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1일 금요일

장자 제물론 8장 / 내담자 중심 상담

" 말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말에는 말해지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만약 말해지는 바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말은 실제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은 말이 갓난새의 삐약거리는 소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차이가 있을까. 아니면 없을까? 도가 무엇에 의존하기에 참과 거짓이 생겼나? 말이 무엇에 의지하기에 옮고 그름이 생겼나? 어떻게 도가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을수가 있는가? 어떻게 말이 존재하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을수 있는가? 도가 작은 성취에 의지하고 말이 헛된 겉치레에 의지할때, 유가가 말하는 옳고 그름과 묵가가 말하는 옮고 그름이 있게 된다. 한쪽에서 옳다고 하는 것을 다른 쪽에서는 그르다고 하고, 한쪽에서 그르다고 하는것을 다른 쪽에서는 옳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하고, 그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고 싶다면, 그때 이용할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밝음이다. " 로버트 엘린슨의 장자 영혼변화를 위한 철학

서구 학자의 제물론 8장의 해석이다. 동양적인 해석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는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은 우리틀속에서 장자를 보는것이고, 그의 해석은 그의 틀속에서 장자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말을 들을때 내생각을 기준으로 판단을 한다. 그래서 이말은 맞고 저말은 그르다라고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사고를 하는 사람은 같은 편처럼 느껴지고, 나와 다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정치현상을 보았을때, 극단적으로 느껴진다. 화해 불가능 하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내가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말을 들을때 어떤 말들은 귀에 거슬리고, 어떤 말들은 분노를 만들어 낸다.

칼로저스이 내담자 중심 분석에서는 듣는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듣되 나를 비운체 듣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듣는 사람은 자신을 비울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의 말에 분노 느끼고, 연민도 느끼고, 불안도 느끼게 되므로, 상대방에 말에 빠져 들어가든지,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고 지시적이 된다.

위의 장자 구절에서 밝음(明)을 통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한다. 메다드 보스의 현존재 분석에서도 내담자가 가진 모든 것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드러남은 밝음에서 드러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판단하고 있다면 이야기 하는 사람이 약자라면, 듣는 사람의 판단 기준에 따르려고 노력할것이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낼수 없다.
최악의 경우 듣는사람이 원하는 말만을 할수도 있다.

'말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말에는 말해지는 무언가가 있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도 그 이상한 소리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있는것이다. 아기는 아플때 어떤 의사표시를 한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알아 듣기 힘들다. 그러나 아기는 이야기 하고 있다. 엄마는 그이야기를 알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아기의 관점에서 듣는다.

어떤 마음이 힘든사람들은 때로는 이상한 소리를 할때가 있다.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그의 혹은 그녀의 관점에서는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말이 안되는 말을 하느냐고 한다.
그래서 그사람은 고립된다. 듣는 사람의 틀에 맞추기 위해서 노력하고, 자신의 감정과 외부와의 차이는 커지게 된다.

완전한 밝음 속에서는 모든것들이 실존하는 것이 보인다.

듣는 사람이 밝음을 기준으로 판단 할수 있으면, 말하는 사람이 편해지고, 말하는 사람이 밝음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면 듣는 사람이 편해진다.

'밝다'  라는 것을 알기도 어려운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도 나이 60에 이순에 이르렀다 했으니...

귀가 순한 사람이 칼로저스 처럼 뛰어난 상담자가 될수 있는것 같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