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5일 월요일

요한일서 4장 믿음 사랑

저녁 집으로 오는길 작은 할머니가 자신 보다 등치가 큰 폐지들을 손수례에 싣고 가셨다.

그 손수례에 들려가는 폐지의 가격이 내가 들고가는 빵의 가격 보다 작게 나가 보였다.

그분이 오늘 하루 나보다 더 적게 일하신것은 아닐것 같은데, 나는 더 큰 걸 들고 집으로 향한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는 교회에 다닌다.



오늘 본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할머니의 어께에는 자신보다 더 무거운 짐이 놓여져 있다. 자신을 생존을 위해 하루 하루 살아 가실수도 있고, 몸져누워있는 자식을 위해 자신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 가실수도 있을것 같다.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이 그분을 외면하고 계셔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시는 것일까.

그분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살아가는데,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 가는데, 하나님이 사랑을 지키시는 분을 외면하고 계시는 것일까.



믿음이란 무엇일까. 교회에 나가는 것이 믿음일까.

내가 "믿는다"라는 말로 표현할때만이 믿는것일까.

믿는다고 말을 하는데, 사랑을 외면하면서 살아 가는것도 믿는것이 될수 있는것일까.



할머니는 자신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데, 나는 그저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빵을 들고 가면서 외면하면서 그냥 지나가고 있는데 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있는것일까.



나는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



사랑하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보다 무거움 짐을 지고 가고 있는 할머니가 오히려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것은 아닐까.



"요한일서 4장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일서 4장 8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그 사랑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를 아타까운 마음을 보라보고 계신것을 아닐까.

그 할머니는 믿음을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 어느 연설가가 목소리나 몸짓에도 진리를 넣어서 자기도 깊이 감격하고 또 사람을 깊이 감격시키면서 매우 감동적으로 진리를 설명하고, 태연한 태도와 대담한 눈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확고한 발굴림으로 모든 악과 모든 지옥의 힘을 딛고 일어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닥에 거의 끌릴 듯한 호사스러운 의복을 입은 채 아주 사소한 곤란에 대해서도 비겁하게 두려워하며 살며시 도망치는 일이 있다면, 그것도 또한 무한히 익살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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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이 뚫고 나간다. 누군가가 정당한 것을 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즉 그는 이해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해하고 있다는 그의 단언은 그릇된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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