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0일 금요일

장자 응제왕 마지막장 / 혼돈 / 있는 그대로 바라보다

장자 내편 응제왕 마지막 장 혼돈의 죽음으로써 끝을 맺는다.
장자의 시작은 대붕의 비상에서 시작한다.
어찌보면 시작과 끝이 상통하는 듯이 보인다.
인간은 시작과 끝을 가진다.
대붕의 좌절로서 혼돈의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남해의 임금과 북해의 임금이 중앙의 임금 '혼돈'을  찾아 온다. 
혼돈을 최선을 다해 대접을 하고, 대접을 받은 두임금은 무엇을 해줄지 찾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최선을 한다. 그러나 그 최선이 혼돈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사람은 명확히 아는 것들이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의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바른것이 무엇인지 안다. 알기 때문에 그와 반대로 하는 사람을 보면 고쳐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상대를 변화 시키고 싶은 생각을 가진다.
자신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변화시키고 싶은 욕구는 커지게 된다.
'안다'라는 것에 대해 장자는 이야기 하는것 같다.
중앙의 임금' 혼돈'에게 두 임금은 베풀고 싶다. 자신들이 아는 명확한 어떤것으로써 행한다.
만약 자신의 앎이 혼돈에게 해를 끼칠수 있다라는 생각을 했었으면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들의 앎에 의심이 없었기 때문에 혼돈을 죽음으로 내몬다.

대붕을 절대적 경지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대붕인 '나'라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장자는 모든것을 아는 '나'가 대붕이 아닐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것 같다.
내가 모든것을 아는 사람, 혹은 선택 받은 사람으로 여기는 순간 그 명확함이 '독'이 됨을
이야기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우리각자는 대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붕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것으로 자각해서도 안된다. 대붕임을 잊어야 한다.
대붕이 되기위해서 앎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앎에 머무른다면 세상에 구별을 만들고 독이 되어버린다. 그 앎을 넘어 서야한다. 장자는 앎이 필요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앎을 넘어섬을 이야기 하는것 같다.

두 임금은 앎을 넘어서지 못한다. 앎에 머물러있다. 그래서 그 앎에 절대성을 부여한다.
그 절대성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 판단의 대상을 변화시키려 한다. 자신의 기준으로
절대적 판단 기준은 질서를 요구한다.
그래서 혼돈은 죽은다. 

장자는 죽음을 통해서 대붕의 좌절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닌것 같다.
이 사건을 통해서 초월해야할 어떤 것을 이야기 한다.
그것을 찾는 것은 각자에게 맞긴다.

현존재 분석에서 정신의 혼돈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할때 발생한다고 한다.
자신이 실현해야 할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이그러 질때 마음에 혼돈이 온다고 말한다.
그 이그러짐은 관계를 통해서 발생한다.
관계속에서 한쪽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할때 문제가 생기게 된다.
절대적 기준을 가진 한쪽의 눈에는 상대는 혼돈인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혼돈을 정돈하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상대의 병을 만들어 버린다.

살다보면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이 더힘든것 같다.
가만히 지켜봐주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변해 가고
가만히 키겨봐주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화가  요청된다.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자신을 고정된 상태로 남겨버린다.
역설적이다.

빅터프랭클의 '로고테라피'도 역설이라는 방식을 택한다.

삶이란것, 한번씩 뒤집어서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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