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8일 일요일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까. 인화가 답인것 같다.

사람들은 왜 정치를 혐오하면서, 각자 지지하는 정치인이 있는 것일까.
'누구나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라는 어느 정도의 생각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타락한 곳이 정치라고 생각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정치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라고 정치를 정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사람이면 나를 잘살게 해줄수 있을 거야, 이런 사람이면 내가 직면한 고통을 이해해 줄수 있을거야..
어찌보면 사람을 살리는 의미를 정치인에게 기대 하고있는지 모를일이다.
자신을 살릴수 있는 사람이 현재는 정치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정치를 하면 좋을 거야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갈등은 왜생길까. A라는 사람이 나를 살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B라는 사람이 A를 공격하면, B는 A와 정치적 경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나를 살려줄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으로 느껴지고 그에게 혐오가 생기게 되는것 같다.

국민이 어느 정치인을 지지 하든, 아마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 하는 정치인을 자신들을 살리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 가능성이 큰것 같다.
자신을 살린다라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느낌이므로 동일한 행동을 보더라도 각자가 느끼는 상황은 달라지므로 각개인을 지지하는 정치인이 다를수 있다.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것은 자신을 살릴수 있는 사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공격하는 상대방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았을때 스스로 예측하는 미래의 불안정성의 심리적 표현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는 경쟁이고 경쟁에서 이기는 쪽이 대통령이 된다.
맹자에 '천시(天時)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 이런 말을 본것 같다.

현대 정치에서 천시는 무엇이고, 지리는 무엇일까.
천시란 정치적 선거가 있는 시점의 이슈의 선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많은 분들이 분배라는 이슈가 나(개인)을 살릴수가 있겠구나 했고, 그다음 경제의 성장 자체가 개인을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사람들은 '경제의 성장이 나를 살리는 일이 아닐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것 같다. 그래서 복지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나(개인)을 살리는 정치인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 나기 시작한것 같다.

다음 대통령 선거의 시점에서 천시는 '복지'라는 단어를 선점한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될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복지 라는 단어의 선점이 대통령으로 바로 가게 만들수 있을것 같지는 않고, 두개의 세력을 대표할 사람들이 될수 있는 것 같다. 천시를 얻어서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시를 얻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기위한 양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수 있게 하는 키워드가 될것 같다.

그리고 지리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인것 같다. 그 과거라는 것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 일수도 있고, 자신이 쌓아온 이미지 일수도 있지만 지역적 기반이 중요한것 같다. 두명의 후보가 나오게 되면 그사람들의 지역적 기반이 어디인가에서 지형의 불리함을 가지고 경쟁을 할수도 있고, 유리함을 기반으로 경쟁을 할수도 있게 될것 같다.

마지막이 인화인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인화인것 같다. 앞의 두개에서 앞어가도 인화가 깨어지면 경쟁에서 진다라는 것은 확실하다. 대부분의 승부에서 지리도 중요했지만, 대부분 인화에서 승부가 난것 같다.
두개의 세력이 있는데, 한세력 내부에서 갈등이 있으면, 대선의 승부는 불리하게 돌아간다.
좋은 사례가 아닐수도있지만, 결과적으로 3당 합당이 있었고, DJP 연합이 있었고, 경선에 불복한 경우가 생겨서 인화가 깨어진채 선거가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이제 대선을 준비하는 많은 분들이 천시를 얻기 위해 도전을 하게 된다.
천시를 얻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하는 도중에 서로 갈등을 하게 될수도 있다. 천시를 얻었지만 인화를 잃어 버려서 큰것을 놓지는 사람이 나올수도 있을 같다.

얻기 위해서 손에 있는것을 놓아야 한다. 인화란 내손에 있는것을 놓는것에서 시작하는 것같다.
아무리 유력하더라도 내손에 있은것을 놓지 못하면, 인화는 깨어진다.

2011년 8월 15일 월요일

요한일서 4장 믿음 사랑

저녁 집으로 오는길 작은 할머니가 자신 보다 등치가 큰 폐지들을 손수례에 싣고 가셨다.

그 손수례에 들려가는 폐지의 가격이 내가 들고가는 빵의 가격 보다 작게 나가 보였다.

그분이 오늘 하루 나보다 더 적게 일하신것은 아닐것 같은데, 나는 더 큰 걸 들고 집으로 향한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는 교회에 다닌다.



오늘 본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할머니의 어께에는 자신보다 더 무거운 짐이 놓여져 있다. 자신을 생존을 위해 하루 하루 살아 가실수도 있고, 몸져누워있는 자식을 위해 자신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 가실수도 있을것 같다.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이 그분을 외면하고 계셔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시는 것일까.

그분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살아가는데,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 가는데, 하나님이 사랑을 지키시는 분을 외면하고 계시는 것일까.



믿음이란 무엇일까. 교회에 나가는 것이 믿음일까.

내가 "믿는다"라는 말로 표현할때만이 믿는것일까.

믿는다고 말을 하는데, 사랑을 외면하면서 살아 가는것도 믿는것이 될수 있는것일까.



할머니는 자신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데, 나는 그저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빵을 들고 가면서 외면하면서 그냥 지나가고 있는데 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있는것일까.



나는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



사랑하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보다 무거움 짐을 지고 가고 있는 할머니가 오히려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것은 아닐까.



"요한일서 4장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일서 4장 8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그 사랑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를 아타까운 마음을 보라보고 계신것을 아닐까.

그 할머니는 믿음을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 어느 연설가가 목소리나 몸짓에도 진리를 넣어서 자기도 깊이 감격하고 또 사람을 깊이 감격시키면서 매우 감동적으로 진리를 설명하고, 태연한 태도와 대담한 눈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확고한 발굴림으로 모든 악과 모든 지옥의 힘을 딛고 일어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닥에 거의 끌릴 듯한 호사스러운 의복을 입은 채 아주 사소한 곤란에 대해서도 비겁하게 두려워하며 살며시 도망치는 일이 있다면, 그것도 또한 무한히 익살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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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이 뚫고 나간다. 누군가가 정당한 것을 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즉 그는 이해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해하고 있다는 그의 단언은 그릇된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中 -

2011년 8월 7일 일요일

단어의 의미 / 독도

무더위, 열대야, 여름, 찜질방, 용광로 이런 단어들을 본다음 팥빙수의 느낌과,
시베리아, 강추위, 배탈, 장염, 냉방병, 이런 단어들을 본다음 팥빙수에 대한 느낌은 조금 다르리라고 여겨진다.

어떤 하나의 이미지/느낌 이라는 것은 앞에서 일어난 것들과 연관을 가지면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카키고오리' 라는 단어를 들으면 이 단어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미지가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가 처한 어떠한 상황에서 하나의 말은 이미지로 만들어 지기도 하고 아무의미가 없는 것으로 지나가기도 한다. 카카고오리라는 일본어가 팥빙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팥빙수의 이미지를 가질것이다. 아마 각각의 개인은 각각의 다른경험과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팥빙수것에 대한 다른 이미지를 생각해 닐것이다. 팥빙수를 먹어보지도 들어 보지도 못했다면 그냥 아무 의미가 없는 것에겠고...

일반적으로 이런 단어의 이미지 효과를 잘아는 사람들이 정치인으로 성공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봤을때 아무런 의미라 없는 말 '우리가 남이가' 라고 했을때 이 문장이 가지는 의미에대해서 아무런 경험이나 정보가 약할때 그냥 아무 말도 아니게 된다.
그러나 어떤 지역적 상황에서 이말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의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긍정적일때 일정 지역에서는 "우리가 남이가" 라는 단어가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지역에대한 경험이 없거나 정보가 부족한 경우는 왜? 라는 의문부호를 단다.

재정적자, 초대형쓰나미, 원자력발전소, 가난한 국민, 내각에대한 지지율, 자민당, 일본, 이런 단어들을 들은 다음 독도라는 단어를 놓게 되면, 아마 현재 일본이 독도에 대해 도발을 하는 원인은 자국 국민의 불만을 대외로 돌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 이라고 이미지를 만들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일본내에서는 이러한 단어의 나열 다음에 독도를 넣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의 단어들 다음에 독도를 넣을것이라고 예측이 가능하다.

언론은 중요하다. 언론은 앞의 단어들을 만들어낸다. 일본국민들이 독도에 대한 이상한 망상을 가지는 것은 일본 언론이나 권력이 독도 앞에 우리가 생각하는 말과 다른 군국주의를 회상할수 있는 단어 다음에 독도를 넣기 때문에 일본 국민이 왜곡된 독도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언론이 갈수록 힘을 가지는 이유가 앞의 단어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기 때문에, 깨어 있지 못하는 개인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더라도 앞의 단어들에 여향을 받아서 언론이 만들어낸 이미지 속에 같히게 되는 사회로 갈수 있을것 같다.

그래서 서로 대립되는 언론이 필요한것 같다. 조선일보도 필요하고 한겨레신문도 필요하고...
그러나 힘의 균형이 필요한데... 지금 그 힘의 균형이 무너져서 한겨레신문을 좀 사봐야 할것 같다.

오늘도 헛소리를 적어 놓는다.

2011년 8월 2일 화요일

요한복음 15장 '사랑'

최근에 요한복음을 읽었다.
'15장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15장 12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5장 17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삶을 살아 가면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없으면 공허하다. 인생이 무의미하다 라고 할때, 내가 하고자 하는것, 그 하고자 하는 것이 없을때,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공허하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 사랑을 통해서 영원히 살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것 같다.

'15장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장 23절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누군가를 미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도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옆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징표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징표이다.

'15장 14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나는 교회에 다닌다. 원망도 생기고 미움도 생긴다. 믿음에 아직 의심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일까.
사랑을 통해서만 영원히 살아 갈수 있다라는 말을 하는것 같은데, 아직 나는 멀리있다.
아직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예수를 믿는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