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0일 일요일

기도는 철저히 개인적이어야 한다.

'믿는다'라는 단어에대해서 항상생각하게 된다.
믿음은 항상 부족하다. 내주위의 모든것에대한 믿음들이 항상부족하다.

기독교에서의 믿음의 행위는 기도로 통하는 것같다.
타인을 위한 기도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철저히 자신을 위한 기도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고선 기도는 허위가 될수 있다고 여겨진다.
나만의 생각일수 있지만, 철저히 자신의 문제가 아니고선 진실한 기도가 이루어 질수 없다고 여겨진다.

나와 떨어진 타인을 위함이란 관념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와 내가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고통이 나와는 별개의 것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진정한것이 되는 것인가.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나의 고통이다.
나가 그(녀)의 고통을 보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의 고통과 그(녀)의 고통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녀)가 아프다. 나는 그 아픈 모습을 보면서 고통을 느낀다. 내가 느끼는 그 고통이 나의 문제로 다가온다. 그(녀)의 아픔은 그(녀)의 아픔이기도 하지만 나의 아픔이기도 하다.
그 아픔속에서 기도는 진실성을 가진다.
우리는 옆사람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옆사람을 위한 기도는 허구이다.
그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그 고통이 내가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아픔은 옆사람에서 시작 되었지만, 그 아픔이 나의 문제로 다가 올때 기도는 진실해 진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를 한다. 그 속에 나의 아픔이 없다면, 가난한 사람에게 거만한 모습으로 한푼을 던져주는 부자와 다를바 없다.
기도는 철저히 나의 문제여야 한다. 나의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 오는 것이 사랑이다.
나와 너가 분리 되어서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할때 그것은 사랑이 아닌것이 된다.
그것은 관념이다.
내가 누군가을 위해서 기도할때 상대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관념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내가 분리되어 존재할수록 나의 고통은 줄어 든다.
내가 아픈 어머니를 왜면할수 있다면 그만큼 물리적으로 자유롭다.
내가 아픈 어머니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고통스럽다.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속으로 들어 간다.
기꺼히 그 고통속으로 들어 간다.
그 고통속에 신의 은총이 존재한다.
그속에 영원한 자유가 있다.

나는 그 고통속에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믿음은 나에게 어려운 숙제이다.
나의 기도는 항상 분리되어 있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한발자국 고통속을 기꺼히 들어 갈수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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