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불신지옥.... 사랑은 저주가 아닌데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할아버지가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아주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다.
그런데 치매에 걸렸다. 그 할아버지는 그가 교회다녔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고한다.
그가 교회에 다녔다고 하는 사실을 주위에서 확인해주지 않는 이상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가 치매에서 회복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수 없다.
고백하지 않는 믿음이 믿음의 가치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다.
치매에 걸리는 순간 이분은 기독교인이 아닌것인가.
치매에 의한것은 예외로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치매가 의학적을 발견되기 전까지 치매라는 현상을 나타낸 사람을 '믿음이 있다'라고 교회가 인정한적이 있었던가. 예전에는 인정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인정한다면 그것은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무수한 질물이 떠오른다.
그러나 감히 목사님에게 물어 볼수 없다. 도발적이다.
이러한 질물의 해답을 많은 사람은 기다린다.
'불신지옥' 이런말이 들린다. 이게 협박인가. '불신지옥'이라는 말은 많은 질문을 가로 막는다.
제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 이상한 질문을 한다고 말하면, 질문을 할수 없다.
궁금증을 마음속에 쌓아둔체 믿음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물음을 묻고 있고,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생각이 든다.

믿음은 나의 고백이다. 나의 신에 대한 고백이다. 나의 고백이 진실해져야만, 진정한 자신이 신앞에 다가가는 것이다.

많은 질문을 가슴에 쌓아두고, 판단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하고 있다면, 나의 고백은 진실하지 않는 것이 된다.

진실한 고백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든 물어 볼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무엇이든 물어볼수 있는 분위기는 되지 못한다.
자신의 진실한 물음을 감춘체, '이것이 믿음이다'라고 말하는 목사님의 말을 따라서 그렇게 변해 간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된 물음인가. 목사님의 물음을 내가 대신 하나님에게 묻고 있는 것인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의 믿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 할아버지의 믿음을 확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할아버지에게 누군가 와서 불신지옥을 외친다면, 그말은 폭력이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저주가 아닌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할수 있겠는가.
믿음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2012년 9월 28일 금요일

시련의 의미

아침에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 보았다.
내가 볼수 있는 것만 보였고, 들을수 있는 것만 들렸다.
내가 볼수 있는 것만 볼수 있고, 들을수 있는 것만 들을수 있다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살아온것 같다.
나는 제약 속에 있다.
내가 건강하고, 일들이 잘풀릴때 내가 제약 속에 있는 한정된 인간이라는 사실들을 잊어 버리곤 한다.
시련은 내가 제약 속에서 있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만든다.
시련은 그렇게 나쁜것 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고통스럽긴 하지만...

2012년 8월 16일 목요일

생각바꾸기 마음은 바꾸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생각이 바뀌면 된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한다.
생각이 바뀌는 것이 쉬운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드러난 문제(보이는 것들)은 생각이 바뀌면 된다라는 것에 적용이 된다.

한국인이 있다. 미국이로 이민을 갔다. 미국 국적으로 바뀌었다.
한국인 이었을때 미국과 한국이 축구경기를 하면 한국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국적으로 바뀌고 난후, 많은 미국인들과 축구를 같이 보고 있을때, 공식장소에서 한국을 응원한다는 것은 조금 꺼려지는 것일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있을때 한국말고 다른 나라를 응원하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었을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고, 비록 한국을 응원하고 싶지만, 응원하기가 꺼려 지는 상황이 될수가 있다. 드러나지 않는 것이 드러나는 것디 되는 상황과 마주 하게 되는 장면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생각을 바꿔야한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꿔야 한다고 느끼는 것들은 드러난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음이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 있는 것들, 무의식 적인 것이라든가, 어떤 문화에 둘러 쌓여있어 다른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경우라든가... 등등...
그러나 드러나는 생각 조차 바꾸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드러나는 생각들은 생각의 뿌리에 영향을 받아 밖으로 드러 나는 부분이다.
그러나는 부분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뿌리의 영향을 받게 된다. 바뀐것 같은데 많은 시간이 지나가면 그대로 인 경우가 많다.

그본적인 것들은 많은 노력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이 한국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반대의 경우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바뀌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드러난다. 그러나 드러난다고 해도 응원하는 마음은 그대로 인경우가 많을것 같다. (밖으로는 응원을 안한다고 해도)

조금 이상한 데로 흐른 면이 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속의 내가 거부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다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감정을 걷어내고 바라 본다면 보이게 된다.
공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산소와 질소 등등을 포함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욱 근본적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을때 내가 변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일수 있다.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뀌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은것 같다.
자신을 바라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2012년 8월 14일 화요일

이제 LG야구팀을 싫어한다. 공감치유, 공감은 치유의 힘을 가진다.

한때 LG의 팬이었다.
어렸을때 MBC 청룡을 좋아했다. 대부분 친구들이 삼성을 좋아했었는데, 청룡이라는 문구때문이었는지 혹은 백인천의 카리스마 때문이었는지 청룡의 팬이었다.
그리고 LG로 바뀌도 LG를 좋아하는 팬이었다.
지금은 다르지만 20년 전에 대구 구장에서는 자신이 LG팬이라고 드러내고 응원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열심히 응원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순간 부터 LG를 조금씩 거리가 느껴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가장 싫어하는 팀으로 바뀌었고, 야구도 잘보지 않는다.
정삼흠, 이광은, 김건우, 김용수, 박준태... 이런 선수들이 있을때 좋아했었다.

LG를 좋아한다. 좋아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간단한것 같다.
LG를 좋아했을때,  LG를 싫어한다라는 것은 생각할수 없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지금 LG를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싫어한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싫어 할수 있는 것이 아닌것 처럼... 
지금 LG트윈스을 싫어하는 데, 지금 마음을 먹는 다고해서 좋아질수 있는것은 아닌것 같다.
"LG 야구팀을 좋아했었는데, 어느순간 부터 싫어 졌다." 이렇게 말했을때 이말은 단순하다.
그러나 나와 같이 이런 경험을 했다면,  왜 싫어졌는지는  말을 안해도 이해가 될수 있을것 같다.

영화를 보고 왔는데, 그 영화를 보고 감탄했다면, "감탄했다"란 단 한마디가 그 영화를 보고 나서 감탄한 사람에게는 모든것이 전달될수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지않은 사람에게 감탄했다라고 말하면, 감탄한 내용을 세세하게 설명해야 할것 이다. 아무리 세세하게 설명을 한다고 해도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그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기 전에는 알기가 어렵다.

경험을 통해 감정이 공유된다라는 것은  어떤 단 한마디로서 공유된 모든것이 설명할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감정이 공유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여기서 공감(感)이라는 말을 알수가 있는것 같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공감할수는 없는 것 같다. 공감하는척 할수는 있지만...
내가 공감하고 있다라는 것은 상대방이 나의 몸짓 하나, 말투하나에서도 느낄수 있을것 같다.
아무리 말로 설명을 해도 설명할수 없는 것을 단 하나의 몸짓이나 말투로 설명이 가능한것이다.
"나는 LG야구팀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싫어한다." 이 한문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말이 필요하지만,  경험한 사람에게는 설명이 별로 필요없다.

심리상담에서는 많은 이론들이 있다. 이론들은 분석을 지향한다.
아무리 분석을 해도 어떤 상태를 정확하게 알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감정을 공감할수 있다면 단하나의 몸짓과 말로써 느낄수 있다.
그러나 공감이라는 것은 이론을 배우는 것보다 힘든일인것 같다.
공감이란 내가 상대방의 감정에 둘러 쌓이는 것인데, 역전이의 부작용에 빠져들수도 있다.
공포라는 것, 불안이라는 것, 분노라는 것에 상대와 더불어 빠져버리면 안되는 것인데...
그속에 빠지지 않으면 상대를 공감할수 없는 것이니
공감이라는 감정 상태에  빠지면서, 완전히 빠져서는 되지 않는 것인데, 이러한 상태를 유지 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 라는 생각이 든다.
공감을 배운다는것이 이론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 보다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도정신분석에서 이동식 선생님은 자신을 갈고 닦는것을 강조한다.

공감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인데, 감정의 왜곡을 거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이  치유의 힘을 갖는데, 공감은 상대로 하여금 내가 거울이 됨으로써 감정의 왜곡없이 자신을 바라볼수 있게 하는 힘인것 같다.

2012년 7월 9일 월요일

뒤틀림의 해소 / 가족

사람은 욕망, 불합리, 이기심 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관계에서 불리한 것들을 숨기고 살아 가야한다.
이러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면 관계는 깨어 질수 있다.

불합리한 것들이 해소되는 공간이 가족인것 같다.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게 되면,  인간의 욕망이 해소될 공간이 사라지게 된다.
해소되지 못한 것들은 언젠가 밖으로 들어 날수 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

자신의 불합리를 드러낼수 없으면, 불합리가 해소 되지 못한다.
가족속에서 자신의 불합리를 드러 낼수 있다면 그 불합리한 것들이 해소 되는 과정을 거친다.
가족속에서 자신이 억압되어 있다면, 자신의 불합리는 왜곡되어져 나온다.
왜곡되어져 나오는 불합리 함은 자신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모르게 만든다.
자신의 불합리가 가족속에서 완전히 드러 날수 있을때, 그 불합리를 자신이 직면하게 된고, 방향을 틀게 된다.

2012년 7월 7일 토요일

시간은 가끔 변화을 요구한다. 절망한 사람

시간이 지나간다.
시간은 그냥 흘러 가는것 처럼 보인다.
가끔 시간은 가혹하게 변화를 요구한다.
변화의 요구는 불안을 통해서 나타난다.
불안이란 희미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변화되면서 공포로 바뀐다.
공포는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공포는 변화를 막는다.
변화되어야 하는 상황에 마주친, 변화할수 없는 존재
절망한 사람이다.

2012년 6월 4일 월요일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우리는 폐족이다. 시련의 대처

다산 정약용은 귀양을 간다.

폐족은 절망이다. 어찌보면 아무것도 할수 없다.
그러나 절망은 내가 절망할때 절망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절망이라고 해도 내가 절망하지 않으면 절망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시련이다. 정약용은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제 폐족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폐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의 편지글중 일부는 적어보았다.

"청족(깨끗하고 이름있는 선비집안)으로 있을때는 비록 글을 잘하지 못해도 혼인도 할수 있고 군역도 면할수 있지만 폐족으로서 글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글 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할수 있을지 몰라도 배우지 않고 예절을 모른다면 새나 짐승과 하등 다를 바 있겠느냐?
폐족 가운데서 왕왕 기재가 많은데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과거 공부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에 응할수 없게 됐다고 해서 스스로 꺼리지 말고 경전 읽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여 글 읽는 사람의 종자까지 따라서 끊기게 되는 일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 "

"이 늙은 아비가 세상살이를 오래 경험하였고 또 어렵고 험난한 일을 고루 겪어보아서 사람들의 심리를 두루 알게 되었는데, 무릇 천륜(天倫 )에 야박한 사람은 가까이 해서는 안되고 믿을수도 없다.
비록 충성스럽고 인정 있고 부지런하고 민첩하여 온정성을 다하여 나를 섬겨 주더라도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은혜를 배반하고 의를 잊어먹고 하루 아침에는 따뜻이 대해 주다가도 저녁에는 차갑게 대해주고 만다.
대개 온 세상에서 깊은 은혜와 두터운 의리는 부모 형제보다 더 두터운 것이 없는데 그들이 부모형제를 그처럼 가볍게 버리는데 벗들에게 어떠하리라는 것은 쉽게 알수 있는 이치다.
너희는 이점을 반드시 기억해 두도록 하라."

" 무릇 부하고 귀한 권세 있는 집안은 눈썹을 태울 정도의 급박한 재난을 당하여도 느긋하게 걱정없이 지내지만, 재난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먼 시골 깊은 산속으로 몰락하여 버림받는 집안이야 겉으로는 태평이 넘쳐흐르는 듯하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근심을 못 떨치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그늘진 벼랑 깊숙한 골짜기에는 햇볕을 볼 수 없고, 함께 어울려 지내는 사람은 모두 버림받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원망하는 마음만 가득찬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견문이란 실속없고 비루한 이야기뿐이다.
진정으로 바라노니, 너희들은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하여 벼슬길에 있는 사람과 다르게 생활해서는 안된다. ...
천리는 돌고 도는 것이니 한번 넘어진 사람이 반드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하루 아침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서둘러 먼 시골로 이사가 버린다면 무식하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치고 말 뿐이다."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박석무 편역 -

2012년 6월 1일 금요일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억력이 나빠진다. 당연한것 같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억력이 나빠진다. 당연한것 같다.

기억을 한다는 것을 무엇을 입력하고 처리하고 출력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앞에 모니터를 모니터라고 안다고 하는 것은 모니터를 본적이 있고, 그 이름이 모니터란 것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 사물을 보고 처음 봤으면 무엇인지 모른다.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모니터를 보여 주면 뭔지 모른다. 보고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억력이 나빠졌다라는 것은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니다.
기억을 출력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기억이 지워졌다면, 다음에 생각이 안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안나지만 다음에 생각이 난다라는 것은 뇌어디인가 기억이 존재하지만 지금이순가 그 기억을 출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억력이 나빠졌라고 했을때, 기억의 과정중에서 출력하는 기능이 저하되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볼수 있다.

국민학교 친구 이름은 말해보라고 하면 몇명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국민학교 친구를 만나서 그 친구가 구체적인 상황을 말해주면 생각나지 않던 친구들의 이름이 생각난다.
기억이 지워진것이 아니라, 뇌의 어딘가에 기억이 있는데, 내 의식이 그 기억을 출력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억을 에너지의 소비의 관점에서 보자. (개인적 생각)
기억을 입력할때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잘된다.
공부를 할때 반복해서 읽고 쓰면 반복한 수만큼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입력을 많이 시킬수 있다.
그리나 공부를 하면서 잡생각을 하게되면 에너지는 잡생각과 공부하는 부분이 나누어 지기 때문에 집중해서 하는것 보다 에너지 효율이 낮아 지게 된다. (사람의 선천적인 능력에 따라서 기억력이 좋기도 하다)
투입에너지는 시간에 비례하지만, 몰입을 증가시키면 짧은 시간에 많은 에너지를 투입할수도 있다. 몰입도가 높으면 짧은 시간에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게 된다.
몰입해서 몇시간 공부하고 나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배가 고픈것은 그만큼 공부에 에너지를 많이 사용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몇시간을 잤다고 배가 고파지지는 않는다.

기억이란 것을 입력을 시켰는데 필요할때 출력을 못하게 되면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공부를 밤을 세워 했는데, 다음날 아침 정신이 멍해서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시험을 망치게 되고, 시험이 끝나고 낮잠을 자고 나니 생각이 나는 수가 있다.
이는 입력도 중요하지만 출력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출력에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최적의 커디션일때 시험을 잘볼수 있다. 즉 시험에 몰입해서 그 문제에 에너지를 사용할수 있을때 출력이 제대로 된다.
어떤 걱정거리 혹은 잠을 못자서 혹은 감기가 걸려있을 경우, 우리의 뇌는 다른 걱정거리나 병의 면역시스템에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충분이 시험문제에 에너지를 소비할수 없게 된다. 
스트레스를 받는 다는 것(걱정거리를 가진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처리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의 많은 에너지가 스트레스를 처리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진다. 우리몸의 각부분에 적정한 에너지의 분배가 깨어짐으로 기억을 저장하거나 출력하는 부분의 에너지가 부족해질수도 있을것 같다.
따라서 스트레스는 기억력의 감소에 영향을 끼칠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어 질수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병에 잘걸리는 것도 우리몸의 면역기능에 사용되어야 할 에너지가 스트레스 처리에 사용되기 때문에 면역기능이 떨어져서 병에 잘걸린다.

스트레스는  에너지사용의 불균형을 초래해서 기억력의 감퇴를 비롯해서 면역기능이나 대사 기능의 혼란을  초래할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2012년 5월 23일 수요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사랑 기독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당연한 말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믿음, 정의, 사랑 당연한 말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나의 문제가 아닐때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정치인 종교인 연예인 등등 항상 믿음 정의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문제의 상황속에 들어 가면 이 말들은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나의 문제일때... 위의 말이 통용될까.
나의 문제일때, 믿음 정의 사랑이라는  단어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가 기준이 된다.
어떻게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하고, 정의가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하고, 믿음이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한다.
멀리 떨어져 있을때는 당연한것들이 당연하게 받아 들이기 어려운것이 된다.

공자는 70에  종심소욕 불유구에 도달했다고 했다.
말로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당연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되기가 어렵다.
모든 상황에서 사랑이 사랑이고. 정의가 정이이고, 믿음이 믿음이기 어렵다.

우리는 이런 말을 쓴다. 사랑하지만, 정의로와야 하지만, 믿지만...
어떤 조건에서는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것을 이런 말로써 드러낸다.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인 까닭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한 것을 당연한 채로 받아 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이런 말을 쓴다.

목사님 들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런 말을 한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도 한다. 일본 지진은 하나님의 경고 라고...
이말에서 사랑은 조건이 붙어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것이 조건이 있는 것일까. 조건이 없는 것일까.
무엇이 완전한 사랑일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사랑이 조건이 있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격하시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느끼도록 조건을 두는 사랑을 하시는 분일까?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기 어렵다.
그러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사랑이 당연하고, 정의가 당연하고 믿음이 당연해야 한다.
당연한것이 당연한 것이 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말로만 당연한 세상에...

2012년 5월 21일 월요일

영화 돈의맛... 야한걸 원한다면...

돈의맛
돈맛을 아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이다.
돈맛 ... 나도 알고 이글을 읽는 분도 알것 이고...
영화는 돈맛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기업 재벌회장... 돈맛때문에  재벌가에 장가 들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돈맛을 느끼는지 잘안다.

재벌회장 부인... 자라오면서 돈맛을 안다.
사람들이 어떻게 돈맛을 느끼는지 잘안다.

아들도 돈맛을 안다.
딸도 돈맛을 알것 같다.

실장(김강우)이 나온다. 돈맛을 모른다.
회장이 돈맛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주저한다.
회장부인이 돈맛을 보여준다.
돈맛을 알아간다.

생각보다 야한 영화는 아니다.

우리가 돈으로 하고 싶은것 (드러나지 않지만. 본능속에는) 섹스가 자리잡고 있다.
영화에서 섹스는 돈맛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돈의 맛  누구나 맛있는지 안다.

영화는 돈맛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맛을 느끼기 위해서 지불해야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회장(백윤식) 부인을 잘 만나서 돈맛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돈맛에 지불해온 인생을 생각한다.  자유를 원한다. 그러나 너무 깊숙히 들어와서 빠져나갈수 없다.
그부인은 남편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것을 감시한다. 자기와 접촉하는 사람들은 돈맛을 알게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 돈맛을 제공해 줌으로써 자신에게서 벗어 나지 못하게 한다.  그게 그녀의 돈맛이다.

회장 장인이 나온다. 영화에 실마리다. 돈맛을 자유 자재로 구사한다.
돈맛을 들인 사람들이 그에게 에너지를 공급한다.

영화는 돈맛이 아닌 다른 맛을 찾는 사람이 나오면서... 갈등이 일어나다.
그 가족은 돈맛이 가족을 유지하는 근간이다. 누군가 벗어나려고 하면 가족은 붕괴한다.
가장이 벗어나려 한다. 돈맛이 아닌 로맨틱한 사랑을 찾아 떠나려한다.

가족은 그 구조를 유지하기위해 노력한다. 부인과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야기한다. 무엇을 해도 좋으니까. 이구조에서 벋어나지 말라고...
그러나 백윤식은 그 구조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떠나긴 한다.

더이상 이야기하면 영화를 스포일러가 될것 같고..

돈맛이 달콤한건 애들 빼놓고 다안다. 요새는 애들도 안다... 돈이 있어야 닌텐도DS도 산다.
돈이 있어야 명품도 사고... 돈이 있어야 여행도 간다.
영화는 돈맛은 달콤한 것만 있는 것만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인생을 값으로 받는 쓴맛도 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것 같다.

나의일이 아닐때는 도덕적으로 이야기 할수 있다. 그러나 무엇인가 나의 일때 이건 이러해야 한다가 아니라... 모든 것을 도덕적으로 풀어내기가 어렵다.

영화를 관객으로 떨어져서... 역시 돈이 행복의 모든 것은 아니야... 이렇게 보면... 별게 없는 영화다..
그러나 내가 김강우의 위치가 되어서 영화의 상황을 바라보면... 영화는 달라 진다.

우리는 '돈이 행복의 모든것이 아니야' 이렇게 알고 있다.(도덕적으로...)
그러나 돈의 유혹이 오면 벋어나기가 어렵다.
사회의 구조가 돈으로 짜여져있다. 돈이 없으면 대접을 못받는다.
돈을 빌리러 친구에게 가면, 돈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있어도 잘안빌려준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로또를 산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돈에 맛들인 나의 문제의식으로 영화를 봐야 영화의 맛을 느낄수 있을것 같다.

마지막 장면 김효진 비행기에서 어떤 아가씨에게 이코나미석에 앉아있는 김강우와 같이 앉기위해서  좌석표를 바꾸어 달라고 한다.
그 아가씨는 그냥 바꾸어 준다.
자리를 바꾸어 나오면서 비행기표를 확인한 그아가씨의 얼굴은 아주 밝은표정이 변한다.
김효진의 비행기 표는 비지니스석이지 않았을까.
그 아가씨가 '관객'이고 '나'이지 않을까. 
돈이란 묘한것이다.

돈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있어야 영화를 볼수있다. 영화를 보는 것은 행복의 한 부분이 될수있다

돈의 맛 오랜만에 본 좋은 영화였다...
야한걸 원한다면..... 실망할듯

유쾌한 때에 관한 김성탄의 33절

오랜만에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을 읽어 보았다.
그중에 유쾌한 때에 관한 김성탄의 33절을 예전에 한번씩 읽었는데..
그때는 유쾌하다고 생각 되던 것들이  지금은 별로 유쾌하다는 생각이 안든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 아주 유쾌하겠구나 그건 것이 하나 보인다.
32절 " 빚을 다 갚아버린다. 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2012년 5월 16일 수요일

안개 속에서 - 헤르만 헷세 -

안개 속에서           - 헤르만 헷세 -

안개속을 거닐면 신기하여라!
숲이며 돌은 모두가 외로움에 잠겨서
나무마다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혼자 있구나.

나의 인생이 아직 밝았을 때는
이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건만
이젠 안개가 내리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구나.

어쩔수 없이 모든 것에서 조용히
사람을 떼어 놓는 그 어두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지 못하도다.

안개속을 거닐면 신기하여라!
인생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를 모르고 산다.
모두가 혼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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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다닐때 헤르만헷세에 빠져 그의 소설을 거의 다 읽었었다.
단한가지 유리알유희만은 이해가 어려워서 다 잃지 못했었다.
소설을 읽는 것이 사치로 느껴져서 요즈음은 통 소설책을 읽지않는다.

세상은 모든 현상은 혼자 느끼는 것이다. 느끼는 사람이 말하기 전에는 본인 말고는 아무도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각자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자신이 느끼는 데로 반응하며 살아간다.
문화에 따라서 비슷하게 반응을 하지만, 기쁨과 고통과 즐거움과 분노는 자신의 몫이다.


'이세상에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건만..
이젠 안개가 내리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 구나'

안개가 내리면 친구들도 사라지지만, 나도 누군가의 친구들중의 하나이다.
친구들이 사라 졌다고 원망할수 없다. 나도 그들 옆에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안개가 내리면 각자 혼자될수 밖에 없다.

혼자라는 것은 두려운것이다. 그래서 피하려고 한다.
'그 어두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지 못하도다.'
어느순간 (안개가 내리면) 혼자 일수 밖에 없는데...




2012년 5월 15일 화요일

변하다..

변하기 위해서 먼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늦잠을 자는 것을 포기해야하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 노는 것을 포기해야한다.

포기하지 않고, 변하려고 하니, 변하지 못하는 것같다.

2012년 5월 14일 월요일

하나님 존재의 증명

초등학생이 있다. 초등학생에게 사람이 어떻게 걷는지 설명해보라고 질문을 하면 설명하지 못한다. 걷는 메커니즘은 나도 설명하지 못한다.
과학자가 있가. 걷는 매커니즘에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고, 설명할수 있다. 그리고 그 매커니즘으로 걸을수 있는 로봇도 만들었다.
그러나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한번도 걸어본적은 없다.
설명을 못하지만 걸을수 있는 사람과 설명을 할수 있지만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걷는 사람은 태어나서 몇년 동안 시행착오를 통해서 걷는 방법을 배운사람이고, 그러나 그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설명할수 없다.
걷는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는 몇년동안 연구를 해서 걷는 매커니즘을 알고 설명을 할수 있다.

걸을수 있는 초등학생과 설명할수 있는 과학자중에 누가 걷는 것을 안다고 해야 할까.

수천년동안 신을 믿어 왔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다. 지금도 믿고 있다.
그러나 신을 누구도 완벽히 설명할수는 없다.
설명할수 없기 때문에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에는 설명할수 없는 많은 현상들이 발생한다.
설명할수 없기 때문에 거짓,허구, 지어낸것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과학책에서는 우리은하계의 그림이 나온다. 아무도 우리 은하의 전체를 보지 못했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 은하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책에 나오는 우리은하계는 상상화다. 우리은하계의 그림을 보고 허구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과학책에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설명할수 없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기도 하고, 설명할수 없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믿기도 한다.

많은 믿음들이 권위에 의존한다. 종교가 권위가 있을때는 종교가 말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었고, 과학이 권위가 있을때는 과학이 말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걷는 것을 설명해낼수는 없지만, 걷는 방법을 안다. 설명할수 없다고 모른다고 할수는 없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할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에(Here and Now)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5월 11일 금요일

장자 제물론 8장 / 내담자 중심 상담

" 말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말에는 말해지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만약 말해지는 바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말은 실제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은 말이 갓난새의 삐약거리는 소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차이가 있을까. 아니면 없을까? 도가 무엇에 의존하기에 참과 거짓이 생겼나? 말이 무엇에 의지하기에 옮고 그름이 생겼나? 어떻게 도가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을수가 있는가? 어떻게 말이 존재하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을수 있는가? 도가 작은 성취에 의지하고 말이 헛된 겉치레에 의지할때, 유가가 말하는 옳고 그름과 묵가가 말하는 옮고 그름이 있게 된다. 한쪽에서 옳다고 하는 것을 다른 쪽에서는 그르다고 하고, 한쪽에서 그르다고 하는것을 다른 쪽에서는 옳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하고, 그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고 싶다면, 그때 이용할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밝음이다. " 로버트 엘린슨의 장자 영혼변화를 위한 철학

서구 학자의 제물론 8장의 해석이다. 동양적인 해석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는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은 우리틀속에서 장자를 보는것이고, 그의 해석은 그의 틀속에서 장자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말을 들을때 내생각을 기준으로 판단을 한다. 그래서 이말은 맞고 저말은 그르다라고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사고를 하는 사람은 같은 편처럼 느껴지고, 나와 다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정치현상을 보았을때, 극단적으로 느껴진다. 화해 불가능 하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내가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말을 들을때 어떤 말들은 귀에 거슬리고, 어떤 말들은 분노를 만들어 낸다.

칼로저스이 내담자 중심 분석에서는 듣는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듣되 나를 비운체 듣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듣는 사람은 자신을 비울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의 말에 분노 느끼고, 연민도 느끼고, 불안도 느끼게 되므로, 상대방에 말에 빠져 들어가든지,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고 지시적이 된다.

위의 장자 구절에서 밝음(明)을 통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한다. 메다드 보스의 현존재 분석에서도 내담자가 가진 모든 것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드러남은 밝음에서 드러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판단하고 있다면 이야기 하는 사람이 약자라면, 듣는 사람의 판단 기준에 따르려고 노력할것이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낼수 없다.
최악의 경우 듣는사람이 원하는 말만을 할수도 있다.

'말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말에는 말해지는 무언가가 있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도 그 이상한 소리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있는것이다. 아기는 아플때 어떤 의사표시를 한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알아 듣기 힘들다. 그러나 아기는 이야기 하고 있다. 엄마는 그이야기를 알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아기의 관점에서 듣는다.

어떤 마음이 힘든사람들은 때로는 이상한 소리를 할때가 있다.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그의 혹은 그녀의 관점에서는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말이 안되는 말을 하느냐고 한다.
그래서 그사람은 고립된다. 듣는 사람의 틀에 맞추기 위해서 노력하고, 자신의 감정과 외부와의 차이는 커지게 된다.

완전한 밝음 속에서는 모든것들이 실존하는 것이 보인다.

듣는 사람이 밝음을 기준으로 판단 할수 있으면, 말하는 사람이 편해지고, 말하는 사람이 밝음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면 듣는 사람이 편해진다.

'밝다'  라는 것을 알기도 어려운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도 나이 60에 이순에 이르렀다 했으니...

귀가 순한 사람이 칼로저스 처럼 뛰어난 상담자가 될수 있는것 같다...

2012년 5월 10일 목요일

칼로저스 공식사이트 / Miss Mun 사례

칼 로저스의 공식 사이트
http://www.carlrogers.info/index.html

사이트에서 볼수 있는 내용
폴틸리히와의 인터뷰
유명한 Miss Mun 사례와 여러 상담 사례를 동영상으로 제공.
칼로저스 인터뷰등등...

칼로저스의 상담사례을 보면 내담자의 감정선을 읽으면서 내담자가 담아두면서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말할수 있도록 하는것 같다.
일반적으로 말을 할때 상대방에게 어느정도 까지를 말을 해야할까의 범위를 설정한 채 말을 한다. 그래서 모든 말을 다할수 없다.  칼로저스는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한것 같다. 들어 보면 별것도 아닌것 같지만, 내담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칼로저스의 마음에 편안함을 느낀다.

내담자가 칼로저스와 상담을 하면서(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알아가는 것 같다. 칼로저스는 지시를 통해서 혹은 권위를 통해서 상대방의 문제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느끼고, 자신의 해결책을 찾아가도록 칼로저스는 도와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영어가 딸려서 자세히는 알아 듣지 못하지만 그런 느낌이다.

칼로저스 공식 사이트에서 사례들을 여러차례 반복해서 본다면, 간접경험을 통해서 칼로저스의 사상의 이해의 폭을 좀더 넓힐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2년 4월 26일 목요일

착한사람이 되라

"착한 사람이 되라"하기 전에
먼저 그 만큼 내가 착해져야한다.

해리현상 : 정신적 신경생물학적 보호 매커니즘이다

"대형교통사고를 당하고 몇년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가 생긴 위의 환자는 치료를 받으면서 사고 당시 일어난 중요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환자는 당시 두 차량이 충돌한뒤 얼마동안 의식을 잃었고 의식을 다시 찾았을때는 자신의 몸과 의식이 분리되어 있었다. 마치 모든 상황을 몸 밖에서 체험하는 듯했다. 환자는 공중에 붕 뜬 느낌으로 주위에 선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물었다.
이런현상은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도 더 이상 견딜 수 없고 정신적으로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반응이다. 실제 견딜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에게서 이탈하는 현상을 해리(dissociation)라고 부른다."

" 해리는 정신적 신경생물학적 보호 매커니즘이다. 해리의 목적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소하거나 제거하는데 있다. 해리의 정신적, 생물학적 생성방식에 대해서 제기된 지식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밝혀지기 시작한것들이다."

" 해리현상은 트라우마의 경험에 관계없이 일상에서도 약하게 나타날수 있다. 정신적관점에서 볼때 해리는 현재의 상태에서 이탈하기, 정체성과 거리두기, 일종의 자기 부재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관찰할수 있는 가벼운 형태의 해리는 바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꾸는 백일몽이다. 이럴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무슨일을 했지만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정도가 심한 해리의 경우는 낯설거나 '마비된듯한' 느낌이 드는 경우를 들수 있다. 이럴경우 상황이나 육체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이른바 '탈현실화' 혹은 '탈인격화의 느낌이다.
건강한 사람도 때로 이런 느낌을 경험한다. 특히 지나치게 피곤하거나 너무 큰 부담을 느낄때 그런 경우가 찾아온다. "

" 해리는 일반적으로 불안과 결부된 신호에 의해서 유발된다. 이 신호는 제삼자에 의해서는 종종 지각될수 없다. "

"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순간 엔도르핀이 뇌에서 마비시키는 것은 '객관적'통증 신호가 아니라 감정의 관여부분이다. 감정의 관여가 마비되고 의식이 현실에서 이탈하는 현상은 해리성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에게서도 발견할수 있다. 환자는 자신의 몸과 분리된 느낌이 든다. 트라우마 상황에서는 이것이 '마지막 구원'인 셈이다. 여기서 해리는 견딜수 없는 상태에서 살아 남도록 '도와주는' 셈이다."

요하임 바우어의 '몸의기억' 중의 해리에 관한 부분이다.

2012년 4월 19일 목요일

우울증을 향해 방향을 튼다. / 너는 용납되었다

'너는 이러이러 해야한다.' 라고 말할때 말하는 사람의 상황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각자의 상황은 다 다르다.
부모가 자식에서 '너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라고 강하게 말할때, 자식은 드러나지 못한다.
부모의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무게에 눌러 자신은 드러 나지 못한다.
왜곡되어져 자라게 된다.

사회의 강력한 논리가 개인을 누를때 사회속의 개인은 자신을 드러낼수 없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 가는 개인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

세상은 정보와 되어 엄청나게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의 잘못이 바로 인터넷을 타고 휴대폰을 타고, 세상에 드러난다. 엄청난 비난이 빛발친다.
각 개인들은 비난을 하면서도 그게 내가 될수 있다라고 조심한다.
개인의 강력한 논리는 그 개인의 무의식을 누른다.
비도덕적인 타인을 비난하면서 비난의 대상이 자신이 될수 있다는 엄청한 두려움도 같이 느낀다. 그 느낌은 드러 나지 않고, 무의식에 존재한다.
세상에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사회의 강력한 규범만을 드러 낼수 있다.

스스로를 스스로 가둔다. 사회속에 개인은 드러날수 없으므로 왜곡된다.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부모일수록 자식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수가 많다.
자식의 입장에서 용납되어 지지 못할수 있다라는 생각은 자식의 불안을 만들어 낸다.

세상이 개인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느낌은 개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간다.
불안한 개인들... 그중 마음의 순수하고 약한 사람들은 우울증을 향해 방향을 튼다.

"너는 용납되었다. "
누군가 이렇게 말할때, 온전해 질수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2012년 3월 24일 토요일

공주병 왕자병

세상은 어떻게 돌아 가야하고,
정치는 이러이러해야 하고,
사회는 이렇게 돌아 가야하고,
경제는 이렇게 해야한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날 나에게 문제가 생기면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나의 문제만 남게 된다.
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세상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어 간다.
내가 힘들기 전에는 나의 문제에 대해선 관심을 잘 두지 않는다.
평상시에는 기독교는 교리는 이러해야 하고,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상을 가진다...
그러나 내에게 문제가 생기면 교리가 이러이러해야 한다에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줄수 있는 대상을 구하게 된다. 그 대상은 전지 전능한 대상일수록 나를 구할 가능성은 많아 진다.

대상을 항상 바같에 둔다.
평시에는 세상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나를 구원할 대상을 찾는다.

공주병, 왕자병도 이와 같은 것 같다.
부모님은 나를 위해서 이러이러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면 부모님에게 의존하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 관계를 만들어 가지 못한다.
대상은 항상 밖에 있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 보지 못한다.

자신을 돌앙 보지 못하면 공주병 왕자병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싶다.

2012년 3월 16일 금요일

있음에서 함으로, 마뚜라나 .. 개떡같은 책이다.




개떡같은 책이다.

'개떡같다'라는 말은 '보잘것 없는 것'라고 일반적으로 의미한다.



개떡이라는 단어를 모른다면 '이책은 개떡같다'라는 의미를 알수 없다.

그러나 '개떡같다' 라는 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책이 보잘것 없다라는 의미로 평가하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일반적인 세계도 이런식으로 인식한다. 지금까지 배워오고 살아온 데로 인식한다.

지금 보여지는 것과 그 인식이 머리속에 형성하는 것을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게 된다.


마뚜라나와 발렐라가 쓴 앎의 나무에서"사람들은 보통 무엇(예컨데 공간이나 색채)을 그냥 받아들여 지각한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는 개인의 구조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 평소 매우 단단하고 확실해 보이던 것이 얼마나 빨리 허물어져버릴 수 있는지 생생히 기억할것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실 '앎의 나무', '있음에서 함으로' 라는 책이 보잘것없는 책이아니라 엄청난 책이다.


누군가 어떤 말을 하면 개인이 가진 사고의 구조속에서 판단한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이 하고자하는 의도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듣는사람의 판단에 의해 말은 판단되어 진다.


문제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의 판단 구조를 알고 있다면, 말하는 사람은 원하는 의도를 상대로 부터 끌어 낼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의 계절이다. 수없이 많은 정치인들이 수없이 많은 말들을 쏱아 낸다. 쏱아내는 이유는 의도를 포함하다. 그들은 일반인들이 반응하는 조건을 충분히 연구를 했고, 반응을 끌어 낼것이다.


이책은 보이는데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것을 이야기한다.


"이책은 개떡같다" 이러한 말에 혹해서 이책을 읽지 않으면 엄청나게 중요한것을 놓치게 될것 같다.


정치의 계절..... 정치인이 하는 이상한 말에 나도 혹하지 말야 겠다.

삶이 무엇인가? 묻는 다면 당황스럽다.

삶이 무엇인가? 묻는 다면 당황스럽다.
삶이 무엇인지 정의 하긴 어렵다.
그러나 삶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한다고 삶을 모르는 것일까.
누구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삶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른다고 손을 못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삶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삶을 못사는 것은 아니다.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 설명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손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우리 의도대로 손을 움직인다.
내가 삶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도,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삶을 살아 간다.

삶이 무엇인가? 누구나 다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앎을 따라 살아 가고 있는지를 자신에게 묻기 전에는 알수 없다.

2012년 3월 4일 일요일

매너나 하면서 대충 대충 살아가고 있구나

마트에 갔다.
앞사람과 부딛혔다.
미안하다고 했다.
그분은 그래도 화를 냈다.
그분의 화에 나도 화가 났다.

미안하다고 했을때
용서는 그사람이 하는 권리라는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가 잘못을 했을때
내가 내스스로를 용서를 했고,
내가 스스로 용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했었다.

나는 매너를 했고, 그분도 매너를 하기를 바랬는데 그게 아니어서 화가 올라온것 같다.

'나'라는 존재가 '매너나 하면서 대충 대충 살아가고 있구나'하는 그런생각이 든다.

2012년 2월 24일 금요일

장자, 빅터프랭클 .. 장주 나비가 되다.

장자를 읽고 있다.
제물론의 마지막 편에 장주가 나비가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깨어 있는 장주도 장주의 세계이고, 꿈속의 나비도 장주의 세계이다.
내가 현실이 꿈인지 의심하게 되더라도, 꿈은 나의 세계이고,
현실속의 '나'라고 하더라도, 세상은 내가 바라 보는 세계이고,
살아 있는한 나를 둘러싼 현실에서 벗어날수 없다.

장자는 현실이 괴롭고 힘들더라도 현실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같다.
그기쁨은 현실의 보이는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한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존재 분석의 맥락에서 자신에게 느껴지는 모든것은 자신의 현실이며, 그 현실을 바라보고, 나의 것으로 받아 들일때, 자신의 고통들을 초월할수 있다고 하는것 같다고 느껴 졌었는데,
현존재분석을 읽을때는 잘 이해 되지 못하던 것이 장자를 읽으므로서 이해 되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씩 이해되어 지는것 같다.

빅터프랭클의 로고테라피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장자가 말하는 이야기의 테두리 내에 있다는 느낌이든다.

2012년 2월 7일 화요일

삶은 깨어 있으므로 알수 있다.

잠결에 술을 한잔 먹었는데, 그게 100만원 짜리 와인 이었다면 억울할 일일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깨닷지 못하면 그게 100만짜리 이던 1000원 짜리이던 아무 소용이 없다.
깨어 있을때만 그게 무엇인지 알수 있다.

세상이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깨어 있지 못하면 그 일들이 무엇인지 구분할수 없다.

성경을 본다. 지식으로 많은 것을 보았다. 이책도 보고, 저책도 보고...
많이 아는 것으로 성경을 안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성경은 아는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것을..
그 구절들을 통해서 무엇을 느끼느냐.
'안다'라는 것은 어떤 것의 정의를 파악하는 것이다.
성경 구절 구절들은 정의할수 없는데, 안다고 할때 개념의 모순에 빠져서 자만으로 들어 간다.

와인의 맛은 지식으로 알수 없다. 말로 전달할수도 없다.
수없이 많은 경험을 통해서 본인이 느낄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맛은 주관적이다. 그러나 결국 보편성을 따라간다.

성경을 읽을때 처음에는 주관적일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삶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편성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읽으면서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 주관적인 감정을 부정하게 되면 객관성을 추구 하게 되고, 지식으로 성경을 읽게된다. '나는 성경을 안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성경을 읽으면서 다가오는 개인적인 느낌이 "나의 깨어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느낌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그 대로 받아들이고, 삶을 바꾸어야 한다.
깨어 있는 위치는 사람마다 다른지만, 더 깊은 곳을 추구 하게 된다. 깊이 깊이 들어 갈수록 중앙을 향하게 되고, 중심은 한곳이므로 보편적이 된다.

80이 되신 초등학교 밖에 안나온 할머니가 영하10도가 넘는 날씨에 새벽기도에 가시는 것은 지식으로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삶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깨어 있지 못하면 100만원 짜리 와인을 먹고, 맛을 알수 없다.
삶은 깨어 있으므로 알수 있다.

2012년 1월 19일 목요일

감정의 평정심이 뇌의 작용을 안정시키지 않을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몰입해 있을때 '미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한다.
당구에 미치다. 바둑에 미치다. 영어에 미치다. 수영에 미치다. 사랑에 미치다.
정신이 이상하다 라는 측면에서 '미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만 아니라 어떤대상에 대한 감정의 과잉상태 일때 '미치다'라는 단어를 상용한다.
무엇인가에 미쳤을때 바둑에 미쳤을때, 당구에 미쳤을때, 어떤 여자에 미쳤을때, 미친 대상과 비슷하게 생겼을때 비슷하게 생긴 대상이 바둑알, 바둑판으로 보이기도 하고, 당구공으로 보이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 하는 여자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으로 유추 해보면, 어떤 대상에 대해서 감정이 과잉일때, 우리의 시각은 실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인식을 하기도 한다고 생각해볼수 있다.

현제 밝혀진 바로는(어디서 보았느데 어디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는 대상은 사진처럼 있는 대상이 그대로 뇌에 세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진처럼 세겨진 정보가 뇌로 보내진다고 한다. 그 정보의 전달 과정에서 그 정보들은 실제 보는 것과 다르게 왜곡이 되어질수도 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이 정확한지는 알수 없다. 사람이 본 것을 그대로 스크린으로 나타낼수 없기 때문에 여러 실험을 통해서 이러한 가설이 시각에 관해서 많을 부분을 설명을 해주기 때문 지지를 받지는지도 모를일이다.)

실제로 본것과 뇌가 인식한것이 감정 상태에 따라서 보는 것이 왜곡이 생길수 있으므로 눈으로 본것이 뇌로 전달될때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구에 미쳐 있으면 어떤 대상이 당구공으로 보이는것이 우리가 보는 시각이 뇌로 전달될때 당구에 미쳐있다라는 감정에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될수 있을것 같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할수 있다.

무엇인가에 미쳐 있을때, 감정이 대상에 집중해있을 때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닐수도 있다.
그 감정의 집중이 불안 일수도 있고, 공포일수도 있고, 슬픔일수도 있다.
그리고 잘못 본 것이 더울 두렵게 슬프게 불안하게 만들수 있을 것 같다.

잘못 본다라는 것이 지속되어 질때 이것은 문제로 느껴질수 있는데, 그원인은 과도한 감정의 집중이 계속 되고 있다라고 할수 있을것같다. 풀리지 못한 감정의 상태의 지속때문이지 않을까.
잠을 자면 꿈을 꾸는데, 눈과 귀가 작용을 하지 않고있어도 꿈속에서 보고 듣고 한다. 뇌에서 그림을 만들어 내는데, 그 꿈은 자신의 무의식적 감정의 상태에 따라서 악몽을 꾸기도 하고 길몽을 꾸기도한다.

우리 조상들이 항상 평정심을 강조 했는데, 감정의 평정심이 뇌의 정상작용을 도와서 세상을 바로 볼수 있게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2012년 1월 17일 화요일

욕망이 제약되다.

새해부터 뛰어 다니기로 했다.
가끔씩 걷기도 하면서 뛰기도 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책을 읽기 위해서 지하철을 타곤한다. 하루에 두번 탈수 있다.
도착지 까지 가는데 15분 다시 돌아 오는데 15분, 그 사이 시간동안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뛰어 다니다 보면 시간이 남으면 자투리시간으로 1시간 2시간이 비면 커피숍에 가서 커피 한잔을 시키고 책을 본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두시간 정도 확보 된다.

요세는 장사가 잘안된다. 책을 본다고 장사에 소흘해서 인지도 모를 일이다.
돈을 벌려고 하면 집착을 해야 하는데, 공부하고 있는게 집착을 버리는 거니까, 장사가 잘될리가 없을것 같기도 하다.

사람에게 욕망이 있는데, 욕망은 제약을 받는다.
요즈음에는 돈에 의해서 욕망이 가장 제약을 많이 받는다.
욕망을 충족 하면, 그욕망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충족 시킬수록 욕망은 커진다.
나는 경제 사정이 안좋기 때문에 욕망은 돈에 제약 받는다.
경제사정에 맞추어 욕망을 줄여 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욕망이 경제 사정에 맞게 줄지 않으니 이것도 고역이다.

만약 재벌로 태어났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할수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의 욕망을 멈추게 할수 없었을 것 같다.
현재의 나는 돈에 욕망이 제약되기 때문에 이카루스처럼 되지는 않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다고 해야 하나 슬픈 현실이지만,
욕망이 줄어 들수록 세상이 더 크게 보여 지는것 같다.

가끔 추운날 커피전문점에서 커피한잔을 마시면서 책에 빠져 있으면 잠시 내 욕망을 잊는다.
내 욕망은 제약을 돈이 안드는 욕망으로 대체하면 되는데... 마누라가 자신의 하고자하는 욕망이 경제사정에 제약이 됨을 볼때 안타깝다...

지금 마누라는 자고 있다. 가끔은 싸우기도 하고 삐지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나는 마누라를 통해서 삶을 배우고 있다. 마누라를 만나지 못했으면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이 살았을것 같다.

" 매일 기계를 만지는 일을 하며 살아가지만 갑자기 자신에게 '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 일까? 그것은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묻는 학식 없는 노동자가 있다고 칩시다. 그는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깊은 곳에 이르는 길'위에 서 있는 셈입니다. " -폴 틸리히-

2012년 1월 13일 금요일

듣는 귀

이야기를 듣는다는것이 쉬운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서운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다면, 그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힘들것이고,
진보를 지지하는데, 엄청나게 강한 보수의 시각으로 진보정치인의 흠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이것도 힘들 것이다.
반대로 보수를 지지하는데, 엄청나게 강한 진보의 시각으로 보수정치인의 흠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이것도 힘들 것이다.
교통사고를 경험해서 그 쪽으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데, 누군가 그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할경우도 듣고 있기 힘들 것이다.
자신이 불안해 하는 것이 있는데 상대방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또한 듣기가 힘들 것이다.

이야기를 할때 듣는다는 것은 가끔은 엄청 힘든일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야기 하는 본인의 쌓인 것을 푸는 것이므로 오히려 이야기를 하는쪽이 스트레스가 풀린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들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칼로저스의 상담대한 부분을 읽었는데, 그가 말하는 상담의 핵심은 듣는것이라고 한다. 듣는다는 것은 참아서는 계속 듣고 있을수 없다.
전이나 저항때문에 분노가 올라 오기도 하는데, 그걸 참고 표시를 내지 않으려고 하면, 한번을 들을수 있지만 지속할수 없다.

듣는 것이 귀에 거슬리지 않아야 들어수 있는데, 그러한 단계에 올라가기 위해서 자신의 끊임없이 비워야 할것 같다.

세상이 갈수로 개인적이 되어 가는 것이 갈수록 귀에 거슬리는 소리 들이 많기 때문에 들을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를일이다.

듣고 화를 내는 것보다 더 안좋은 것은 그 올라 오는 화를 만들지 않기위해서 듣는 것을 포기 하는 사회의 분위기로 가는 것 같다.
어떤 농담의 한마디로 고소의 대상이 되는 사회...

앞으로의 공부의 방향은 어떤 말이든 들어 줄수 있는 귀를 가지기 위해 수양을 해야겠다.

2012년 1월 9일 월요일

세상에 정신적인 고통을 안고 살아 가는 것은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인것 같다

사람은 엄마를 통해서 세상에 태어난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는 일정기간 동안 아무것도 할수 없다.
그 일정 기간 동안 아기는 엄마를 완전히 믿는다.
믿는다 라는 개념도 없지만, 완전히 엄마를 믿는다.
믿지 못하면 자라지 못한다.

아기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게 되면 엄마에 대한 완전한 믿음은 조금씩 약해져간다.
어느 순간 엄마의 유한성을 발견한다. 엄마가 자신에게 해줄수 없는 것을 조금식 발견하면서 사춘기를 맞이 한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깍을때 머리를 이발사에게 맡긴다. 믿는다라는 개념도 생각나지 않지만, 그냥 머리를 맡긴다. 그러나 이발에 대한 기술이 많을 수록 이발사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병이 나서 병원에 갈때 의학상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의사를 믿지못한다.


믿음이란 '자신이 모른다라는 것'을 알때 깊어지는것 같다.
어찌 보면 소크라테스가 무지에 대한 자각(모른다라는 것과 할수 없다라는 것을 포함하는)이 믿음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선택을 받았다거나, 모든것을 다할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자신만을 믿게 되고, 다른 사람을 믿을수 없게 된다. 사회적을 성공하면 할수록, 그 성공이 자신에게서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은 없어진다. 그 대상은 신에 대한 믿음도 포함된다.
세상에 홀로 있는 인간이 된다. 가장 궁핍한 상태가 된다.


믿음은 자신의 부족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되고, 믿음의 완성은 그 자각 자체도 없어지는 '무'에서 완성된다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정신적인 고통을 안고 살아 가는 것은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인것 같다.
옆사람을 못믿기 때문에 마음에 묻힌 말을 할수 없고, 그 할수 없는 말때문에 응어리가 지고, 그 응어리가 고통을 만든다. 고통스럽지만 말할수 없다. 믿을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것을 가져도 궁핍한 상태가 된다.

옆의 사람을 믿기 시작할때 치유가 시작된다.

2012년 1월 2일 월요일

단 한사람도 믿지 못하면선

인간은 믿음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믿음의 붕괴는 삶의 붕괴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 믿음은 보이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고, 구체적인 대상을 가져야 한다.

옆에 있는 단 한사람도 믿지 못하면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하나님의 형상을 믿는 것은 아닐까.


옆에 있는 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선생님의 치료에 있어서 저를 실제로 치유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곧 그녀는 스스로 대답했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항상 저를 위해 있었고,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할때면 언제든지, 낮과 밤 어느 시간이든 선생님에게 전화 걸고 갈수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누군가가 실제로 저를 위하여 항상 존재할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선생님이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수십번의 경험들이 서서히 선생님을 믿을수 있게 하였어요. 말하자면 제가 자신의 힘이 커가는것을 느꼈을때 까지는 저는 선생님을 통해서만 살수 있었어요.이전에는 결코 경험해본적이 없었던, 선생님의 신뢰성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전 세계에 대한 신뢰가 점차 커갔었어요." - 정신분선과 현존재 분석- 메다드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