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6일 화요일

설국열차 마지막 장면 북극곰이 영화의 모든것을 설명한다.

영화를 안보신 분은 읽으시면 안됩니다.


설국열차 마지막 장면 북극곰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생물이 멸종했는데 어느날 북극곰이 다시 살아 났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극곰이 살수 있는 환경이 있었고, 북극곰의 먹이사슬로 연결되어있는 동물이 살았있었을 것이다. 

설국열차에서는 모두 자리를 지킬것을 강요받는다. 
그것은 설국열차안에서만이 살수 있는 공간이고, 그 공간을 지킬필요가 있을때 참으로 성립된다. 

윌포드는 밖같의 환경에 대해서 몰랐을까
아니면 자신의 신격화를 위해서 바깥도 살수 있다라는 정보는 통제했을까.

어린이 학교가 나온다. 
학교에서 윌포드는 모든사람을 구한 신적인 존재로 교육받는다. 
그리고 열차안만이 살수있는 공간이라고 교육받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얼어죽은 장면을 보여주면서, 밖은 죽음의 공간임을 이야기 한다. 그 아이들이 자라면 어떻게 믿을까. 

그런데 요나만이 그 교육에서 자유롭다.
기차에서 태어나서 그 교육을 받지 않은듯 하다. 

커티스도 자유롭지 못하다. 
밖으로 나가는 문을 폭파하려고 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가 생각하는 생존의 공간도 열차내로 머물러 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 생각은 조작되어 질수 있다. 
그러나 느낌이라는것은 조금더 진실에 가깝다. 

밖으로 나가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누이트족이었다고 한다. 
태생적으로 눈에서 살던 사람들.. 그들의 느낌속에는 밖에 살수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얼어 죽었을까. 윌포드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에 의해서 타살당했을까. 
이누이트족은 북극곰을 보았을 가능성이있다. 혹은 눈이 모양에서 온도를 느낄수 있었을수도 있다. 

단하나만이 진리이다. 그 진리를 지키기위해서 당신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은 통제되어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은 어디에서 일어 날까. 
우리의 삶곳곳에서 이러한 것들이 일어난다. 
불교에서도 우리가 감각으로 느끼고 보는 직접적인 경험은 가짜일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기독교에서는 항상 깨어있으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도 기독교도 종파의 입장으로 돌아 가버리면 깨어있는 사람이 버겁다. 
원자력만이 우리가 발전할수 있는 길이다. 다른것을 처다 보지 마라.. 그건 말이 안된다라고 이야기 한다. 

북극곰이 살고 있다. 그러면 어떤 제한된 공간속에서 다른 사람들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수도 있다. 그러면 윌포드가 말하는 가정은 깨어진다. 
그의 신격화는 무너진다. 
아마 다른 사람이 알았다면 사람들은 계급혁명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아니라. 밖으로 나가기 위한 투쟁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윌포드가 제공하는 조건내에서 투쟁을 한다. 그러나 남궁민수만이 밖으로 나가기 위한 투쟁을 한다. 
윌포드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은 남궁민수이다. 
그러나 언젠가 기차가 문제가 생기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을 윌포드는 알고 있었는것 같다. 기차의 엔진은 조금씩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그래서... 꼬리칸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남궁민수만은 죽일수 없었다. 언젠가 기차의 문을 열기위해서...그래서 유폐시킨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 진리라고 믿고있는 것들... 이것들이 진짜인가?

정신분석에서 마음을 분석할때... 우리가 실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대부분 가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는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 있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어떤것은 표면의것이다. 그 표면은 그속에 있는 어떤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게 보통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이다. 

우리의 확고한 생각을 무너트려야 마음의 고통속에서 벋어날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 직면하는 개개인의 문제는 각자가 가진 자신의 확고한 생각에서 기반한다고 여겨진다. 확고한 기반이 무너지면 큰일 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지키기위해 노력한다. 
그노력이 비정상적일때 그게 우울증이고 정신분열이고, 노이로제이다.
영화를 개인의 마음과 연결시키면, 깨어있다라는 것은 괘롭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깨어있는 자만이 문을 열수 있다.

열차안에서 대부분 마약에 취해있다. 윌포드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깨어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북극곰이 있다. 그것을  윌포드가 이미 알고 있었다면,..
열차속의 사람의 생각은 이미 조작되어진 것이다. 상생이라는 미명하에...

영화를 어떻게 읽든 그것은 자유이다.
이영화가 자신이 가진 굳건한 생각을 다시한번 되돌아 보게 만든게 계기로 작용했으면 어떨까...

영화는 박진감이 넘치지도, 그래픽이 뛰어난지도 모르겠다.
감독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천부적이 재능이 느껴진다..
그런 감독이 부럽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노력을 해도 잘 되지 않되는데.....

그러나 영화를 다시 보면 졸것 같다...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으니까...

2013년 8월 5일 월요일

설국열차 결말 / 봉준호감독은 천재다...

설국열차...
제목이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설국열차라는 이름에 끌러서 극장으로 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구를 구하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이 지구를 파멸로 몰고 간다.
빙하기가 오고, 사람들은 살기위해서 열차에 오른다.
노아의 방주 그속에 탄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듯이 열차에 오른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열차는 앞에서부터 꼬리칸으로 등급이 나누어져 있다.
제일 뒤쪽같은 무임승차를 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인도 카스트의 불가축천민처럼 대우를 받는다.
지구상의 인간은 열차안에만 존재하고, 그 열차속은 하나의 사회(국가)가 된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위치를 지킬것을 강요받는다.
그 질서의 유지가 같이 살아가기위함이라고 이야기 되어진다.
그런데 꼬리칸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우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다.
태어남이 사회적 신분이었던 시대가 있었던것과 같이 그들이 최초에 탑승의 위치가 자신들의 지위가 되어버린 곳이다.

열차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혁명은 시작된다.
혁명의 목적은 지도자의 변경이다.
혁명의 주체가 지도자가 되고, 열차내의 정치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는 목적을 가진다.

혁명의 시작을 위한 기차와 기차사이의 문을 여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송강호이다.

이렇게 영화가 흘러가면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이 주재가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적 세계, 그 세계의 문제는 지도자가 잘못되었때문이다.
그 속에서는 각자의 본분을 지켜야한다.
현재의 기독교도 플라토의 이데아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영화속 중간 중간 종교에 대한 조롱이 나온다.
현재의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세상, 우리는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합리적인것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명확성을 쫓아서 나아간다.

기차는 세계를 돈다.
1바뀌가 1년이다.
돌고 도는 인생, 기차내의 사상은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돌고 도는 기차는 불교적 세계관에 가깝다.
100바뀌돌기전데 기차속의 사람은 죽게 되어 있다. 어떻게든...

이렇게 투쟁의 승리가 영화의결말 이었다면, 봉준호 감독은 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것 같다.

기차속에서의 100바퀴속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것이 목표라면... 그리고 그 목표에 인도되어 살아 가는 것이 구원이라면...인간의 가능성은 무엇일까.

세상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아 가고 싶다.
문은 잠겨 있고, 열쇠가 필요하다. 그열쇄가 남궁민수(송강호)에게 있다.
기차속에서 혁명이 성공하면 어떻게 될까.
기차속은 바뀌어 질까.
이게 감독의 물음인것 같다.

우리의 역사이든, 우리의 인생이든...쳇바뀌 도는 굴레에서 벋어나야 한다.
그것은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열차속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은 누구일까.
혁명가 커티스일까. 길리엄일까. 윌포드 일까.
그건 남궁민수이다. (개인적생각이다.)

그만이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할수 없다. 영화를 안본사람에게는 날벼락일수 있으므로...)

영화중간에 학교 장면이 나온다.
어린아이들이 교육을 받는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기차의 중심인물이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싶다.
나와 종교적 관점이 약간 다르지만, 충분이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해온적도 있는것이 사실일것 이다.
기차내의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한 교육일수 있다.

기차가 100바뀌 돌기 전에 죽는다.
우리의 삶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1등석에서 꼬리칸으로, 꼬리칸에서 1등석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삶의 가치는 기차의 폐쇄성처럼 갖힌것일까.

이제 삶의 패러다임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것 같다.
결말이 허무할수 있다.
인간의 목적은 자신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존재하는 것이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생각을 해본다.

만약 봉준호 감독이 서양사람이었다면 혁명의 성공으로 영화가 끝났을 것같다.
그러나 그는 한국사람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동양적 / 한국적 가치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남궁민수도 한국인다. 그게 열쇄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