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30일 화요일

우울증과 가족 / 긍정적인 감정의 효과

어떤 사람이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때, 아마 상당기간 우울증을 앓아 왔었는데 '그것이 우울증이다 라는 것'을 확인한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상당기간 고통을 느끼다 도저히 견딜수 없어서(그것이 가족이든 본인이든) 병원에 가서 그것이 우울증이다 라는 것을 안것이라고 보아야 할것 같다.

그것이 우울증이다 라는 것을 확인할때 까지 그 주위사람들은 우울증을 가진 사람으로 대한것이 아니라 '성격이 이상한, 혹은 예민한, 부정적인, 화가 많은' 사람으로 대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그러한 성격에 대한 대처로서 무시, 설득, 강제 등의 방법을 사용했을수 있을것 같다. 이러한 대처가 소용이 없에 됨을 알았을때 병원으로 갔을 것이고, 우울증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최초의 우울증의 시작에서 우울증인지 알았을때의 간격이 넓을수도 있고, 좁을 수도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간격은 꽤 될것 같다.

그 간격에서의 대응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면 우울증의 진단이 없엇을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라는 것은 그 사이의 일반적인 대처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 실패로인해 파생하는 문제로서 갈등이 발생할수 있었을 것이다.

우울증 환자가 가지는 일반적 분노라는 감정은 이 사이에 더욱 증폭될 가능성이 높을것 같다. 누구로 인하여 증폭하였는가. 그것은 그 옆사람들로 인하여 증폭하였다 이렇게 느낄 확율이 높을것 같다.

우울증이 무서운 병인것은 이 갈등의 양상이 지독하다는데 있는것 같다.
우울증 환자도 가족에 대해서 감정이 상해있고, 가족도 우울증 환자에 대해서 감정이 일정 정도 상해 있을수 있을것 같다.

우울증환자와 가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우울이라는 것이 어렵풋하게 나마 '슬프다'라는 우울이 아님을 알것이다. 분노 불안이 우울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주위에서는 긍정적인 감정을 가져라로 위로한다.
'슬프다'라는 것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극복이 가능할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분노나 불안이 오랬동안 쌓여서 우울한 형태로 드러나는 경우는 긍정적인 감정의 접근은 잘못되 접근이 될수도 있을것 같다.

우울증이라는 말속에서 우울이 '슬프다'를 의미하지 않을수 있다 라는 것을 빨리 알아야 할것 같다.

2013년 4월 25일 목요일

샤마니즘 / 엘리아데 / 우울증 퇴행

4월 장사가 잘안되니 좀더 장사하는데 시간을 투자하다 보니 책을 읽고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집에 오면 저녁먹고 쓰러저 잠이 든다.

대구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새로 생겼다.
책두권을 샀다. 신화와 현실, 샤마니즘 /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책들이다.
중고서점이라서 책가격이 저렴해서 나에게는 다행이다.

정신분석을 공부하다 보니, 어느순간 부터 자연스럽게 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를 믿고 있어서 다른 종교나 신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것이 조금은 불경스러운 것은 아닌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그런생각에서 많이 탈피하고있는것 같다.

프롬이 말했던가 (확실하지는 않다.) 사람의 마음을 x-ray로 알아 볼수 있다면 거의 99%는 각자의 우상을 숭해하고 있을 것(그게 기독교인일지라도)이라고

엘리아데의 샤마니즘은 기독교인으로서 조금은 불편한 책이 될수 있을것 같다.
무당이 나오고, 무당이 되는 과정들이 나온다.
그 무당이 되는 과정에 각기 다른 신들이 나오고, 어떤 판타지가 나온다.
무당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워져야 하고, 그 새로워지는 과정이 자신이 파괴되는 과정이다.
스스로 파괴되는 죽음을 통해서 새롭게 부활하고 그 부활을 통해서 능력을 부여받는다.

현재 우리는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아주 객관적인것 같지만 우리의 문화의 틀로서 만들어진 세상이다.  엘리아데의 샤마니즘들은 각부족들이 바라본 세상들이다.
우리는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라는 당위에서 세상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그속을 살아간다.
샤마니즘은 세상을 바라보던 틀이었다. 그틀속에서 세상을 바라보았고 생활했었다.

이제 샤마니즘은 힘을 잃었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우리는 각자의 샤마니즘을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종교관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각자 외운데로 논리적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운데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 행동은 무의식적인 경우가 많다.
그 무의식에 샤머니즘은 살아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많은 우울증이나 신경증을 가진 사람들은 일정 정도의 판타지(샤마니즘적 요소)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로인한 퇴행이 발생한다.
우울증때문에 판타지가 만들어 진것이 아니라, 우리속의 판타지가 우울증에 의해서 밖으로 드러난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2013년 4월 8일 월요일

나이 40

나이 40이 되었다.
가끔 나이를 잊었는데, 40은 기억에 세겨졌다.
어색하다.

한가지 변한게 있다.
길을가다 이리저리 둘러보면 같은 길을 걸어왔었는데,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서 서있는 위치에 따라서 길은 다르게 보인다
나는 같은 길을 걷고있다고 생각해서 한번도 그 길들을 자세히 둘러 보지 않았었는데, 자세히 둘러 보니 길은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깨어나서 눈을 떠야겠다.

눈을 뜨고 살아왔지만, 눈을 감고 살아온것은 아닐까.
나이 먹었다는것에 감사하자
내일은 또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다.

2013년 4월 2일 화요일

개나 소나 다한다.

'개나 소나 다한다. '
이 말속에 남과 구별되고자 하는 욕망이 포함되어 있다.

'남과 구별되어 드러나고 싶다.'라는 말을 직접하기 어려워서 '개나 소나 다한다'라는 말로 둘러서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이말속에 자신의 욕망이 한번 뒤틀려서 드러난다.

'개나 소나 다한다.' 라고 하는 사람들을 인정해주자.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데, 내가 인정해줌으로써 그의 욕망을 조금이나만 충족해줄시 있다면, 유쾌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