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19일 화요일

갈수록 믿는다는 것이 쉬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든다.

요몇일 요한복음을 읽었다.
하나하나의 의미들이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직 어렵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이 기적들이 나온다.
기적을 행할실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실때 가장 아끼던 제자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을 모른체한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면서 우리에게 말하려고 했던것이 무었일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믿음이란 보이는것으로서 믿는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으로써 믿는것을 말하려 했던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은 내가 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내가 못나서도 아니고, 단지 내가 그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러나 부모님이 어떻게 나에게 해주느냐에 따라서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이상하다. 부모님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라는 것이 조금 자연스러운것 같다.

요즈음 교회들이 혼란 스러운것 같다.
보이는 것으로서의 믿음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서의 교회의 형상은 부흥을 하는데, 보이지 않는 쪽으로서의 믿음은 약해져가므로 요즈음의 혼란이 생기는것이 아닐까.

갈수록 믿는다는 것이 쉬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든다.
말로는 쉽다. 내가 믿는다는 것은 나와 하나님 만이 알수 있을것 같다.
가끔씩 믿음을 가장해서 살아간다. 내가 나를 속이기도 한다.
그래도 안심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2011년 4월 9일 토요일

고엽

자다가 일어 났다.
조용하다. 컴퓨터를 키고 책상앞에 앉았다.
헤드폰을 쓰고 고엽(Autumn Leaves) 듣고 있다.고엽 5곡정도를 연속해서 듣고있다.
이브몽땅이 부르는 걸로 듣고 있다.
지금은 누가 연주한건지는 모르지만 피아노 연주곡으로 흘러나온다.
조용할때 들으면 눈물이 날것만같다. 마음이 소용돌이 치는듯한 연주가 내 정서를 변화시킨다.
이제쳇베이커의 트럼팻으로 연주되는 고엽이 나온다.
같은 곡인데 연주하는 사람, 부르는 사람에 따라 너무 다르다.

지금 이걸 듣고 있고, 잠시후 지금 또 다른 걸듣고있고, 잠시후 지금 다른 걸 듣고 있다.
이런식으로 고엽을 들으면 지금이란 단어를 사용한것 같다.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렸다.
현재라는 것은 순간(찰라)인것 같다. 느끼고 표현하려는 순간 지금은 지나가버린다.
대부분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이고 현재 혹은 지금은 너무 순간(찰라)라서 인식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린다.
그러나 내가 접하고 있는 시간은 항상 지금이다. 지나간 것은 내가 접했던 시간들이고 앞으로 다가올 것은 내가 접할 시간들이다.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너무 나온것 같다.

또 자러 가야겟다.
내일 일을 해야한다.

2011년 4월 6일 수요일

장/단기 적으로 돈이 중요하다.

현재 내게 많은 돈이 생긴다면, 나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도 좀더 쉽해 할수 있게 해줄것 같다.
그러나 내가 오늘 착해진다거나 바르게 살아 간다는것은 지금 당장의 문제를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단기적으로 보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바르게 살아 간다는것 보다 중요하게 보여진다.

장기적으로는 어떨까. 바르게 살아간다는것과 돈을 추구하는 것에서...
어릴때 부터 '인간으로서 바르게 살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돈이 중요하다.
돈이 없으면 노숙도 해야하고, 구걸을 해야할지도 모른다.

내가 바르다라는 것은 나의 문제이고 내가 노숙을 하고 구걸을 해야 한다면 내 가족의 행복은 멀어진다. 아파도 참아야 하고, 조미료 덤뿍 든 음식을 먹어야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 해야만 할수도 있다.

내가 부유하다라고 하는것은 내 가족의 행복도 같이 담보한다. 좋은 학교에다닐수 있고, 유기농식품을 먹을수 있고, 아프면 병원도 갈수 있고, 세계로 다니면서 견문도 넓힐수 있다.

나의 문제로만 국한되어 진다면, 바르게 살아가는것이 중요한것인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결정했으므로 그것에 파생되어지는 고통도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도 같이 포함한다.

이렇게 봐서 장기적으로도 돈이 중요한것 같다.
그러나 장기적 단기적 모두 유한의 개념이다.

무한의 개념에서 생각해본다면,
종교라는 것은 영원의 개념이 들어가므로 무한을 포함한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유한의 개념을 넘어 살아 가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현실에서는 돈이 중요한데, 왜 어릴때 부터 바르게 살아 가는것을 가르쳤을까.
아마 무한의 개념을 포함해서 선조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왔던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든다.

2011년 4월 4일 월요일

마주서다

김밥을 파는 분이 있었다.
그분 집에 김밥을 먹으러 여러명이 갔다.
그런데 김밥이 약간 짜운것이었다.
나 뿐문 아니라, 다른 분들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장사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는 김밥이 짜다라고 하는 사실을 그분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분에게 김밥이 짜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니 그분이 약간은 불쾌한 투로 " 나는 원래 짜게먹는다" 이렇게 말을 했다.
나도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당신을 위해 사실을 말하였는데, 이렇게 반응하는걸 보니 '김밥집이 장사가 안되는 이유는 뻔하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밥이 짜다'라는 사실 그것 때문에 장사가 안될수도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 주었는데, 그 김밥집 사장님은 내 말을 안듣고, 왜 짜증을 내는건지.. 그분에게 문제가 있다라고 그렇게 단정을 지었다.

그런데 집에와서 공곰히 생각을 해보니, 어떤 것이 사실이더라도 내가 말을 할때, 내가 하는 말뿐만 아니라 태도나 감정도 같이 그분에게 전달이 된다라는 것을 조금 느끼게 되었다.
어쩌보면 나는 '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었던것 같다.
그것을 말하는 태도에서 나는 당신에게 충고를 해주고 있다.
'내 말이 정확한 사실이기 때문에 당신은 내말을 들어야 한다'라는 그런 감정도 동시에 전달이 되고 있지는 않았을까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분에게 사실을 전달하기 전에 상처를 먼저 입힘으로 인해서, 그분이 '짜다'라는 사실을 듣는것 보다 상처의 아픔이 먼저 느껴져서 사실이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위의 것과는 별개 이지만, 내가 판단해서 어떤것이 진실이라고 여겨 지더라도(사실 내가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판단한다것 자체가 불가능 하지만) 상대방이 그 진실에 대면을 해서 그 진실과 마주 설수 없다고 생각되어 진다면, 나는 그것을 말함에 있어 유보를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가진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유보함은 계속 될수 없으므로, 어떻게 하면 그가 그 사실과 마주 설수 있도록 도와 줄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