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6일 목요일

섹스하다 / 언어는 어떻게 나에게 다가오는가

관계를 맺다
정사를 나누다
교접하다
성행위를 하다
성교하다
섹스하다
빠구리치다
씹하다

네이버사전에 '육체적 관계를 맺는것'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하나의 상황을 두고 다른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뉘앙스는 조금씩 다르다.
사람마다 다가오는 느낌도 조금씩 다를 것이다.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언어의 선택을 달리한다.
좀더 직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아래쪽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성욕을 느끼게 만드는 언어는 어느것이 더 할까.

정치미디어 전문가들은 언어의 선택에 사활을 거는것 같다.
어떤 단어를 선택할것인가.
어떤 정치인이 공식적으로 하는 말은 실제로 유권자의 감정의 변화를 염두해 두는 것같다.

성욕이 발동할때 우리는 구글에서 어떤 검색어를 사용할것 인가.
가장 야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를 써서 검색할것이다.
각자 성욕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는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을 성욕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를 잘알고 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도 잘알고 있다.
내가 선택해서 내 감정을 움직이느냐, 누군가에 의해 움직여 질것인가.(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좀더 정치적으로 들어 가본다.

일반적으로 부인을 소개할때 '우리 부인이다' '혹은 '우리 남편이다'라고 말한다.
영어로 our wife or our husband 라고 표현되지만, 미국에서 이렇게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들은것 같다.
'우리'라는 용어가 지역적으로 다르게 쓰이는것 같다.

'우리가 남이가' 라는 현상이 있었다.
두개의 단어가 무엇인가를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비록 그 사람이 잘못을 한것이 있어도 지켜주어야 할 어떤것을 포함하고 또는 내가 잘못을 해도 우리라는 테두리 내에서 용서받을수 있다라는 것을 포함한것 같기도 하다.
아마 혼란했던 우리나라에서 우리라는 테두리 네에서 보호받고 보호 해주었던 것이 녹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라는 용어에서 이러한 마음들이 녹아 있었는데 누군가 그 용어를 정치적으로  '우리가 남이가' 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남이가' 아주 무식한 말로 들린다.
그러나 그말을 사용했던 당사자들은 그 말이 상징하고 있던 것을 알았었던것 같다.
종교적 용어를 보면 안주 단순하다. 각인 되기 쉽고 그러나 그 종교적 말들 속에서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다.
그 녹아 있는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아마 이성적으로) 무의식적으로는 그 말을 느낀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아주 상징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말에 움직인다. 그 말에 움직이는 사람은 6.25를 경험하고 현대사의 격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여겨진다.

정치인들은 단순무식한 말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식한것이 아니라. 아주 상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 상징의 언어의 당사자가 되는 사람은 그 말에 반응한다.
시대에 따라서 드러나지 않는 여론의 흐름은 항상있다.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서 정치인들은 노력한다.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는 어떻게 보이면 무식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언어는 무의식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의 단어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려고 많은 정치인들은 비난을 무릅쓰고 그 단어를 품는다.

'우리가 남이가' 그냥 뭐 그런 무식한 말을 하는 정치인이 있느냐 이렇게 비난하고 말면 되일인지도 모르겠다.(지금은 '우리가 남이가' 라는 용어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것 같다.)
 
친구들이 모여있다. 한친구가 다른 친구를 도와주면서 '우리가 남이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의미를 경험한다. 경험은 무의식으로 쌓인다.

누군가 나의 무의식을 깨운다.  그것이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상징성이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는 깨어있어라 하는 지도 모를일이다.
정신분석이라는 것이 무의식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인데...

몇일 전에 했던 일을 기억해보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의식 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일수도 있을것 같다.
하루의 대부분은 무의식 적으로 행동한다.
우리의 행동은 의식적 행동보다는 무의식적 행동이 더 많다.
무의식에 호소하는 언어라는 것은 상당히 강력하다.
종교적 언어는 단순하면서 반복을 요구한다.
그래서 종교적 언어는 믿는사람에게 아주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 강력함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반대일수도 있게 한다.
드러나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가 남이가' 를 듣고 행동의 변화가 오는 사람에게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알게 모르게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 논리적인 것에는 마음을 닫는다.
논리적으로 어떤것을 도출하는 것보다, 자신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논리를 찾는 다고 하는 편이 맞는것일수 있을것 같다. 그 속에는 무의식이 있는것이 아닐까.
 
'레몬'이라고 했을때 침이 고인다. 그러나 이것은 레몬을 경험해보고 맛을 몬사람에게 나타는 것이다. 레몬을 모르는 경우는 침이 고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단어가 우리의 몸에서 자동적으로 침이 생성되도록 만든다.
 
미디어들은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단어들을 사용한다.
자신들의 맞게 변화되기 원하는 바램들이 들어 있다.
그 변화가 우리에게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선택은 '내'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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