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5일 토요일

파파로티 / 빌리엘리어트의 감동을 그대로...

거금 4000원을 주고 영화를 다운 받아 보았다.
파파로티

영화 내용은 뻔하다.
제자가 나오고, 선생님이 나오고, 마지막 장면은 빌리엘리어트 닮았다.
영화가 빌리엘리어트와 조금 비슷한 느낌이 드는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조금더 한국적이다.

모든걸 뻔하다고 생각하면 하지않는다.
그러나 그 뻔하다고 하는 속에 다른 느낌이 들어 있다.
뻔하다는 생각속에 있으면 자꾸 뻔한것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러면 모든것은 뻔한 것이 되고, 내가 생각한 데로 뻔하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뻔하다는 생각을 지우고 보면, 새로운것들이 보인다.

이영화의 시작과 끝은 예측가능하다. 그러나 재미있다. 감동이 있다.

한석규가 선생님이다. 제자를 만난다.
그 제자를 사람만드는 과정이다. 아니 그가 가진 능력을 펼쳐내게 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할때 이렇게 생각한다. 희생한다고 생각한다.
그 희생이라는 것 때문에 완전히 뛰어 들어가지 못한다.
정신적 고통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를 돕고 싶다 그러나 완전히 뛰어 들기란 어렵다.
'희생'이라는 말이 가로 막는다.

한석규는 그 제자에게 뛰어든다. 과연 희생을 위함이었을까.
희생이 아니라 그속에 자신의 구원이 동시에 보였기 때문이다.
좌절된 삶속에서 의미없음 속에서 자신의 구원이 그 제자 속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속으로 뛰어든다. 그게 그 제자의 구원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희생인듯 하지만 자신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주위의 고통을 외면하고 싶어지기도한다.
모르면 미안할 필요도 없고, 내 삶에 방해도 되지 않을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피할수 없는 고통들이 있다. 주위사람들로 인한...
그것으로 부터 벋어나고픈 생각이 든다.
그리고 누군가 나의 고통을 알아 줬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에서 한석규는 내마음처럼 등장한다. 관심이 없다.
중간보스가 이렇게 말한다. ' 내일도 뭐할지 모르겠다'
모두 고립되어 홀로 존재한다.
그래서 모두 내일 뭐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 마음속으로 뛰어든다.
희생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 간다.
내일 할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자신을 살리는 길인듯 하다.

다시한번 영화는 뻔하다.
뻔하다고 생각을 버리고 보면 뻔하지 않을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를 느끼고 호흡할수 있다.
웃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음악에 취하고...
다보고 나면 역시 내생각데로 영화가 흘러 가는구나. 알수 있다.
그러나 느끼고 호흡한 경험은 내속에 남는다.

이제훈이 부르는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못이루고' 한번 들어 보고 자야 겠다.
공주는 잠을 못이루지만.. 나는 잠이 온다.
오래전에 마누라하고 오페라를 보러가서 한번 들어 본것 같다.
그게 언제였는지도 생각이 안나고, 그때의 감동도 생각이 안난다.
생각이 나든 안나든 그때의 감동을 느꼈으면 그만인것을....

2013년 5월 16일 목요일

세상의 시작 / 진리는 이것만이어야할까.

세상의 시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시작을 본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시작되었다라고 많은 종교에서 이야기한다.
어떤 세상의 시작이 정확하다고 믿기 전에 수많은 시작에 대한 이야기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각자기 서있는 위치에서 맞지 싶은 어떤것을 선택한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 시작은 하나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결국 하나는 맞고 나머지는 다 틀린 것이 된다.

우리는 어떻게 선택을 하는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영역속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세상의 시작에 대한 선택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반영한다.
세상의 시작에 대한 믿음속에 각자의 역사가 포함된다.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어떻게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한것 일까.
아니면 내가 세상의 시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까.

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별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거짓이므로 필요없는 것일까.

어느새벽 정화수를 떠놓고, 군대에간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미니는 잘못 믿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것만이 진리이다' 이것을 넘어서야 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나의 진심이다' 라는 것이 '이것만이 진리이다'를 넘어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종교는 진리의 문제를 넘어서는 진심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종말론에 관해서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은 종말을 바라는 것일까.
참 희얀하다. 그런 생각을 한적이 있다.
사람이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을 포기 한것일까. 궁금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종말론을 믿는 사람은 종말을 넘어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믿는 것같다.

어떤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의해 모든 사람들에게 종말이 오더라도 자신들은 그 종말에서 예외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임박한 종말에서 예외가 되고자 모든것을 헌신한다.

북구의 신화에서 종말의 전조는 세상의 혼란이라고 한다. 도덕이 무너지고 정의가 무너지고.. 무든것이 혼란한 상황이 전조하고 한다.
사람이들이 임박한 종말이 가까이 왔음도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계가 혼란해졌기 때문일것이다.
성경에서는 의인 한명이 없어서  한도시가 멸망한다.
임박한 종말을 믿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믿을 의인 1명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일것이다.

사람은 각자의 세계속에 살고 있다.
그 세계가 풍요로움의 연속일수도 있고,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일수도 있다.
종말은 이세상에 믿을 대상인 의인을 한명도 발결할수 없는 세계속에 있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것일수 있다.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는 것은 세상에 고립되어 이상태로는 살수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인것 같다. 이성적이 종말론이 맞다 틀리다 말할수 있다.
그러나 고통때문에 종말을 바라는 사람들은 그 맞고 틀리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종말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면 현실이 지옥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임박한 종말을 믿는 사람들을 시비지심으로 바라보면 그들이 틀린사람이다.
그러나 임박한 종말을 믿는 사람들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면 그들을 이해할수 있다.

종말론은 한계상황에 마주해서, 도저히 버틸수 없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작의 희망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섹스하다 / 언어는 어떻게 나에게 다가오는가

관계를 맺다
정사를 나누다
교접하다
성행위를 하다
성교하다
섹스하다
빠구리치다
씹하다

네이버사전에 '육체적 관계를 맺는것'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하나의 상황을 두고 다른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뉘앙스는 조금씩 다르다.
사람마다 다가오는 느낌도 조금씩 다를 것이다.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언어의 선택을 달리한다.
좀더 직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아래쪽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성욕을 느끼게 만드는 언어는 어느것이 더 할까.

정치미디어 전문가들은 언어의 선택에 사활을 거는것 같다.
어떤 단어를 선택할것인가.
어떤 정치인이 공식적으로 하는 말은 실제로 유권자의 감정의 변화를 염두해 두는 것같다.

성욕이 발동할때 우리는 구글에서 어떤 검색어를 사용할것 인가.
가장 야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를 써서 검색할것이다.
각자 성욕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는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을 성욕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를 잘알고 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도 잘알고 있다.
내가 선택해서 내 감정을 움직이느냐, 누군가에 의해 움직여 질것인가.(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좀더 정치적으로 들어 가본다.

일반적으로 부인을 소개할때 '우리 부인이다' '혹은 '우리 남편이다'라고 말한다.
영어로 our wife or our husband 라고 표현되지만, 미국에서 이렇게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들은것 같다.
'우리'라는 용어가 지역적으로 다르게 쓰이는것 같다.

'우리가 남이가' 라는 현상이 있었다.
두개의 단어가 무엇인가를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비록 그 사람이 잘못을 한것이 있어도 지켜주어야 할 어떤것을 포함하고 또는 내가 잘못을 해도 우리라는 테두리 내에서 용서받을수 있다라는 것을 포함한것 같기도 하다.
아마 혼란했던 우리나라에서 우리라는 테두리 네에서 보호받고 보호 해주었던 것이 녹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라는 용어에서 이러한 마음들이 녹아 있었는데 누군가 그 용어를 정치적으로  '우리가 남이가' 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남이가' 아주 무식한 말로 들린다.
그러나 그말을 사용했던 당사자들은 그 말이 상징하고 있던 것을 알았었던것 같다.
종교적 용어를 보면 안주 단순하다. 각인 되기 쉽고 그러나 그 종교적 말들 속에서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다.
그 녹아 있는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아마 이성적으로) 무의식적으로는 그 말을 느낀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아주 상징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말에 움직인다. 그 말에 움직이는 사람은 6.25를 경험하고 현대사의 격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여겨진다.

정치인들은 단순무식한 말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식한것이 아니라. 아주 상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 상징의 언어의 당사자가 되는 사람은 그 말에 반응한다.
시대에 따라서 드러나지 않는 여론의 흐름은 항상있다.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서 정치인들은 노력한다.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는 어떻게 보이면 무식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언어는 무의식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의 단어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려고 많은 정치인들은 비난을 무릅쓰고 그 단어를 품는다.

'우리가 남이가' 그냥 뭐 그런 무식한 말을 하는 정치인이 있느냐 이렇게 비난하고 말면 되일인지도 모르겠다.(지금은 '우리가 남이가' 라는 용어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것 같다.)
 
친구들이 모여있다. 한친구가 다른 친구를 도와주면서 '우리가 남이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의미를 경험한다. 경험은 무의식으로 쌓인다.

누군가 나의 무의식을 깨운다.  그것이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상징성이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는 깨어있어라 하는 지도 모를일이다.
정신분석이라는 것이 무의식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인데...

몇일 전에 했던 일을 기억해보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의식 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일수도 있을것 같다.
하루의 대부분은 무의식 적으로 행동한다.
우리의 행동은 의식적 행동보다는 무의식적 행동이 더 많다.
무의식에 호소하는 언어라는 것은 상당히 강력하다.
종교적 언어는 단순하면서 반복을 요구한다.
그래서 종교적 언어는 믿는사람에게 아주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 강력함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반대일수도 있게 한다.
드러나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가 남이가' 를 듣고 행동의 변화가 오는 사람에게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알게 모르게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 논리적인 것에는 마음을 닫는다.
논리적으로 어떤것을 도출하는 것보다, 자신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논리를 찾는 다고 하는 편이 맞는것일수 있을것 같다. 그 속에는 무의식이 있는것이 아닐까.
 
'레몬'이라고 했을때 침이 고인다. 그러나 이것은 레몬을 경험해보고 맛을 몬사람에게 나타는 것이다. 레몬을 모르는 경우는 침이 고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단어가 우리의 몸에서 자동적으로 침이 생성되도록 만든다.
 
미디어들은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단어들을 사용한다.
자신들의 맞게 변화되기 원하는 바램들이 들어 있다.
그 변화가 우리에게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선택은 '내'가되어야 한다.
 

2013년 5월 10일 금요일

장자 응제왕 마지막장 / 혼돈 / 있는 그대로 바라보다

장자 내편 응제왕 마지막 장 혼돈의 죽음으로써 끝을 맺는다.
장자의 시작은 대붕의 비상에서 시작한다.
어찌보면 시작과 끝이 상통하는 듯이 보인다.
인간은 시작과 끝을 가진다.
대붕의 좌절로서 혼돈의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남해의 임금과 북해의 임금이 중앙의 임금 '혼돈'을  찾아 온다. 
혼돈을 최선을 다해 대접을 하고, 대접을 받은 두임금은 무엇을 해줄지 찾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최선을 한다. 그러나 그 최선이 혼돈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사람은 명확히 아는 것들이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의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바른것이 무엇인지 안다. 알기 때문에 그와 반대로 하는 사람을 보면 고쳐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상대를 변화 시키고 싶은 생각을 가진다.
자신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변화시키고 싶은 욕구는 커지게 된다.
'안다'라는 것에 대해 장자는 이야기 하는것 같다.
중앙의 임금' 혼돈'에게 두 임금은 베풀고 싶다. 자신들이 아는 명확한 어떤것으로써 행한다.
만약 자신의 앎이 혼돈에게 해를 끼칠수 있다라는 생각을 했었으면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들의 앎에 의심이 없었기 때문에 혼돈을 죽음으로 내몬다.

대붕을 절대적 경지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대붕인 '나'라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장자는 모든것을 아는 '나'가 대붕이 아닐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것 같다.
내가 모든것을 아는 사람, 혹은 선택 받은 사람으로 여기는 순간 그 명확함이 '독'이 됨을
이야기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우리각자는 대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붕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것으로 자각해서도 안된다. 대붕임을 잊어야 한다.
대붕이 되기위해서 앎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앎에 머무른다면 세상에 구별을 만들고 독이 되어버린다. 그 앎을 넘어 서야한다. 장자는 앎이 필요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앎을 넘어섬을 이야기 하는것 같다.

두 임금은 앎을 넘어서지 못한다. 앎에 머물러있다. 그래서 그 앎에 절대성을 부여한다.
그 절대성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 판단의 대상을 변화시키려 한다. 자신의 기준으로
절대적 판단 기준은 질서를 요구한다.
그래서 혼돈은 죽은다. 

장자는 죽음을 통해서 대붕의 좌절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닌것 같다.
이 사건을 통해서 초월해야할 어떤 것을 이야기 한다.
그것을 찾는 것은 각자에게 맞긴다.

현존재 분석에서 정신의 혼돈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할때 발생한다고 한다.
자신이 실현해야 할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이그러 질때 마음에 혼돈이 온다고 말한다.
그 이그러짐은 관계를 통해서 발생한다.
관계속에서 한쪽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할때 문제가 생기게 된다.
절대적 기준을 가진 한쪽의 눈에는 상대는 혼돈인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혼돈을 정돈하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상대의 병을 만들어 버린다.

살다보면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이 더힘든것 같다.
가만히 지켜봐주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변해 가고
가만히 키겨봐주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화가  요청된다.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자신을 고정된 상태로 남겨버린다.
역설적이다.

빅터프랭클의 '로고테라피'도 역설이라는 방식을 택한다.

삶이란것, 한번씩 뒤집어서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