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2일 일요일

나는 가수다. 좋은 사회

나는 가수다를 보았다.
그들이 그런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을 알릴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능력을 가지고 그냥 있었다.
그러나 무대가 생겼다.
그들의 가진 것들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열광한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가진능력을 가지고 살아 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을 펼쳐보이지 못하고 살아간다.
무대가 필요하다.

무대는 권력자들이 만든다.
권력의 구조에서 소외된 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일 무대가 없다.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가 된다면...
무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능력이,  사회에서 인정하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면...
다양한 능력은 사라지고, 각자의 능력을 갈고 닥는 것이 별로 쓸데없는 짓이 되는 사회가 된다면...
무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능력이 없어서, 소외된 자들을 사회는 패배자 라고 부른다.

2011년 5월 18일 수요일

폴 틸리히, 마누라의 잔소리...

오늘 폴 틸리히의 책 2권을 샀다. 한권은 오래전에 샀었는데, 이번에 두권을 더 샀다.

마누라가 알면 한잔소리를 들을 일이지만,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항상 담배값으로 책을 산다고 마누라를 설득한다.
그래도 잔소리는 날라 온다.


책은 가격이 있고,  나는피우지 않는 담배의 가격으로 대체를 하지만, 마누라는 그것으로 살수 있는 다른 물건으로 그 가격을 대체한다.
마누라의 잔소리는 책을 사는 날 한번으로 끝난다.

그것이 고맙다.


틸리히의 첫번째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 에 나오는 은혜에 대한 말을 써본다. 힘이 들때 가끔씩 읽으면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은혜는 우리가 큰 고통 속에서 쉼을 얻지 못할때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의미하고 공허한 삶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했던 혹을 그로부터 소외되었던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그와 우리사이의 분리가 보통이상으로 깊다고 느낄때 우리에게 덮쳐옵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우리의 무관심, 우리의 약함, 우리의 적의,  그리고 우리의 방향과 평정의 상실에 대한 우리의 혐오감이 우리에게 견딜수 없는 것이 될때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것은 해를 거듭해도 우리가 갈망했던 삶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을때, 오래된 충동이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우리를 지배할때, 절망이 모든 기쁨과 용기를 파괴할때 우리를 엄습합니다.

때로 그런 순간 한 줄기 빛이 우리의 어둠을 꿰뚫고 들어 옵니다. 그리도 다음과 같은 말이 들여 오는듯 합니다.
 [너는 용납되었다, 너보다 큰것에 의해 그리고 네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에 의해 용납되었다. 지금은 그이름을 묻지마라. 아마도 훗날 너는 그이름을 알게 될것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말라. 아마도 훗날 너는 많은 것을 하게 될것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말라. 아무것도 이행하려고 하지 말라. 아무것도 의도하지 말라. 그저 네가 용납되었다는 사실만 받아들이라!  ]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런 경험후에 우리는 전보다 더 훌륭하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전보다 더 많이 믿게 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것이 변화 됩니다. 그 순간에 은혜는 죄를 정복합니다. 화해가 소외의 심연위로 다리를 놓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수용 외에는 그 어떤 종교적, 도덕적, 혹은 지적 전제 조건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이런 은혜의 빛 안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 및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은혜의 힘을 인식합니다. " - 흔들리는 터전, 폴 틸리히 -

2011년 5월 6일 금요일

믿음을 머리로 하고 있는 내자신을 바라 보고 있다.

몇년전 저녁쯔음 50대 아주머니와 20대 남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밝게 웃는 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비쳐보였다. 내가 그분들과 스쳐지나갈때쯔음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지나가고 있었고, 20대 남자는 정신지체장애인인듯이 보였다.
아마 장애인으로 살아 가려면, 웃으면서 살아가야 사람들이 덜 싫어할것 같다는 생각에 자신으로부터 이던 가족으로 부터이든 웃음이 얼굴에 새겨진 듯한 모습이었다.
어미니에게 있어서 자식은 운명이다. 자식을 사랑할수 밖에 없다.
외면할수 없으므로, 그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렸을지 모르겠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돌보아야 한다.
마누라를 사랑한다. 마누라는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힘들어한다.
그것 때문에 간혹 싸우기도 한다.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살고, 지금까지 조금 무관심하게 살아 왔다면, 어머니에 간병에 대한 조금의 불성실은 그렇게 가슴아프지 않을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와 가까이 살고, 항상 돌봄을 받았고, 너무 사랑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어머니의 아픔에 무관심 하다는 것이 더욱 심적으로 힘들어 질수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또 사랑하는 마누라가 어머니를 간호하는데 힘들어 한다면, 그것 또한 심적으로 힘든 일이 될것이라 여겨진다.
가장 편한 것은 내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도 부족하고 마누라에 대한 사랑도 부족하다면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이상황에서는 마음이 가장 편안하게 될수도 있을것 같다.

마음이 편안하다는게 항상 좋은 것인가. 이런 의문이 든다.
삶이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죽을때까지 살아가는 것이 최고로 잘 살아 가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랑이란 시련과 불편함과 힘듬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느껴간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갈수록, 내가 짊어지고 가야만하는 시련의 무게가 늘어감이 느껴진다.

장애인 아들하고 지나가면서 눈물흘리던 아주머니의 사랑은 그아들을 외면할수 없게 만드는 무거운 짐으로 보여졌다.

얼마전 암으로 돌아가신 한분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이 살아가면서 하지 못해 안타가웠던 것을 들었다. 해보고 싶었지만 못해본것들이 아니었다.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이었다.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할때, 자신의 짐이 너무 무거워 잠시 무관심 해서 그 고통을 나누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까운 것이라고 한것 같다.

내 짐이 무거워 힘들어서, 내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함에 무관심 해지고 있는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짐이 무겁고 더욱더 많이 지면, 지금은 힘들어도, 기다림속에서 내 짐을 나눌사람들이 늘어가고, 한줄기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은총의 삶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믿음을 머리로 하고 있는 내자신을 바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