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7일 월요일

인터스텔라, 컨택트 뭐가 더 재미 있을까.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20년 가까이 지난 영화 컨택트가 생각난다.

비주얼 적인 것들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닮은것 같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은 컨택트가 생각난다.

컨택트에서는 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딸이 나온다.
딸의 관점에서

인터스텔라는 아버지의 관점에서 그려진다.

인터스텔라의 마지막 장면에서 딸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단지 딸와 아버지만이 비밀을 안다.

컨택트에서도 조디포스트의 우주여행을 아무조 믿지 않는다.
단지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믿음은 지식으로 믿는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나를 믿을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다.
모든것을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믿어야야 한다'는 강박이다.

인터스텔라의 주제가 사랑이라면 유치해 보인다.
그리고 사랑이 지구 멸망에서 구원하는 힘이라면... 더욱 유치해보니다.

서양에서는 사랑을 포괄해서 사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정이라는 표현을 쓴다.
애정, 부정, 모정 등등..
그런데 부모에 대한 사랑은 도리로서 표현한다. 그래서 '효도'라고 한다.
서양은 이모든것을 사랑이라는 바구니로 담아 표현한다.

강아지한테도 정이 들면 때기 어렵다고 한다. 그 정이 사랑이다.

그런데 서양의 포괄적인 사랑을 우리는 사랑'애' 라는 글로 축소시켜 대응한다.
애가 발전해야 정이 생기는데... 사랑을 '애'라는 단계에 머물러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하면 유치해보인다.

그런데 서양에서 말하는 사랑은 포괄적인것이다.
믿음에 기본이 되는, 구원의 기본이 되는 것이 사랑이다.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온다. 라고 할때 그 사랑은 우리의 '정'에 가까운것 같다.


인터스텔라의 감독은 구원의 기본이 사랑이다.
그 사랑이 바탕이 될때 진정한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속에서 기꺼이 희생속으로 뛰어 들수 있고, 비록 희생이더라고 그속에 구원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사랑의 정의하려고 한다.
사랑은 무엇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서 사랑할수 있는것은 아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도 사랑할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대나무 뿌리처럼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다가온 충격은 인터스텔라 보다 컨택트가 월씬 컸던것 같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