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31일 토요일

인생도 바둑처럼

바둑을 잘두지 못한다.
한 10급 정도 된다. 그래서 바둑에대해서 이야기하는것 자체가 별로 신뢰성이 없을수 있다.
그냥 내 생각이다.
바둑을 잘둘수록 하나 하나의 수는 중요하다.
아니 1급과 5단과 10급이 생각하는 각 한수의 중요함은 급수가 올라갈수로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것 같다.
하나의 수는 다음수와 연결되고, 크게 전체의 형세와 연결이 된다.
그러나 급수가 낮을수록 한수의 다음수와의 연관성은 떨어진게 된다.
이런 측면도 있을수 있다.
10급은 10급과 주로 게임을 하고 1급은 1급과 주로 게임을 하고 5단은 5단과 주로 경기를 하기때문에, 1수의 연관성은 1급 10급 5단과 달라도 별반 지장이 없을수도 있다.

바둑이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연결이 될수도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바라보는 삶, 내자신, 세상이 항상 어느정도 맞다는 의식속에서 살고 있다.
만약 이러한 의식이 없다면, 나는 항상 불안속에서 살아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삶자체가 틀릴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것 자체가 나에게 불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틀릴수 있다는 불안 자체가 나를 성장하게 만든다.

내가 삶과 내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급수를 바둑과 비교해서 10급이라면, 1급과 5단의 삶에 대한 관점은 다를것 같다. (사실 그것을 바둑과 같이 계량화해서 나타낼수는 없다.) 내가 바라보는 의미는 급수가 다르기 때문에 능력이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고, 급수가 올라 갈수록 삶을 살아갈때 하루하루, 하나의 사건, 하나의 행동들에 대해서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하루 하루의 생활은 그냥 대충 흘러간다. 바둑 한수 한수처럼,
초보자는 한수 한수가 다음수와의 연관성이 약하다. 그리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9단의 경우는 한수 한수가 서로 아주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고,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각각은 아주중요한 수이다.

내삶에서 지겹고, 나른하고, 시간이 남아서 시간을 때울 것을 찾고 하는것 자체가, 삶과 내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초보자임을 나타내주는것 같다.

10급과 10급이 둔다면, 별반 1수 한수에 대해서 불안을 가질 필요도 없을것 같다. 그냥 하던데로 하게 된다.
10급인 내가 9단과 바둑을 둔다면, 내가 두는 한수 한수에 대해서 확신을 할수 없고, 틀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상대방이 내 한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에 빠져 나의 방식이 없어 질수도 있다.
그러나 불안감은 내가 성장을 할수 있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인생에 있어서 과도한 불안감이 우울증이나 기타 병적으로 발전을 할수도 있지만...)
9단은 10급을 알아 볼수있지만, 10급은 9단인지 1급인지 5단인지 알수 없다.
단지 나보다 잘둔다는것만 알수 있다. 인생의 고수들은 한번의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인 나를 파악 할수 있으리라 하는것도 연관지어 생각해볼수 있을것 같다.

결론은 바둑을 배워서 올해까지 5급으로 가보자.
인생도 바둑처럼... 한수 한수를 낭비하지 말아야겠다.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엉뚱한 생각

어제저녁 부터 1시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 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첫 페이지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쭉 읽어 오고 있다.
책은 1시간 읽고 2시간정도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하는데, 내용이 잘 이해 되지 않으니 생각할 부분도 별로 없고 잡생각만 하다가 잠이 들었다.
오늘도 30분 정도 읽었는데 그만 읽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한부분이 눈에 들어 온다.
" 완벽하게 건강한 인간이란 단 한사람도 있으수 없다고 의사는 말 할수 있겠으나, 똑같이 우리도 인간을 잘 알게 되면 어떤 의미에서 절망하고 있지 않은 인간은 한사람도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내면 깊숙이 어떤 동요, 불화, 부조화, 불안을 느끼고 있지 않은 인간은 하나도 없다. 알지 못하는 어떤것에 대한 불안, 도대체 알게 될것 같지 않은 어떤것에 대한 불안, 생존 가능성에 대한 불안, 혹은 자기 자신에대한 불안을 갖지 않은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누구나 정신의 병을 자신의 내부에 갖고있다."

사람은 누구나 정신의 병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마 나도 가지고 있을것 같다.
문제는 이 정신의 병이 사회생활에 영향을 주느냐 주지 않느냐가 사회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인것 같다.
아마 키에르 케고르가 말하는것이 이것은 아닐것 같지만 내 마음대로 생각해 본다.

누구나 꿈을 경험을 한다. 불안이 꿈의 가위 눌림으로 나타나고, 가위눌림이 내일의 일에 영향을 주고, 다음날 잠을 자는데 영향을 줘서 잠을 못자게 되고, 지속적인 불면증을 가져 오게 된다면, 생리현상이 뒤틀리게 되고, 시각의 정보와 청각의 정보들이 뇌에서 뒤엉켜서 엉뚱한것이 보이는 환시가 보일수도 있고, 환청이 들리수도 있을것 같다.
그 현상이 사회생활에 지장을 주고, 주위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비정상이 되는것 같다. 주위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그사람에게 작용을 해서 더욱 의식하게 되고 더욱 비정상이 되어 가는것 처럼 보이고, 생리현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것 같다.

환시가 보일수 있고, 환청이 들리수 있느데, 그걸 비정상으로 생각 하고 주위를 의식 하기 때문에, 더욱 불안이 가중되는것 같다. 불안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더큰 불안을 낳고, 자기 속에 갖히게 되는것 같다.

좋아 하는 음악을계속 듣고 있으면, 음악을 안듣고 있더라도 그 음악 소리가 들리는것 같고, 무서운 영화를 보고 나서, 혼자 어두운길을 걸어가면, 무엇인가 처다보는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도 환시와 환청과 비슷한 현상일것 같다.

문제는 내 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세심히 신경을 쓰면 더욱 예민해 져서 더욱 의식하게 되고, 문제가 되는것 같다.

누구나 다 비정상적이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엉뚱한 이야기만 한것 같다. 읽고 있는 책과 상관없는듯한...
자러 가야 겠다.

돼지갈비

와이프와 같이 돼지갈비를 먹고 왔다.
먼저 돼지갈비를 초벌구이를 해서서 가져와서 숯불에 구워 먹었다.
한번 살짝 구워져 오기 때문에 그냥 생갈비를 굽는것 보다 간단히 먹을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맛은 중상정도 였고, 소스의 향이 조금 독특해서 갈비의 맛이 조금더 맛있었던것 같다.
소갈비는 비싸기 때문에 우리는 돼지갈비로 만족을 한다.
사실 소갈비가 더 맛있긴 하다. 그중에서도 한우가 맛난다.
한우가 맛있는것은 수천년동안 한반도의 토양과 우리입맛에 맞게 적응되어져 있어서 다른 수입소고기 보다 맛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양념이나 굽는 방식도 한우의 육질에 맞게 최적화 되어 있어서 맛을 배가 시키는것 같다.
아마 미국사람은 미국소가 호주사람은 호주 소가 맛있으리라 여겨진다.
각 소고기에 맞는 조리법이 있을것 같다.

와이프가 그 소스를 연구하기로 했다. 간장, 와사비, 식초, 설탕, 정도는 들어 가는것 같은데 인터넷이나 기타 자료를 찾아 봐야할것 같다. 주인한테 물어 봐도 가르쳐 주진 않는다.
소스를 만들더라도 집에서 구워먹지는 않을것 같다.
와이프는 집에서 고기 굽는걸 싫어 한다. 일단 준비할것 들이 많이 있고, 아파트라 숯불을 사용할수 없고, 냄새가 집안 곳곳에 스며 들고, 설것이할것 이 많아서 등등 이유때문이다.
나는 집에서 먹는게 좋다. 돈이 적게 든다.

이 돼지갈비집의 특징중의 하나는 공기밥은 시켰는데 된장찌게와 김치찌게를 같이 준다는 것이 었다. 다른 곳은 되장찌게만 주는데, 여기는 사이다도 하나 서비스로 줬다.
맛을 제외하고도 다른곳보다 좋은 점이 이 두가지 이다.

와이프는 삼계탕을 먹고 싶어 했는데 내가 반강제로 돼지갈비집으로 데로고 갔다.
그나마 맛이 있었기에 와이프의 잔소리로 부터 벗어 날수 있었다.

2010년 7월 25일 일요일

방어의 개념

일상을 살아 가면서 방어라는 개념은 아주 수동적인 개념으로 생각을 해왔다.
방어자체가 수동적인 것은 아닌것 같다.

"방어라는 개념은 타격을 막는 것이고, 방어의 특징적 요소는 타격을 기다리는 것이다"
전쟁과 경영이라는 책의 한구절이다.

'특징적 요소는 상대방의 타격을 기다리는것'이라는 의미가 눈에 들어 온다.
타격을 의도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정신적으로 힘든 일인것 같다.
하지만 타격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타격에 많은 손실을 입어서는 안된다.
방어의 목적이 승리이기 때문에 반격을 위한 힘은 남아 있어야 하기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방어 할일도 공격할일도 없으면 좋을 것같다.
내가 살아 가는 공간이 적자생존의 공간이라면, 어쩔수 없이 공격과 방어를 배워야 할텐데, 현재로봐서는 진화론의 적자생존이 사회적 관념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것 같다.
어찌보면 진화론과 종교는 상반되는데, 어떤 종교지도자 분들도 무한경쟁을 외치고 있고
나또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걸로 봐서 적자생존을 현실로 받아 들이고 있는것 같다.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는데, 공격과 방어 기술을 갈고 닦으면서 한정된 인생을 보내는것이 의미 있는 일은 아닌것 같다.
살아 남는것이 목적이라면, 인간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죽음은 당연한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의미 있다라고 하는것을 모르기 때문에 현실에 적응 해나가려고 하는것 것은 아닐까. 그것을 안다며, 그것만 추구하면 되는데...

2010년 7월 21일 수요일

버스

나는 차가없다. 그래서 걸어서 많이 다닌다.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탄다.
버스는 밖을 볼수있고, 계단으로 내려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좋다.
예전에 반지하 전세에서 생활을 해봐서 그런지 지하는 별로 좋지 않다.
먼거리의 경우 버스는 너무 느리고, 버스에서 책을 보면 울렁거림이 심해 속도 울렁거린다.
그래서 버스는 가까운 거리만 주로 이용한다.

마누라 소원중의 하나가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들이를 가는것이다.
그런면에서 마누라에게 조금 미안하다.

2010년 7월 15일 목요일

가난하다는것

가난하다는것은 여러가지 제약을 가져다 준다.
사고 싶은것도 한참을 생각해야 하고, 하고 싶은것도 한참을 생각해야한다.
절약을 하면서 살아 가는것과 가난하게 살아간다는것은 보이는 측면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내가 쓰러져서...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수 없게 되었을때, 나는 어떻게 될것인다.
움직일수 없으니 돈을 벌수 없다.
어떻게 먹고 살것인다.
가족이 있으니, 나를 먹여 주리라고는 여겨진다.

허나,
와이프와 걸었다 포항바닷가도, 자주 올라 갔던 앞산도, 매일다니던 산책도 갈수 없어진다.
어머니한테 한번씩 가서 돌봐드리는 일도 할수 없고,
비오는 저녁 와이프가 해주는 해물파전과 막걸리 한잔도 할수 없어진다.
친구와 만나서 세상사이야기 하면서... 바람따라 걸어 가는일도,
노래방에가서... 목이 터지도록 노래부르던 일도 할수 없다.

친구들은 자주 못만나니 나를 떠나갈지도 모를일이다.

할수 있는 일이라곤 눈을 깜박이며, 과거를 회상하거나 신세한탄밖에 없을것 같다.
주위에서 말하는 긍정적으로 삶을 바라 보라는 말들도, 그냥 흘러 가는 말로서 느껴질것 같다.

찢어지는 가난함 이란 어쩌면 이런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가난이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것'
절약이란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것'
행복이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것'

나도 가난이란 말에 좀더 가까운 삶을 살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0년 7월 14일 수요일

감홍시 따기

하루 하루가 금방 간다는 생각은 진작 부터 했었는데,
무엇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손에 닿을곳에 홍시가 있는데,
감나무 꼭데기의 홍시를 따려고 하는 건 아닌지

손에 닿는 곳의 홍시를 따야 쉬운데

꼭데기의 홍시를 따려다
아래쪽의 홍시를 다 떨어 뜨리는 건 아닌지

2010년 7월 8일 목요일

눈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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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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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는 눈에 덮혀 숨을 헐떡인다.
태양은 대지를 구하려 하지만
그 빛은 힘을 잃은다.

대지는 숨을 헐떡이며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이들은 대지로 뛰어나와
눈사람을 만들며
조금씩 대지의 숨구멍을 튀운다.

이것은 10년 전의 이야기다.
이미 대지는 아스팔트에 뭍혀 죽었고,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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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너무 더워 10년 전에 써봤던 글을 올려 본다.

2010년 7월 6일 화요일

보이지 않은 것들

비가 그치니 조금씩 더워졌다
날씨가 사람 마음의 간사함 같이 변한 것 같다
아니면, 사람마음의 간사함이 자연을 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창으로 어두운 하늘이 보인다. 별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존재는 하지만, 구름 속에 가려진건지... 공해에 찌든 하늘 속으로 숨어 버린 것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것은 존재하지만,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별처럼 하늘에 있는 것은 아는데, 무엇인가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겠고,
처음부터 하늘에 별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 별이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를 일이다.

나도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 가는 것일 수도 있고, 아는데 못보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이니 시원하다

밤이 되면 꼭 하늘에 별이 있는지 바라 봐야 겠다.

2010년 7월 4일 일요일

행복이 인생의 목적일까.

일요일하루가 지나간다.
아침에 일어나서 교회에 갔다왔다. 일요일날 하는 하나의 일상이 된지 거의 3년이 조금 넘었다
그렇다고 교회에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간혹 인사 정도 하는 사람들이 있긴하다.
처음 2년정도는 설교를 들을때 잠만왔던것 같다.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읇는다고 했는데..
나는 5년정도는 읇어야 될것 같다.

요즈음 책을 조금 읽으려고 하는데.. 편식을 하려는 경향이 생기는것 같다.
잘못하다가 내가 내스스로 세뇌를 시킬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바라보는 관점의 책만 본다면,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관점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현재의 시선이 더욱 강화 되어서 나만의 세계속에 갇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책을 선택하고 읽기 시작하면, 읽는 동안은 기존의 나의 지식과 비교하지는 말아야 겠다.
일단 그대로 읽고, 다 읽은 후에 내가 가진 시선(관점)과 비교해서 버릴것 버리고 취할것은 취해야 겠다.
기존의 시선도 버려야 할것이 있으면 버려야한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가져 왔는 관점을 바꾸기가 어려워 지는것 같다.
이관점을 바꾸게 되면 과거에 내가 해왔던것을 반성해야할 경우가 생길수도 있고, 용서를 구해야 할 일도 생길수 있다. 이렇기 되지않기 위해서 기존의 관점을 강화 시키는 방식으로 삶이 흘러가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 해주는 이론을 찾고, 강화 시키고...

어찌보면 이게 더 편안한 삶일수도 있을것 같다.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만 만나고.. 책을 보고...신문을 보고 이 속에서는 나는 틀지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행복할것 같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일까.

2010년 7월 1일 목요일

따뜻한 시선

자다가 일어 났다.
지금이 새벽 4시, 맞은편 동의 한집만 불이 켜져있다.
마누라는 자고있다. 잠안자고 켬퓨터를 하는것을 본다면, 한 잔소리가 날라 올것 같다.

어제 뉴스에서 유명한 분이 자살을 했다고 나왔었다.
상당히 힘들게 살아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힘듬이 죽음의 공포까지도 밀어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힘듬은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 었으리라 여겨 진다.
그분을 위해 잠시 기도를 해야 겠다.

몸의 건강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다.. 배가 나온 나는 조금 덜 노력을 하는것 같다.
그러나 육체적 근육은 커가지만, 마음의 근육은 점점 줄어 들어가고, 사회의 경쟁은 나로 하여금 불안을 가지고 살아 가게 만든다.
마음의 근육을 약하게 만드는 구조를 가진 경쟁사회에서...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사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것을 부인하듯이 살아 간다.
살아 남는 것이 인간의 목적은 아닐것 이지만..... 살아 남기위해 나도 발버둥 친다.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우리는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한다. 그 방황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은 의심을 만들고, 의심은 불안을 증폭 시킨다. 이런 과정들이 뇌의 일정부분을 과다하게 활성화 시키든지 혹은 과도하게 약화 시킨다. 우리가 기뻐하고 싶어도..슬프게 만들고.. 슬퍼하고 싶어도... 기뻐하게 만든다. 나에게 내가 없어 진다. 나락으로 빠져 들어 간다.
100만명의 군인으로도 100억의 돈으로도 나락에서 빠져 나올수 없다.

가장 좋은 약은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따듯한 시선인듯 하다. 겨울끝자락 배란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햇살이 봄의 전령이듯이..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따뜻한 시선... 그게 나를 나락에서 빠져나오게 할 힘이 되어 준다.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 가는것이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고, 나의존재 의미를 찾게 한다고 여겨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