 못보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이니 시원하다

밤이 되면 꼭 하늘에 별이 있는지 바라 봐야 겠다.

2010년 7월 4일 일요일

행복이 인생의 목적일까.

일요일하루가 지나간다.
아침에 일어나서 교회에 갔다왔다. 일요일날 하는 하나의 일상이 된지 거의 3년이 조금 넘었다
그렇다고 교회에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간혹 인사 정도 하는 사람들이 있긴하다.
처음 2년정도는 설교를 들을때 잠만왔던것 같다.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읇는다고 했는데..
나는 5년정도는 읇어야 될것 같다.

요즈음 책을 조금 읽으려고 하는데.. 편식을 하려는 경향이 생기는것 같다.
잘못하다가 내가 내스스로 세뇌를 시킬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바라보는 관점의 책만 본다면,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관점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현재의 시선이 더욱 강화 되어서 나만의 세계속에 갇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책을 선택하고 읽기 시작하면, 읽는 동안은 기존의 나의 지식과 비교하지는 말아야 겠다.
일단 그대로 읽고, 다 읽은 후에 내가 가진 시선(관점)과 비교해서 버릴것 버리고 취할것은 취해야 겠다.
기존의 시선도 버려야 할것이 있으면 버려야한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가져 왔는 관점을 바꾸기가 어려워 지는것 같다.
이관점을 바꾸게 되면 과거에 내가 해왔던것을 반성해야할 경우가 생길수도 있고, 용서를 구해야 할 일도 생길수 있다. 이렇기 되지않기 위해서 기존의 관점을 강화 시키는 방식으로 삶이 흘러가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 해주는 이론을 찾고, 강화 시키고...

어찌보면 이게 더 편안한 삶일수도 있을것 같다.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만 만나고.. 책을 보고...신문을 보고 이 속에서는 나는 틀지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행복할것 같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일까.

2010년 7월 1일 목요일

따뜻한 시선

자다가 일어 났다.
지금이 새벽 4시, 맞은편 동의 한집만 불이 켜져있다.
마누라는 자고있다. 잠안자고 켬퓨터를 하는것을 본다면, 한 잔소리가 날라 올것 같다.

어제 뉴스에서 유명한 분이 자살을 했다고 나왔었다.
상당히 힘들게 살아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힘듬이 죽음의 공포까지도 밀어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힘듬은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 었으리라 여겨 진다.
그분을 위해 잠시 기도를 해야 겠다.

몸의 건강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다.. 배가 나온 나는 조금 덜 노력을 하는것 같다.
그러나 육체적 근육은 커가지만, 마음의 근육은 점점 줄어 들어가고, 사회의 경쟁은 나로 하여금 불안을 가지고 살아 가게 만든다.
마음의 근육을 약하게 만드는 구조를 가진 경쟁사회에서...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사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것을 부인하듯이 살아 간다.
살아 남는 것이 인간의 목적은 아닐것 이지만..... 살아 남기위해 나도 발버둥 친다.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우리는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한다. 그 방황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은 의심을 만들고, 의심은 불안을 증폭 시킨다. 이런 과정들이 뇌의 일정부분을 과다하게 활성화 시키든지 혹은 과도하게 약화 시킨다. 우리가 기뻐하고 싶어도..슬프게 만들고.. 슬퍼하고 싶어도... 기뻐하게 만든다. 나에게 내가 없어 진다. 나락으로 빠져 들어 간다.
100만명의 군인으로도 100억의 돈으로도 나락에서 빠져 나올수 없다.

가장 좋은 약은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따듯한 시선인듯 하다. 겨울끝자락 배란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햇살이 봄의 전령이듯이..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따뜻한 시선... 그게 나를 나락에서 빠져나오게 할 힘이 되어 준다.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 가는것이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고, 나의존재 의미를 찾게 한다고 여겨 진다.

2010년 6월 30일 수요일

미치지 않고 살아 가는 법

자야 하는데...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지금 정신이 깨어 있는 상태가 아마 내일 아침에는 정신이 희릿한 생태로 영향을 미치리라 여기 지지만,, 내가 어리석은 관계로 그냥 말똥 말똥 눈을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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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에 새가 10마리 있다.
1마리는 웃고 있고. 9마리는 울고 있다.
나는 새장의 주인
새의 주인은 아니다.

1마리의 새는 울수 없다.
그렇게 태어났다.
9마리의 새는 웃을수 없다.
그렇게 태어났다.

1마리의 새는 우는척 하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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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라는 공간에 살아가면서... 때로는 우는척 때로는 웃는척 하면서 살아가야...
미치지 않는다..

2010년 6월 28일 월요일

첫인상

몇일전, 첫인상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 버스를 타지않고 5정거장 정도 걸어 갔다.
무더운 여름 뜨거운 햇살아래에서 생각한 첫인상에 대한 나의 공상은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충 생각에 남아있는 것을 적어 본다.

첫인상이란 '사람이 처음 상대방을 보았을때 처음 느껴지는 느낌' 정도일것 같은데, 예전에 보험 영업을 할때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많이 들었었다.
과연 첫인상이 중요한것일까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을 해본다.(몇일전 공상에서는 나름대로 완벽한 논리가 정리 되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잘안난다.)

누군가 처음 다른 사람을 보았을때 상대에 대한 느낌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존 본능의 중 하나 인것 같다.
예전 인간이 수렵생활을 했을때 처음 보는 동물이나 사람에 대해서 과연 그대상이 나에게 우호적인가 아닌가를 판별해야 그에 대응하고 잘 살아갈수 있었을것 같다. 이때의 한번에 상대방대한 첫인상에대한 판별은 생존에 직결 된것이 었으리라 여겨 진다.

하여튼 그 사람이 여러 동물을 만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첫인상으로 상대방의 우호도를 판별하는 능력은 좋아 지지 않았을까.

지금도 사람들이 첫인상을 중요하게 여기는것은 인간의 유전자에 저장되어 있는 본능적인 것일것 같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첫인상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므로 첫인상은 중요한것 같다.

그러나 내가 판별하고 있는 첫인상이 정확한것일까.
시각, 청각, 후각, 촉각등을 이용해서 정보를 뇌로 보내고, 뇌에 있는 기존의 기억들과 비교를 하게 되는것 같다.
인간의 기본적인 표정들, 기쁨, 슬픔, 분노, 초조등은 학습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닌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고 한다.
우선 뇌에서는 본능적인 표정을 일단 파악하고 자신의 경험을 비교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것 같다.
웃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것은 뇌에 들어온 정보가 자신의 경험들과 비교 하기에 앞서 표정에 대한 팍악을 우선 함으로 웃는 표정이 우선 호감이 간다 라고 뇌에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다.
일단 웃으면서 살아가면 첫호감도가 좋아질 가능성이 높은것 같다.

그리고 표정, 음색, 등을 자신이 과거에 경험했는 것들과 비교에 들어 갈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내가 중학교때 나를 괘롭히는 친구의 음색이나 표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사람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좋을 것인가. 아마 나쁜 기억이 상대방의 첫인상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가 뇌에서 나와서.. 나의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는 떨어 질것 같다.
이런 직접 경험뿐만 아니라. tv에 나온 악역을 하는 사람이나 선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느낌들도 우리 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첫인상을 판별하는데 영향을 끼치리라 여겨 진다.

문제는 내가 상대방을 파악하는 첫인상이란게 정확한가 인데..
내가 경험한 것들이 아주 작은 부류의 사람들이 엇을 경우, 내가 느끼는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이라는 것도 개인적인 선입견이 될수도 있을것 같다.

그리고 한사회가 사람에 대한 첫인상을 비슷하게 느끼는 것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일것 것이고, 접촉하는 미디어가 비슷하기 때문일것같다. 사회적 선입견도 첫인상을 정확하게 하지 않은 하나의 요소일수 있을것 같다.

잠이와서.. 글도 안되고... 내일 일을 하러 가야되기 때문에 자러가야겠다..

2010년 6월 22일 화요일

불안감

1과 2사이의 정수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사이에는 무한대의 수를 포함하고 있다.
1과 10사이의 정수는 2,3,4,5,6,7,8,9를 포함하고 있지만...그뿐만 아니라.. 무한대의 숫자를 포함하고 있다.
1과 2사이처럼 아무것도 없는것 같지만 무한대의 숫자를 포함하고 있는것 처럼, 어떤사람은 아무것도 아닌것같은에도 무한대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무한대의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것 같다.
이제 불안의 시대로 접어 들고 있다. 모든것을 가질수 있고.. 볼수있고 .. 느낄수 있지만...
1과 2 사이의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현상들이 미세하게 이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무한대의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인간이 100% 완벽한 만족을 줄수 있는것을 만들수는 없다. 언제나 부족한 무엇이가를 생기는 법이다.
100% 풍족으로 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 미세한 틈사이의 것들이 무한대의 불안감을 사람의 마음에 생기게 만든다.
풍족한 사회일수록 정신적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완벽하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힘들게 살아가는 경향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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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이 생기는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다.

한숨을 크게 쉬자.
다른 사람들도 불안하기 만찬가지이다.
나만 불안한것이 아닌데.. 걱정할게 못된다.

2010년 2월 3일 수요일

머리를 3일째 감지 않았다.

날씨가 추웠다. 그래서 머리를 감지 않았다. 3일째다.
그렇다고 방안에만 쳐박혀서만 있지는 않는다.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밖을 나가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야 밥을 먹고 그다음날 또 돈을 벌고 밥을 먹고 할수 있다.
힘이 없으면 돈을 벌수 없고, 돈이 없으면 밥을 먹을수 없다.
어떻게 하면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밥을 먹고 살수 있을것인가가 나의 화두이다.

오후에 빵을 5개 사서 친구 사무실에 갔다. 어제만든 빵 5개를 2000원에 파는 가격 경쟁력이 있는 빵이다. 빵가게 아가씨 인지 아줌마인지는 잘모르겟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항상 어제 만든 빵만을 사가지고 간다는건 알고 있다. 그분이 아는것은 내가 남자이고 어제빵을 사가지고 가고 좋은 인상(혹은 나쁜인상)을 가진 사람이라는것 뿐이고, 내가 아는 것은 그분이 여자이고 빵을 팔고 있다는 것 뿐이다.
둘관계의 매개는 빵을 사는 돈이다. 내가 빵살돈이 없었다면 그분을 볼일도 없었고, 그분도 나를 볼일도 없었을 것인데, 내가 돈을 벌기 때문에 빵을 살수 있었고, 인과 관계의 시작은 돈에 의해서 시작 된것 같다. 내가 빵을 사고 그분이 빵을 팔고 하는 관계로서만 인연이다.
우리 동네 슈퍼마겟 주인 아저씨와의 관계도 빵가게 아가씨와의 관계와 다른것이 없다.

그 아가씨는 나에게 맛있는 빵을 팔기도 하고 맛없는 빵을 팔기도 한다.
내가 배가 고플때는 맛있지만 배가 부를 때는 맛이 없다.
맛없는 빵을 팔았다고 그아가씨는 잘못이 없다. 맛이 없었을 당시 내가 배가 부르기 때문일것이고, 배가 부른상태를 그 아가씨가 만든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빵이 맛있고 맛없고는 그아가씨의 선택이 아니라 나의 문제인것 같다.

사실 내가 머리를 3일 동안 감지 않은것과 빵의 맛과는 관계가 없는 것같다.
그러나 머리를 감았으면 활동량이 조금 증가 했을것이고, 에너지 소모가 조금더 있었을 것인데, 그만큼 빵맛도 증가 했었을 것 같다.(아닐수도 있고...)

오늘의 세상읽기 (최소 6.25%의 보편성을 가질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 빵맛은 내가 빵을 먹는 시점의 상태가 결정한다.

2010년 2월 2일 화요일

나는 방금 간식을 먹었다.

나는 방금 간식을 먹었다.
살이 쪄서 살을 빼야 하는걸 알고 이지만, 시간이 24시에 가까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살이 찌는걸 알고 있으면서.. . 자고 나면 아침에 속이 뒤집힐것 알면서도 구운감자와 고기를 먹었다.
먹는 순간 달콤함과 고소함과 만족감과 포만감이 몰려왔지만, 내일 아침을 생각하며 후회하고 있다.
나는 바보인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간식을 먹게 한것일까. 먹은 후에는 왜 후회를 하는것일까.
미련함이 나의 특징인것일까. 아니면 내 마음을 내가 통제할수 없는 것은 아닐까.
내가 내마음을 통제하는것일까. 내마음을 통제하는 것들이 내머리속에 있는것일까.
신이 내마음을 통제하고 있는것일까. 그렇다면 신은 왜 나에게 유익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방치하고 있는것일까.
악마가 있어 나를 유익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거 가는 것일까. 그렇다면 악마는 또 내 잘못을 반성하도록 방치하고 있것일까.
신도 없고 악마도 없는데 그냥 내멋데로 살고 있는것일까.

지금 잠을 빠져 있지 않고 글을 올리는 것은 간식을 먹었기 때문인데... 간식을 먹는다는 행위가 내블로그에 처음으로 글을 올린다는 행동을 위해 예정된것일까.

방금 먹은 간식에 대해 내멋데로 생각했듯이 이 블로그도 내멋데로 세상을 한번 보고져 한다.
수많은 오류도 있을 것 같은데, 혈액형이 4종있고(더있는지는 과학적으로 나는 알지못함), 사상체질이 4종있으니까. 생각하는 부류도 4가지로 나누면 25%정도의 신뢰성은 가지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 보다 낮은면, 2의 4승인 1/16 인 6.25%의 신뢰성 이상은 되지 않을까 보여 지기도 한다.

이제 이블로그를 통해 내멋데로 세상을 읽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