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7일 목요일

예술과 외설 / 외설의 긍정적 기능 / 정신분석적 해석

성욕이 있다.
사전에는 "성적행위에 대한 욕망" 이렇게 나온다.
성욕이란 '섹스하고 싶다.'라는 느낌의 드러냄 이라고 볼수있다.

성욕이라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고,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하다.

모든 사람에게 성적 욕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낼수 없다.
성욕은 사회적 규범과 도덕에 의해서 제어된다.
일반적으로 성적욕망을 드러낼때 열린공간에서는 자신을 욕망을 드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도덕 규범을 통해서 스스로를 검열하고, 세상이 인정하는 범위내에서 욕망을 드러낸다.

사람에게는 '섹스하고 싶다'라는 성적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해결방법을 추구한다.
욕망의 해결방법이 금지된것들은 억압된고, 사회적으로 순화되어 밖으로 드러난다.

누구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성적 판타지가 있을수 있다.
성적 판타지와 사회적 규범/도덕의 격차가 커질때 성욕을 억압되고 억압된 성욕을 더욱 커지게 된다.

많은 성인들에게 섹스는 일상의 하나이다.
즉 밥을 먹는것과 같은 삶의 하나이다.
그러나 섹스는 도덕과 규율에 의해 제한된다.

예술과 외설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외설이라고 불려지는 것들이 있다.
삼류소설, 포르노, 허슬러, 플레이보이 등등..
이런 것들의 특징은 성육을 끌어 올리려는데 중심있다.

예술작품이라고 불리워 지는 것들의 목표는 성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말하자고 하는 의미를 추구한다.

의미의 추구와 직접적 성욕의 발현 이것이 예술과 외설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성욕이라는 것은 사회적 도덕과 규범에 의해 스스로에 의해  검열되어서 밖으로 드러난다.
자신이 성욕이 사회적 규범과 도덕에 위배되지 않을때에는 그대로 드러나명 억압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 어긋날때 억압되어진 상태에서 드러남으로 일정한 욕구는 갖히게 된다.
억압이라는 것은 눌려진다는 것이다.
비도덕적인 성욕들은 눌리어져있고, 그힘은 눌리워진 만큼 강화되어 있다.

성욕은 눌리워진것들이 강한것이다.

외설은 눌리워진 성욕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외설을 내용은 비도덕적인 것들이 많다.

완전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성욕과 사회적 규범/도덕의 범위내에 성적 욕망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욕은 일정부분 프로이드식으로 말하자면 초자아에 의해 눌리어져있다.

눌리어져 드러나지 못하는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충동은 커진다.
충동은 행동화의 위험을 내포한다.
강렬한 충동은 강렬한 행동화는 포함할수 있다.

외설의 기능이 있다.
개개인들이 가진 눌리어진 욕망의 해소를 돕는 기능을 한다.
외설이라 불리워지는 것들을 봄으로써 일정부분 눌이어진 욕망이 밖으로 드러난다.
그러면서 눌리어진 욕망이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간다.

따라서 충동의 긴장감은 어느정도 해소되기도 한다.

그러나 외설의 문제점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